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할아버지는 치매가 아니라 노년기 알코올 중독 문제로 왔다. 젊은 시절부터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리니 뇌졸중에 심근 경색까지 죽을 고비를 수 차례 넘겼다. 그래도 술을 멈추질 못하니 기력도 점점 쇠했고, 술만 마시면 어디서 힘이 솟구치는지 가족들을 괴롭혔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 할아버지가 나에게 말했던 것처럼 술에서 깨보니 아내도 자식도 모두 자기 옆에 없었다. 그 때의 공허함을 할아버지는 잊지 못한다고 했다.
병동에서도 할아버지는 여기 저기 아픈 곳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 여기가 아파, 어지러워, 오늘 따라 이유도 없이 힘이 빠지네.’ 항상 힘 없이 어디가 아프다는 말만 반복하는 할아버지에게 다가설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병실에서도 외롭게 혼자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치매를 진단 받은 것은 퇴원 후 외래를 다니면서다. 당시 가족들조차 그런 결과에 대해 자신을 술로 혹사한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결국 가장 우려하던 상황을 맞닥뜨리고 나니, 나 또한 앞으로 벌어질 더 힘든 상황을 할아버지가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외로움에 휩싸인 할아버지가 한계에 부딪치면 바다에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흩어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는 양손가락에 진한 ‘봉숭아 물’을 들이고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손톱 주위로 기술적으로 물들인 것도 아니고 손가락 한두 마디 전체가 붉게 물들어 있다. 할아버지는 원래부터 마른 체형에 머리를 짧게 밀어 안 그래도 작은 두상이 더 작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마른 몸매에 두 손에 봉숭아 물까지 들이고 나니 마치 일본 영화 ‘메종 드 히미코’에 나오는 할아버지들을 볼 때 느꼈던 것처럼 처음에는 기묘했다.
‘치매가 악화됐나?’
그러면서 마음 한편으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봉숭아 물을 들인 게 무슨 문제겠는가. 하지만이전에 보이지 않던 행동을 할 경우에는 조심스럽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치매가 진행되면 퇴행 현상으로 이상하고 부적절한 행동이나 성적 행동이 늘어나는 경우도 종종 봤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이거 뭐에요? 봉숭아 물 들이셨어요?
‘아, 이거?’
‘네, 갑자기 봉숭아 물 하셔서 놀랬어요. 어떻게 하시게 된 거에요?’
‘뭐 봉숭아 물 들이는데 이유가 있나. 이쁘잖아? 잘 봐봐 이거 잘 물들었지?’
할아버지는 씨익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 양 손을 쫙 피고 두 손을 내밀어 나한테 자랑을 했다. 마치 내 아내가 미용실에서 머리를 한 후 남편이 먼저 알아 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궁금해 하는 건 대답도 안 해주시고 이리저리 손 바닥을 뒤집어 봉숭아 물을 보여주는데 여념이 없었다.
내가 아무런 반응없이 지켜만 보고 있자 할아버지도 기대하던 반응이 아니었다는 듯 다시 물어왔다.
‘왜 이상해?’
내 걱정을 너무 드러내는 것도 할아버지를 불편하게 할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할아버지 이렇게 이쁘게 하고 다니는 거 처음 봐서 그래요. 정말 이뻐요.’
‘선생도 이거 해봐. 예전에는 남자애들도 많이 했어. 동네 누나들이 애들 모아 놓고 봉숭화 꽃이랑 잎을 돌로 짓이긴 다음에 한 명씩 해줬어. 그 때는 남자애가 뭘 이런걸 하냐고 도망 다녔는데 지금 해보니까 참 이쁘네. 어릴 때 우리 엄마가 이런 거 하고 다니면 고추 떨어진다고 했는데..’
그런데 한 동안 봉숭아물 예찬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어느새 내 마음이 달라진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소소한 것에 행복해 한 표정을 본 적이 있었던가. 과거의 원망과 마음과 신체의 고통에 잠식되어 병동에서 할아버지를 만나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정도 였는데, 이제는 그 옆에 있어도 마음이 무겁지 않다.
‘할아버지, 이거 첫 눈 올 때까지 안 지워지면 사랑이 이뤄진다던데, 지금 연애하고 싶은 거 아니에요? 아님 벌써 애인 있는 거 아니에요? 애인이 해줬나?’
‘그러면 얼마나 좋아! 안 지워야겠어, 선생도 같이 해!’
이제는 할아버지가 기묘하게 보이는게 아니라 참 사랑스럽게 보였다.
솔직히 나는 할아버지가 어떤 이유로 밝아졌는지 알지 못한다. 주치의로서 내가 아는 것이라곤 오히려 치매로 인해 그의 인생에 고통이 가중됐다는 것뿐이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봉숭아 물을 빨갛게 들이고 나에게 자랑을 하는 모습을 처음에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할아버지의 표정은 입원 병동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누군가는 노인네가 봉숭아 물을 들였다고 징그럽다 할지 모르겠지만, 분명 할아버지는 봉숭아 물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끼고 있음에 틀림 없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일명 ‘소확행’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에서 유래했다.
‘갓 구워낸 빵을 손으로 찢어서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말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겨울 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감촉,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퐁퐁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 쓸 때의 기분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발췌)’
이는 불확실한 미래의 꿈이나 목표가 아닌 지금 바로 만족할 수 있는, 내 눈 앞에 있는 확실한 행복을 즐긴다는 마음이다.
그런데 이런 소확행이 젊은 세대에게 하나의 소비와 문화, 더 나아가 삶의 트렌드로 유행한 곳은 우리나라다.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가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지금 젊은 세대가 느끼고 있는 우리 나라의 고통스러운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진취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닌 현실에 안주하고 만족하는 이런 방식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누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나. 젊은 세대는 취직하기도 어렵고, 돈벌이도 쉽지 않고 내 집도 구하기 어렵다. 큰 행복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생긴 작은 행복의 추구. 그러나 이는 자신의 불행한 현실을 막연히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선택과는 다르다. 그 고통 안에서도 자신 만의 행복을 찾아 나가겠다는 자신을 짓누르는 세상을 향한 작은 반항심과 지친 나를 위한 배려가 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지금 젊은 세대들이 겪는 상실의 고통은 치매로 인해 그 동안 당연하게 여겨 왔던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현실과 참 비슷하다. 그리고 불안하게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 이로 인해 생긴 마음의 거리와 외로움. 치매 노인들의 삶도 사실 기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봉숭아 물을 들인 손을 바라보며 어린 아이처럼 웃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그들에게도 ‘소확행’이 젊은 사람들만의 소유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치매라는 멍에를 얹었음에도 그들도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그 순간을 즐길 수 있는 것들을 가질 수 있다. 자식, 손자들과 같이 모여 다 같이 식사를 하는 것, 작은 화분에 화초를 키우는 것. 달달한 믹스 커피 한잔에 행복을 느끼는 것. 최소한 자기 요라도 반듯하게 정리하는 것. ‘소확행’은 어쩌면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답고 유쾌한 삶의 방식일지 모른다.
지금 할아버지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다니는 주간 보호 센터에서 다른 회원들과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 곳 선생님들이 얼마나 잘 대해주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할아버지는 ‘덕분에’라는 단어를 자주 쓰기 시작했다. 진료실에 들어올 때도 직원에게 ‘덕분에 고마워’라고 하며, 진료실을 나갈 때도 ‘내가 덕분에 잘 지내고 있지.’라는 말을 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까지 반복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소확행’이 할아버지 삶 전체를 바꾼 것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할아버지가 주위 사람들에게 미소 지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줬으리라 생각한다.
봉숭아 물을 이쁘게 물들이고 있는 할아버지를 보면 자기답게 살아가는 것이 어떤 거창한 방식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소소한 삶의 방식이라도 그의 고유한 삶과 연결되는 순간 치매 노인이라 할지라도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충만함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나 또한 오늘은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나만의 ‘소확행’인 시원한 아이스 믹스 커피 한잔에 혼자만의 확실한 행복을 누리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