삶은 때때로 애매모호함 속에 나를 가두곤 한다.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음에도, 그 애매함이 내 발목을 잡았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배할 때, 우연히 성수대교 위에서 죽어가는 어린 고양이를 발견했다.
고양이는 힘없이 울었고, 나는 그 소리에 이끌려 다가갔다. 처음엔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살아있는 생명을 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 작은 생명을 구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고양이는 결국 내 손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는 그 생명을 살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단지 고양이 한 마리를 잃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내가 생명을 살리지 못했다는 실패감이, 내가 가진 애매모호함을 더 짙게 만들었다. 고양이의 짧은 삶까지 짊어지게 된 기분이었다. 나는 왜 그토록 필사적으로 고양이를 살리려 했을까? 그 작은 생명에 내 삶의 무게를 덧씌웠던 건 아니었을까?
고양이가 떠난 후, 내 마음은 더 깊은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힘들어졌을까? 죽음은 나에게 너무 쉽게 다가올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생각이 극에 달하던 날, 나는 성수대교 위를 지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다리 난간에 서 있던 한 남자를 발견한 건.
처음엔 그냥 지나칠까도 생각했다. 내게는 남을 구할 힘도,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그저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다. 그런데 발걸음이 멈춰졌다. 뛰어내리려는 그 남자의 얼굴이 보였고, 나는 더 이상 그저 지나칠 수 없었다. 지쳐 보였다. 마치 내가 느끼는 모든 무게를 그도 똑같이 지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난간을 넘으려 했고, 나는 망설임 끝에 그를 끌어내렸다. 한참을 버둥거리다 결국 내 품에 안긴 그는 몸을 떨며 조용히 울었다. 그 울음소리는, 내가 며칠 전 죽어가는 고양이에게서 들었던 소리와 닮아 있었다. 나는 그를 꽉 안고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마치 내 자신이 난간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기에, 그에게 어떤 위로도 건넬 자신이 없었다.
“미래가 안 보입니다,” 그가 힘겹게 내뱉었다.
“나도요,” 나는 솔직히 말했다. “나도 미래가 보이지 않아요.”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일단, 하루만 더 살아봅시다.”
그게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너무도 초라한 말처럼 들렸지만,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하루를 더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나도 잘 몰랐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그 말 한마디라도 붙잡아야 했기에.
그와의 만남 이후에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건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이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도 애매한 삶을 살아가는가? 왜 어떤 날은 그 끝을 스스로 끊어내고 싶어질 만큼 힘든 것인가? 나조차 그 해답을 찾지 못했지만, 그 남자에게 하루를 더 살아보라고 말했던 것처럼, 나도 내 삶을 조금 더 이어가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성수대교에서 그를 붙잡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나 자신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그 순간 느낀 건 아주 단순한 사실이었다. 우리는 아무리 불완전하고, 흔들리고, 무력한 상태에서도 하루를 더 살아내야 한다는 것. 그 남자를 붙잡은 것이 결국 나 자신을 붙잡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생명의 끈을 이어갔다.
내일은 또 어떤 생각에 사로잡힐지 모른다. 그가 다시 난간으로 돌아갈지, 내가 그 뒤를 따를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늘, 나는 하루를 더 살기로 했다.
그 후로 성수대교엔 난간을 더 높이는 공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나는 문득 생각해 본다. 과연 높이가 문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