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면 생각나는
제법 한산한 휴일 아침 지하철 안에서였다. 맞은편 의자에 앉은 초로의 여자가 정성스럽게 마스카라를 칠하고 있었다. 짙은 화장 탓에 오히려 깊은 주름이 피붓결 따라 확연히 드러났다. 파란 섀도에 빨간 립스틱. 이제 막 공연을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온 연극배우 같았다. 아침에 무슨 화장이 저리도 짙을까. 어디를 부지런히 가느라 화장도 마무리하지 못하고 집을 나섰을까. 살집 없는 몸에 걸친 진분홍 카디건과 초록색 통바지. 벌떡 일어나 지하철 통로를 걸으며 ‘꿈이란 말이야, 이루는 게 끝이 아니야. 힘들어도 계속 걸어가면서 지켜야 하는 거야!’라는 한 줄 대사만 한다 해도 그럴싸한 모노드라마 한 편이 연출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인은 건조하고 뻣뻣해 보이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마스카라 솔질을 할 뿐이었다. 동그란 얼굴형에 뽀얀 피부. 오뚝 선 콧날. 젊었을 땐 미인 소리깨나 들어봤음 직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매무새와 달리 갈색 검버섯이 핀 손등과 유난히 두꺼워 보이는 손마디가 녹록지 않았던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다. 가만…. 어디서 보았던 얼굴 같은데….
스물너덧 살을 넘어가고 있던 때였다. 그때 나는 자식들 공부만은 서울에서 시키고 말겠다는 욕심으로 엄마가 장만한 열다섯 평 연립주택에서 형제들과 살고 있었다. 성북구 삼선동 성곽 옆 높은 곳에 있는 저렴한 집이어서 친구들은 우리 집을 까치집이라고 불렀다. 대학로와 가까워 시간만 나면 마로니에 공원을 서성였고 가끔 소극장 연극 공연을 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만 날 일이었지만, 어떨 땐 연극배우가 되고 싶기도 했다. 연극을 해보겠다고 농담 삼아 엄마한테 말하면 엄마는 눈을 하얗게 흘기곤 했다.
우리 옆집에는 누리네 가족이 살고 있었다. 누리는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아기였다. 누리 엄마는 자주 문을 열어놓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집 문을 열면서 그 집 안을 슬금 엿볼 수가 있었다. 주방 창틀에는 자그마한 스킨답서스 초록 화분이 놓여있었고 누리 엄마는 언제나 밝은 얼굴로 노란 머그잔에 커피를 타서 마셨다. 마로니에 공원을 서성이다 돌아온 어느 날엔가는 나를 불러 커피를 같이 마시자고도 했지만 나는 사양했다. 왠지 그녀는 스킨답서스를 몇 번이나 죽여버린 나와는 차원이 다른, 산소와 이슬만 먹고 사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내 언니는 그녀와 커피도 마시고 이런저런 얘기도 하면서 지내는 눈치였다.
언니로부터 알아낸 사실은 누리 엄마 아빠가 연극배우라는 것이었다. 누리 엄마는 살림하느라 잠시 쉬고 있는 것이란다. 다음 날부터 나는 그녀가 커피를 마시자며 불러주기를 은근히 기다렸다. 그러나 타이밍이 좋지 않았던지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마로니에 공원 은행잎이 노랗게 떨어지던 토요일 오후, 나는 벤치에 앉아 연인들의 몸짓을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알은체하기에 올려다보니 그녀가 벤치 앞에 있는 게 아닌가. 떨어지는 은행잎이 노란 나비로 보였던지 누리는 뒤뚱거리는 걸음마로 허공을 잡기에 바빴다. 그날 누리 엄마의 표정은 몹시 굳어있었는데, 이사를 하게 됐다며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묻지는 않았지만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얼마 후 언니한테서 들은 사연은 역시나, 가난한 예술가에게는 까치집마저도 사치였는지 살던 집을 팔고 더 높은 곳에 있는 더 작은 평수의 집으로 이사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의 이사로 잠시 꾸어본 여배우 꿈도 봄날 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음영 없는 눈매에는 깊이가 없다던가. 마스카라로 마무리한 속눈썹으로 인해 눈가에 그늘이 짙어진 탓일까.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매에 한결 깊이가 생겼다. 몇 정거장이나 지났을까. 선하품 몇 번에 채 마르지 않았던 마스카라가 흘러 번졌다. 신선한 아침에 산뜻한 화장을 끝낸 그녀의 얼굴에 나는 왜 느닷없이 서글퍼졌을까. 마스카라 번진 눈매의 늙수그레한 그녀가 아직도 삼류 배우로 소극장을 서성일지 모를 누리 엄마일 것만 같았다. 삼류 배우, 삼류 동네, 삼류 작가, 삼류 인생…. 수많은 삼류는 인정받지는 못해도 묵묵히 제 길을 고수한다. 가장 만만한 자리에서 엑스트라가 되어 세상을 받쳐주고 정겨운 이웃이 되는 튀지 않는 사람들이다. 일류는 뾰족한 꼭대기에서 세상을 이끌고 바꾸어 가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비중 높은 주연급이다.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언제라도 의리든 사랑이든 버릴 준비가 돼 있을지 모른다. 차 안을 두루 살펴본다. 고개를 수그리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사람, 머리를 젖히고 쪽잠을 자는 사람, 가끔 쿨럭이는 사람…. 휴일 아침을 달리는 정겨운 삼류들이 눈에 들어온다. 등단한 지 몇 해가 지나도록 변변한 단행본 한 권 내지 못한 수필가인 나도 그들 중 하나다. 마스카라 번진 여자가 고개를 들어 그저 그런 삼류인 나를 바라본다. 흠칫 놀라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니 돌연 서글퍼진다. 마지막 자존심 같아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7cm 하이힐 굽을 버린 지 수년째다. 어쩌면 빳빳하게 치켜세운 마스카라 속눈썹이 삼류로서 지켜야 할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은 아니었을까.
삼류 인생을 실은 전동차는 덜컹거리며 아침을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