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빼미의 눈 통찰의 눈
목격자 진술서를 나보고 작성하라고 하더라고. 본대로 자세하게.
며칠 전, 밖에서 우당탕 소리가 나서 뛰어나가 보았어. 직원 한 사람이 화장실 앞에서 손목을 붙잡고 주저앉아 고통스러워하고 있더라고. 연유를 물었더니 문턱에 걸려 넘어졌다고 하대. 그 사고로 산재보험 처리를 위해 진술서를 써 달라는 내용의 문서였어. 목격자 개인 정보 체크 칸이 있었고 문구 중에는 확인차 연락이 올 수 있다고도 적혀있었지. 문구들을 보는 순간 왠지 자세히 쓰고 싶지 않더군. 새해라 재미 삼아 본 점괘에서 별것 아닌 거라도 송사에 끼어들지 말라고 했었거든.
문득 재작년에 봤던 영화 「올빼미」가 생각났어. 우선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지. 조선의 왕 인조 역을 맡은 유해진이 침술사인 천경수 역을 맡은 유준열의 한쪽 눈을 손으로 가리고 있는 포스터. 눈을 가린다는 것은 무언가 은폐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바가 아닐까. 경수는 시각장애인이었어. 하지만 올빼미 같은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어두울 때만 사물을 조금 볼 수 있는 주맹증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지. 그는 어찌어찌하여 어렵게 침술사로 궁궐에 들어가게 돼. 당시 왕실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의 8년 만의 귀국으로 술렁대던 때였어. 아버지 인조 임금은 소현세자의 귀국에 정체 모를 불안감에 휩싸이게 돼. 하여 궁궐 내에서는 권력 쟁취의 소용돌이가 보이지 않게 돌고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게 돼. 사인이 학질이라는데 세자의 몸 일곱 구멍에서 피가 났다더군. 세자의 죽음에 대해 뭔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구석이 있지? 죽음의 과정을 직접 본 자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주맹증 환자 경수였어. 아마도 영화 포스터가 이 부분을 말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네. 목격자의 눈을 가리고 싶은 인조의 심정을. 왕의 명을 받든 어의가 소현세자를 독살하는 현장을 경수가 목격하고, 이를 세자 부인 강빈에게 알리지. 사실을 폭로하려는 과정에서 경수는 위태로운 상황에 맞닥뜨리게 돼. 결국 인조도 죽고 경수는 본래 자신의 신분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영화는 결말이 나. 영화 중 최고의 대사를 꼽으라고 하면 두 말 필요 없이 이것을 꼽겠어.
“때로는 눈 감고 사는 게 편할 때가 있습니다.” 미천한 신분인 경수가 소현세자에게 하는 말이었어. 경수가 독살 장면을 보고도 평소 지론대로 못 본 척했더라면 권력다툼에 끼지도 않았을 테고 출셋길이 열렸을지도 모르지.
“안 보고 사는 게 몸에 좋다고 하여 눈을 감고 살면 되겠는가. 그럴수록 눈을 더 크게 살아야지” 소현세자의 대구야.
살다 보면 세상살이가 만만하지 않다고 생각될 때가 있잖아. 아닌 것을 그렇다고 해야 할 때, 내 눈으로 보고도 못 본 척해야 할 때 말이야. 영화 속 경수처럼 본 대로 말해서 삶이 피곤해지는 경우도 많잖아. 본 대로 말할 권리는 없는 것일까.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도 하지. 인간이 받아들이는 정보량의 85%가 눈을 통해 들어온다잖아. 그래서 눈을 세상과 만나는 창이라고 하지. 눈에 대한 찬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아. 그러나 ‘눈이 제아무리 높아도 눈썹 아래다.’라는 말도 있으니 눈에 너무 잘난 체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말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집착의 이유가 눈에서 비롯된다고도 하더라고. 읽었던 책,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 이런 문장이 있었어.
“여래의 눈이 천지 만물을 두루 비출 수 있는 것이라면, 소경의 눈은 빛이 완전히 차단된 암흑이다. 하지만 모두 편협한 분별과 집착에서 자유롭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아, 그래서 그런 건가 봐. 남녀의 키스 신 말이야. 키스할 때 눈을 감잖아? 모든 걸 안보겠다는 거지.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 나 당신의 전부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그런가 하면 눈이 맞았다는 말도 있잖아. 이 말은 정신적인 건 물론이고 육체적, 지적 수준까지 두 사람이 딱 맞아떨어졌다는 말일 터, 사랑에 대해 이보다 더 정확한 의미를 주는 말이 또 있을까 싶네. 죽고 못 살 것 같아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마저 멀어지는 안타까운 사연을 어떻게 하나요.’라는 핑계를 대고 이별하기도 하잖아.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가렸는데 눈빛만으로도 그 사람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읽을 수도 있는 걸 보면, 우리 신체 중 눈이 중요하긴 한가 봐. 나야 수술이 무섭기도 하고 나이 먹으면 그러려니 하며 그냥저냥 살지만, 요즘은 라섹이니 라식이니 원시 난시 교정 수술, 백내장 수술까지 천만 원 단위 수술이 일반화된 것 같아.
영어에 ‘본다’라는 단어로는 Look과 See가 있지. 보는 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대상을 보느냐에 따라 깊이가 다르게 보이기도 하는 것 같아. 최진석 철학자의 『경계에 흐르다 』에 “look은 의도를 가지고 목표물을 응시하는 행위다. 이와 달리 see는 그냥 눈에 들어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행위다. ‘see’는 ‘look’에 비해 보는 사람의 주관적 편견이나 의도가 많이 제거되어 있어서 더 전면적이고 개방적이다. 한자 문화권의 언어습관으로 보면 ‘look’은 ‘시視’에 해당되고 ‘see’는 ‘견見’에 해당한다.”라고 나오더라고.
요즘 눈이 유독 침침해. 아무튼 Look이든 see든 간에 잘난 척 그만하고 이제는 보이는 곳만이 아닌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통찰의 눈을 가지면 그저 좋겠어.
아, 그 진술서? 직접 본 것도 아닌데 문서를 작성하려니 조금 망설여지긴 하더라고. 게다가 점괘가 그리 나와서 조심스럽긴 했지. 나야 본 대로 말한다고 해서 새삼 환하게 열릴 출셋길이 닫힐 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제대로 적었어. 작은 용기를 내서 본대로 아주 자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