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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Mar 19. 2023

장난감 선언

날 계속 낭비해 줘

지금껏 은유를 필두로 십 수개의 진심을 건넸지만 여전히 날 못 믿겠다 말하는 네게 체념하듯 그럼 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아요, 라고 말한 게 과연 좋은 방법이었을까? 네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입을 맞춰줬을 때가 너무 좋은 나머지... 못 믿어도 상관없어. 그래도 좋아. 난 언제든 네 곁을 지킬게. 장난감한테 이성이 있어? 난 그냥 여기 가만히 있는 존재인 거야, 했지. 오빠. 토이스토리 봤어? 응. 근데 나 사실 대충 봤어.


그렇게라도 만남을 구걸해야만 했어. 괜히 엄한 놈한테 뺏길까 봐 초조해진 마음은 원래 내 것도 아닌 너를 탈취하고자 한 건강하지 못한 마음에서 출발했을 거야. 온전히 가질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그래서 끝을 대비하는 마음으로 심장이 다리보다 더 빨리 뛰길 바랐어. 한번 쓱 본 메뉴판을 거의 다 외울 정도로 머리가 좋은 네가 500m 밖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내 감정을 설마 못 읽었을까. 난 그냥 내려놓아야만 했던 거야.


다쳐도 좋다, 몸이 아플 때까지만 널 좋아하겠다는 다짐도 그런 이유였겠지. 누굴 사랑하는 것보다 미워하는 게 훨씬 쉬운 사람에게 평생은 정말 부질없는 낱말일까. 다행히도 난 조금씩 회복했고 넌 그냥 내가 좋았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난 그때나 지금이나 너와 친구로 남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거든. 난 네가 지겨웠던 적이 한 번도 없어. 네가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란 건 내가 직접 만나봐야만 적확히 믿을 수 있겠어.


나 이제 우악스럽게 떼쓰지도 않아. 일주일에 딱 한 번, 네가 부담스럽지 않은 날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장난감 상자에 먼지가 쌓이지 않게. 한 시간이라도 좋아. 퇴근길을 옆에서 구경만 해도 돼. 변덕스럽게 바꾸거나 미뤄도 서운해하지 않을게. 네가 어딜 가든 누굴 만나든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아니, 분명 세포 하나하나 다 신경 쓰이겠지만 어떤 말도 하지 않을게. 난 그냥 네가 좋아할 만한 음식과 공간을 찾아둘 생각이야.


다만 우리가 아무 사이가 아니게 되는 일이 그리 쉽진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날 어떤 쓸모보다는 용도로 써도 괜찮아. 난 정말 그렇게만 사용되어도 좋아. 네가 듣고 싶어 하는 재밌는 이야기를 찾고 저장할 거야. 그렇게 또 메모장 한편을 구질구질하게 채우곤 오늘은 절대 먼저 연락하지 말아야지. 캄캄한 액정을 뚫어져라 쳐다보면 가슴 언저리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는 느낌이 든다. 나 정말 널 너무 좋아하나 봐.


네가 너무 예뻐서 좋다고 했지만 넌 그게 이유의 전부여서는 안 된다고 했지. 그럼 더 고민할 수 있게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추가 배정해 줘야겠어. 난 네 덕에 세 가지 면이 크게 바뀌었어. 그래서 달라. 입을 닫지 않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게 되었고, 예쁘다면서 왜 안 쳐다봐요? 라는 말에 네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조금 더 귀여운 구석과 면면을 가진 사람이 되었어. 앞으로도 더 변할 용의가 있어.


그 어떤 수작의 의도 없이 그냥 같이 누워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 난 누워있을 때 제일 위트 있고 영민한 사람이거든. 너도 그때의 내 모습을 본다면 분명 내가 성큼 좋아질 텐데. 여기 더해진 어떤 별첨 부록 하나. 난 너보다 귀엽고 똑 부러진 사람을 앞으로 절대 못 만나겠지만 넌 나보다 널 더 좋아해 주는 사람을 분명 만날 거야. 그런 상상을 하니까 별 하나 없는 서울 밤하늘이 갑자기 노래지더라. 술 때문만은 아니야. 다음.


툭 건드리면 깨질 것만 같았는데. 이상하게 누가 굳이 건드려주길 바란 거 같아. cool cheers for fragile adults. 넌 애착인형을 거쳐오지 않은 성실한 어른이지만 애착 머그컵은 있는 귀염뽀짝한 사람답게 내가 휘어질 바엔 깨져버리고야 마는 어른이라는 걸 이미 작년부터 알고 있었구나. 사실 난 와르르 무너진 게 아니라 와장창 부서지는 유형이었구나. 그게 어른이 가져야 할 필수조건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수작을 부리는 입장에서 더- 길게 입을 맞추고 싶은 날이면 날 꼬셔달라고 말했어. 내가 제대로 꼬시면 어떻게 하게요? 거기까진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당장 느껴야 되는 게 더 중요하다 믿은 내가 생각할 틈 따위는 주지 않는 네 순간의 타이밍이 정말 놀라워. 이때쯤이면 입을 열어주겠지 하던 때는 전부 빗겨나가는 의외의 힘. 이래서 너는 나를 못 믿고 다르다고 느낀 거구나. 이게 나한테는 네가 위대한 또 다른 증거인데.


나는 재미있는 놀잇감이 되고자 너를 하나씩 터득해 나가는 중이야. 앞으로도 더 좋아할 스테이지가 분명히 있다 느끼고 있고 그걸 아파하고 받아들이고 내 식대로 꾸며내는 것에도 나름의 자신이 있. 너네 어머님도 아버님이 불쌍해서 데리고 사신다며, 아니 귀여워하신다며. 두 분의 근접한 생일처럼 우리도 정말 비슷한 점이 많잖아. 자식은 부모랑 닮아간다던데. 나는 그게 나쁘더라도 조금씩 너랑 닮아가 싶어.


내가 너에게 인간적으로 실망한 날. 평소처럼 아무것도 아닌데 나 혼자 삐진 날. 날 달래주러 서울숲으로 데려가준 날. 난 네가 구두를 신을지 미리 확인할 만큼 철두철미한 사람이지만, 너는 그보다 더 멀리 나를 배려해 주는 사슴 같은 사람이었어. 너무나 사랑스러운 너는 대체 어떻게 해줘야 되냐고 물었지. 난 또 생각만 하다가 네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지만 실은 너를 좀 열어주고 나를 더 좋아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어. 다음.


내가 여태 오픈한 모습이 전혀 멋지진 않았겠지만 그게 지겹진 않았으면 했어. 보자고 안 해. 아니지. 분명 이후에도, 이전에도 수없이 하/했겠지만 뭘 하고자 하지 말라는 친구의 코칭은 분명 깊이 담아뒀어. 성향이 마주칠 때는 나를 포기하지 말라는 말은 백번 지당하지만 그걸 적용하고 기다리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어. 전화하지 말아야 하는 게 맞다는 걸 나도 아는데 그러고 싶었어.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니까.


네가 잠투정을 부리던 2호선에서, 못내 택시를 태우지 못한 내가 한심했어. 평소와 다르게 난 에스컬레이터의 한 계단 밑에서 너를 앞으로 안았지만, 이거보다 더 바닥을 기겠지만 그걸 쪽팔려하지 않을 거야. 내가 더 잘해줄게. 우리 이 지겨운 관계를 조금만 더 이어가 보자.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평소에는 그렇게 길게 느껴졌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짧은지 몰라. 한 블록이 없어졌나? 이건 러브레터가 아닌 고해성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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