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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Feb 23. 2023

시절연인

영원하지 못해도 좋아요

절망 없는 사랑이 어디 있겠냐만은 이렇게 큰 낙차 폭을 가진 사람일 줄이야. 나는 널 보면 너무 행복했다가도 헤어지고 나면 딱 그만큼 샘이 나기 시작했어. 왜 나는! 으로 시작하는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히고 이내 하얀 나비 같은 것들이 눈앞을 막 날아다니다 까무룩 잠에 들면 넌 거기서도 날 태연하게 기다리고 있어. 내가 꿈에 출몰하는 건 주 1회로 제한해 달라고 부탁했잖아. 왜 약속을 안 지켜.


언젠가 너는 영원한 게 어디 있냐고 그런 건 없다고 단언했지.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작고 반짝이는 여자가 여기 있었구나. 난 여러 면에서 충분히 낭만적인 사람이지만 소유의 면에서는 철저히 이성적인 사람이기도 하니까. 네가 더 위대해 보였어. 하지만 동시에 속으로 염원했지. 네 말대로 영원한 건 절대 없지만 평생 함께 할 순 있을 거라고. 난 그걸 너랑 하고 싶다니까.


네가 스스럼없이 내 손을 잡아끌어줬을 때 말이야. 요즘 피부가 좋은 상태야. 한 번 만져봐, 왼쪽 볼을 내어줬을 때 말이야.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이 마구 들던 그 행복한 순간 말이야. 그때 나는 내 왼쪽 대각선 방향에 걸려있던 시계를 슬쩍 쳐다봤어. 10시 35분 근방에 놓인 시곗바늘을 보며 되려 아주 중요한 찰나의 네 시선을 놓쳤지.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안 되는데 하는 쓸모없는 걱정이나 하면서. 내가 이래.


술을 마셔야만 간신히 예쁜 말을 할 수 있는 건 내 잘못만은 아니야. 술이 더해지면 평소보다 24배는 귀엽고 사랑스러워지는 너의 문제가 더 크지. 내가 준비한 단어의 대부분을 못 견뎌하는 네 일상의 반응 덕분에 나는 너랑 멀쩡한 저녁을 보내고 싶다가도 술을 제안하게 돼. 술김에라는 멍청한 핑계를 대려는 건 아니지만 나는 맨정신으로 네 앞에 서면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들어. 다 읽히는 거 같아서 눈을 피한다구.


나는 사랑에 무력했던, 더 정확히는 무기력했던 나의 경험들이 쉽게 안다고 판단한 오만함에서 기인된 거라고 믿어왔어. 도사님은 내가 짧게 연애하고 얼른 결혼해야 하는 사주라고 했지만 그건 나를 통계로만 해석해서 그런 거야. 난 어떤 대상을 다각도로 좋아하는 데 남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거든. 오만함은 두려움을 먼저 마주했기에 당위를 얻는 내 변명거리야. 내가 널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오래 갈고닦은 결례 같은 것.


네가 '말'을 해보라고 했을 때 있잖아. 내가 또 뜬금없이 과묵해져서 반응을 유도해 내는 그 힐난 말고, 진짜 그 순간 내가 해야만 했던 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필사적으로 알고 있었고 너도 그걸 기다려줄 수 있는 여백을 보였는데. 나는 그때 단어를 고르느라 머리가 바빴어. 최대한 담담하게, 느끼하면 안 돼. 시간이 좀 걸렸고 너는 장난스레 타임 아웃을 외쳤지. 나는 엉겁결에 너에게 삿포로에 가자고 했어. 이 말이 왜 떠올랐을까.


내가 네 손을 가지고 놀린 적이 있긴 하지만 너는 손이 참 예뻐. 손을 중요시 여기는 내 특이취향마저 꼭 들어맞다니.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야. 그런 네 손이 내 손을 맞잡아줄 때 빨개지는 얼굴보다 들키기 싫었던 건 최근에 생긴 손바닥의 굳은살이었어. 나는 더 부드러운 사람이고 싶은데. 렛풀다운을 좀 덜 할 걸, 많이 까끌거릴 텐데 하는 생각을 했어. 하필 오른손에 끼고 있던 반지마저 스퀘어 라운드 형태인 딱딱한 사람.


몸이 아픈 너를 어르고 달래 가며 만남을 이어가고 싶었던 건 내 욕심이 맞아. 어떻게든 내 스페이스로, 내 페이스로 너를 끌어들이고 싶은데. 너는 그 모든 상황을 이미 한참 전에 간파해 낸 듯 애가 타는 말로 적정량의 먹이만 던져주는 조련사처럼 굴어. 내가 얼마나 뻔뻔하고 냉담한 사람인지 알면 네가 이렇게까지 내게 무신경할 순 없을 텐데. 말해도 믿질 않으니 원래의 찬우로 돌아가라는 친구의 조언은 내게 일절 통하질 않아.


내가 너를 궁금해할 수 있어서 나쁘지 않다고 여기는 요즘, 마냥 참고 견디고 있는 건 아닐까 이상한 괴로움이 항상 내 안에 있는 거 같은데. 그 잠복한 진심이 회복으로 이어지려면 내가 더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속으로만 계속 다투고 있어. 다그치다 보니 이해가 더 바람직하지 않나 나름의 내적 합의를 내렸는데 그건 생각보다 지속성이 없더라. 나는 애써 너를 이해했지만 그에 대한 기억력은 짧았어. 난 왜 그럴까.


기억났다. 우연히 읽은 이병률의 산문집이 그 출처였네. 삿포로는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라 열차가 끊기는 경우가 잦다는데서 비롯된 사랑한다는 말의 은어. 우리나라의 경우로 치환하면 사량도 같은 섬으로 놀러 가자는 정도의 플러팅. 삿포로에 가서 열차가 끊기고, 우리 여기 갇혀있지만 둘이 함께 있을까요라는 뜻. 난 너랑 있을 수 있다면 그래도 좋아라는 의미. 요론섬과 스키야끼가 전두엽에 진하게 남아있었나 보다.


내가 울고 싶을 때 전화해도 된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나는 그 말에 네가 더 좋아졌어.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한 티가 난 걸까? 나는 널 웃겨주지 못하지만 너는 날 끊임없이 감동하게 만드는구나. 어쩜 그리도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딱 필요한 순간에 담백하게 해줄까. 나는 네가 슬픈 순간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센스 없고 이상한 남자인데. 그걸 떠올리자 왕왕 울고 싶어 졌는데 네가 찔끔, 눈가를 만지길래 울지 못했어. 이 순서가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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