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광화문 다녀온다."
"서점? 작가님이랑 가는 거야?"
"응."
"왜 언제는 나보고 가라더니?"
규식은 놀리는 게 재밌다는 듯 묘한 표정과 함께 나를 쳐다봤다. 규식의 말이 틀린 게 하나 없어 분하지만 아무 대답 없이 밖으로 향했다.
너를 찾아내는 것은 내게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흑색의 공간에 있는 검은색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밝게, 따뜻하게 빛나는 너를 찾으면 되었으니까. 서점 앞에 서있는 네 모습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깔끔한 복장에 머리를 한 듯 고급스럽게 말려있는 너의 갈색 머리. 조금은 어두운 색의 옷을 입었지만 내게는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다. 너를 발견하고 손을 들어 너를 부르려던 찰나, 한 생각이 스쳤다.
'아. 너무 반가운 티를 내면 안 되지.'
짐짓 태연한 척을 하며 네게로 걸어갔다. 너 역시 곧 나를 알아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대표님!"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네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반가운 티를 내지 않기로 했었는데, 그 다짐은 너를 보자마자 까맣게 잊혔다.
"먼저 와계셨네요."
"조금 전에 왔어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너를 대했다. 반가운 마음과는 다르게 표현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며칠 전부터 고민하던 것이 하나 있었다. 출판 기념으로 너에게 무언가를 사주고 싶은데 무엇이 좋을까. 워낙 여자와 소통이 없다 보니 이런 사소한 문제도 내게는 큰 문제였다. 한 시간이 넘도록 모니터를 쳐다봤지만, 이런저런 광고만 잔뜩보고 괜찮은 선물은 찾지 못했다.
'규식이한테 물어볼까.'
생각해 낼 수 있는 답이 규식이 놈 하나라니. 머리를 저었다. 저번과 같은 상황이 반복될게 뻔했다. 아니 오히려 나를 놀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일주일 넘게 놀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 중 다솔씨가 들어왔다.
"대표님, 신인 작가들 작품 리스트 가져왔습니다."
"아 고마워요. 어땠어요 다솔씨가 보기에?"
"네?"
"전부 읽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읽어봤을 거잖아요. 다솔씨가 보기에 어땠냐고요."
"아 그게 그러니까. 조회수나 댓글, 별점이 많은 작품들도 괜찮았지만, 저는 제일 마지막. 가장 조회수가 없었던 작품이 좋았습니다."
"왜요?"
"주제가 흥미로웠어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잠재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과 유달리 특별한 주인공. 아직 연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몇 화 없어서 그렇지, 꾸준히 연재만 한다면 꽤 반응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런가요. 참고해서 읽어보도록 할게요. 그리고 앞으로는 모든 보고서나 자료에 다솔씨 의견도 함께 적어주세요. 규식이나 나나 다솔씨 의견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니까요. 보는 안목도 있고."
"알겠습니다 대표님.."
다솔씨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작은 회사라 일개 사원의 의견을 반영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회사이기 이전에 내 직원이자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다른 회사로 떠날 테지만 충분히 많은 것을 배워갔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 점은 회사를 차릴 때 규식 역시 동의한 부분이었다. 인사를 하고 나가는 다솔씨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이내 다급히 불러 세웠다.
"아 다솔씨!"
"네?"
다급한 목소리에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진 다솔 씨가 나를 쳐다봤다.
"잠깐 시간 되나요?"
방 문을 닫고 다솔씨와 마주 보고 테이블에 앉았다. 한껏 긴장해있는 다솔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러니까.. 다른 건 아니고.. 그 이번에 새로 출간한 작품 작가님 있잖아요. 첫 출판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고생을 많이 하셔서 뭐라도 사줄까 싶은데. 꽃집을 운영 중이라 꽃은 좀 그럴 것 같고. 뭐가 좋을까.. 아 물론 회사차원에서 말이에요. 우리는 작가님들에게 잘 대해주는 그런 이미지. 그래 마케팅! 그래서 말인데, 그.. 괜찮은 선물이 없을까요? 다솔씨는 같은 여자니까 알지 않을까 해서..."
예상과는 다른 업무 외적인 질문에 긴장이 풀린 듯 다솔씨는 큭큭대며 웃었다.
"아. 그럼 선물이 필요하신 거죠?
"네 그렇죠. 일단 향수나 뭐 그런 걸 생각해보긴 했는데 어떨까요?"
다솔씨 눈치를 보며 생각해둔 선물을 말했다. 다솔씨 표정에서 고민이 느껴졌다.
"향수는 안될 것 같아요. 처음 보는데 좀 부담이 될 것 같은데.. 첫 선물은 부담은 없지만 내가 너에게 관심은 있다 정도로 살짝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다솔씨는 어느새 이 상황에 집중해 같이 고민을 시작했다.
"그럼 어떤 게 좋을까요?"
"마카롱은 어떠세요? 부담 없이 받을 수도 있고, 사실 여자들 중에 달달한 거 안 좋아하는 여자 드물거든요.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좋은 결과를 내기도 하고!"
"아 잠깐만!"
나는 급하게 다이어리와 펜 한 자루를 가지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마카롱 가게는 어디가 괜찮아요?"
"여기가 요새 잘 나가는 마카롱 가게인데 SNS에서 정말 핫해요! 여기가 좋을 것 같아요!"
다솔씨는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내게 들이밀며 설명했다. 나는 하나라도 놓칠세라 정신없이 받아 적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밀당'인 거 아시죠?"
"아 그 정도는 압니다. '밀당' 밀고 당기기!"
"네. 반가워도 덜 반가운 척. 당길 때는 츤데레 매력으로 확 당기기!"
"츤데레요?"
"음.. 그러니까 선물을 줄 때 '오다 주웠다'같이 별거 아니라는 듯 툭 던지는 말 있잖아요. 안 챙기는 척 챙기는 거!"
"오다 주웠다를 좋아한다고요?"
"그럼요. 여자들은 그런 츤데레 매력을 진짜 좋아한다니까요?"
다솔씨의 확신에 찬 말투에 다이어리에 별표와 함께 한 문장을 썼다.
'오다 주웠다.'
"손에 그건 뭐예요?"
내 손에 들린 마카롱을 보고 너는 궁금하다는 듯 내게 물었다. 다솔씨에게 배운 그대로 하면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이다. 손에 들린 마카롱을 네게 건네며 말했다.
"오다 주웠습니다."
"네?"
얼떨떨한 표정과 함께 내 선물을 받아 든 너를 보고 있자니 꽤나 뿌듯했다. 성공이다. 역시 여자 마음은 여자가 안다고 앞으로도 다솔씨에게 도움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와 함께 서점으로 들어갔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대형 규모의 서점. 이곳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를 수만 있다면 단번에 전국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를 차지하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꽤나 영향력이 있는 서점 중 하나였다. 너와 함께 내려간 곳에서 곧 너의 책을 발견했다. 흑색의 책이었지만, 익숙한 디자인을 보고 단번에 찾아낼 수 있었다. 책은 신간 코너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 있어요!"
네가 손으로 책을 들자 흑색의 디자인이 파란색으로 변했다. 흑색의 책들 사이에서 유독 빛나는 책이 은근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매일 같이 이 서점, 저 서점을 돌아다니며 책을 홍보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신인작가의 작품을 쉽게 서점 메인 코너에 놔주는 경우도 잘 없을뿐더러, 이런 홍보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서점이 대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너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나와 함께 발품을 팔았다. 물론 네가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보통의 경우 출판사 영업을 담당하는 직원이 해야 할 일이지만, 굳이 도움이 되고 싶다는 너의 말에 나 역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규식이 영업팀에게 맡기겠다 나섰지만, 기어코 거절하고 매 순간을 너와 함께 했다. 덕분에 집에 들어가는 시간은 언제나 새벽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내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했으니까.
"하. 오늘도 열심히 했네요."
너는 차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이제 서울에 있는 큰 서점은 대부분 돌았으니 온라인 홍보에 집중하면 될 것 같네요."
"온라인이요?"
"네. 사실 저희 회사 같은 경우에 큰 출판사가 아니다 보니 대형서점에서 좋은 위치를 잡기는 힘들어요. 출판 시장 자체도 경기가 좋지 않고요. 하지만 저희가 지금까지 회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점은 온라인 마케팅을 잘했기 때문입니다. 자화자찬하는 것 같지만, 온라인 홍보로 나름 이름 있는 출판사거든요 저희가."
네 앞에서 우쭐대며 말했다. 사실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회사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SNS는 이미 십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출판사에서 자기들 책을 홍보해달라며 먼저 연락이 오는 일도 부지기수. 이런 이유로 작은 회사지만 출판업계에서는 나름 이름 있는 회사였다.
"충분히 애써주셨으니, 나머지는 저희가 맡아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에이 뭘요. 대표님도 고생하셨는데요."
"고생하셨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좋아요. 근데 시간이 좀 늦어서 문을 연 식당이 있을까요?"
시계는 벌써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번화가도 아닌 이 근처에서 괜찮은 식당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혹시 집밥 좋아하세요?"
흑색의 공간에 불을 켜니 보이지 않던 검은색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 같이 들어오는 집이지만, 오늘은 기분이 묘했다. 내 뒤에 어색해하는 네가 함께였으니까.
"들어오세요."
들어오라는 나의 말에 너는 쭈뼛대며 들어왔다. 서둘러 거실 창을 열었다. 혼자 사는 남자 냄새라도 날까 급하게 열었지만 별로 소용은 없을 것이다. 오늘따라 집이 더러워 보였다. 벽에 걸려있는 액자는 왜 이렇게 삐뚤어 보이는지. 눈에 거슬렸지만, 애써 무시한 채 너를 자리에 앉혔다. 워낙에 정리된 공간을 좋아하는 편이라 집이 더럽지는 않았다. 아니 남들이 봤을 때는 오히려 깔끔하게 보였을 테지만, 너에게는 괜히 민망해졌다.
"아 혹시 오해는 마세요! 규식이와도 힘든 일이 끝나면 집에서 조촐하게 저녁을 먹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아 네.."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건넨 말이었지만, 상황이 오히려 나빠진 것 같았다. 급하게 음식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뭐 좋아하는 음식 있으세요?"
"대표님이 직접 요리하시는 거예요?"
어색한 분위기에 잠시 짓눌려 있던 네가 놀란 듯이 나를 쳐다봤다.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은 풀린 듯했다.
"할 수 있는 게 제한적이긴 하지만, 할 수는 있습니다."
"어떤 거요?"
"일단 앉아계시겠어요? 금방 해드리겠습니다."
요리를 하며 중간중간 너를 쳐다봤다. 늘 흑색이었던 내 공간 안으로 너라는 사람이 들어오자, 집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늘 검은색인 줄로만 알았던 소파는 짙은 갈색에 가까웠고, 벽지는 검은색과는 정반대인 하얀색이었다. 그뿐인가. 선물 받아 어쩔 수 없이 들여놓은 꽃과 화분은 이제야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기쁨에서인지 자신만의 영롱한 초록색과 붉은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저 색이 바뀌었을 뿐인데, 몇 년을 살던 내 집은 너무나도 낯선 집으로 변해있었다. 음식이 다 되자 집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너를 불렀다.
"다 됐습니다."
"대표님 이런 것도 할 줄 아세요?"
정갈하게 담긴 밥 위에 튀김을 가지런히 올려둔 일본식 튀김 덮밥 텐동이었다. 색이 보이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잘할 수 있는 요리. 밥솥이 해준 밥 위에 튀김을 올리고 소스를 뿌리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물론 튀김을 튀겨야 하는 번거로운 일이 있었지만, 그걸 감수할 정도로 꽤나 괜찮은 요리였다.
"튀김만 올리면 되는데요 뭐. 이쪽으로 앉으세요."
의자를 빼며 너에게 앉기를 권했다. 어색한 듯 자리에 앉자 의자에 색이 입혀졌다. 밝은 갈색의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 생각보다 밝은 색의 의자에 흠칫 놀랐다. 곧 와인 한 병을 꺼내와 너의 잔에 채웠다.
"저 와인 맛은 잘 모르는데.."
"드셔 보세요. 분명 입에 맞을 겁니다."
맞은편에 앉아 너와 잔을 맞댔다. 너의 입술이 닿자 보랏빛으로 변하는 와인. 너의 반응이 궁금해 너를 빤히 쳐다봤다.
"와 이거 맛있네요? 무슨 와인인가요?"
"블랙와인이요."
"블랙와인이요?"
"네. 어차피 제 눈에는 모든 게 검은색이니까요. 집에서 제가 직접 담근 겁니다. 포도랑 설탕만 사용해서 발효시킨 거라 처음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도 꽤나 좋아하더라고요."
"아 누가 또 마셨었나 봐요?"
너는 와인잔을 내려놓고 쏘아붙이듯 말했다. 질투 어린 너의 말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와인과 함께 너와의 시간이 깊어갔다. 술에 취한 건지, 분위기에 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문득 드는 생각.
'이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 샛노란 햇살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저녁이면 어스름한 달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다.'
망망대해에서 한참을 표류하다 드디어 섬을 발견한 항해사처럼 나는 너라는 섬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가려면 방법은 노를 저어 섬으로 가는 방법뿐. 술에 취해 알 수 없는 용기가 생긴 탓일까. 와인을 마시고 있는 네게 나는 묵직한 직구를 던졌다.
"우리 만나볼래요?"
너와 만나는 건 기대했던 것보다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다. 너의 가게에 무수히 많이 놓여있는 형형색색의 꽃을 보는 일은 내 다른 취미가 되었으며, 그림을 보러 너와 함께 미술관에 가는 것 역시 또 다른 취미가 되었다. 그뿐인가. 맛집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음식을 먹는 것 또한 즐거웠다. 미각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색이 보이니 음식이 가진 고유의 맛이 새롭게 혀끝으로 다가왔다. 흔히 먹는 라면조차 빨간색이라는 것을 보고 매워서 먹지 못할 때도 있었으니까. 색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알게 모르게 내 생활 이곳저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행복했다. 흑백 TV 정도 되었던 인생이 점점 컬러 TV로 바뀌고 있었고, 그 중심엔 네가 있었다. 꿈이라면 깨어나기 싫을 정도의 행복. 가끔은 '언제까지 이 행복이 지속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순간순간 머리에 스쳤지만, 그때마다 너의 새하얀 미소가 나를 다시 너의 세계로 끌어당겼다.
책 또한 반응이 괜찮았다. 오프라인에서 셀 수 있을 정도의 판매를 기록하던 책은 곧 각종 온라인 홍보를 겸하니 그제야 판매량이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다. 보통의 판매 그래프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긴 했으나, 그 상승폭은 다른 책들에 비해 훨씬 컸다. 그만큼 책이 가진 매력이 크다는 뜻일 것이다. 천사와 악마, 신과 인간에 대해 너만의 세계관으로 풀어낸 너의 책은 얼마 가지 않아 서점 한쪽 코너에서 당당히 한가운데에 위치할 수 있게 되었다. 신인작가의 작품이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일이었지만, 우리는 보란 듯 해내고 있었다.
"건배!"
간만의 회식자리여서일까. 한껏 들뜬 규식은 회식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흥이 올랐다. 다솔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래도 술을 좋아하긴 했지만, 오늘은 다른 때보다 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자. 우리의 인센티브를 위하여!"
"위하여!"
오늘 받은 상여금이 좋았는지 규식과 다솔씨는 술잔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천천히 마셔 아직 시간 많아."
둘을 떼놓으려 했지만, 규식과 다솔씨는 전장을 함께 누빈 동료처럼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너는 그런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 이제 시작이야.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 계속해서 베스트셀러 자리에 있을 수 있다고."
"아 네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때도 인센티브 주실 거죠?"
이미 취기가 한껏 오른 규식이 비꼬듯 말했다.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나 역시 규식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당연하지. 그때는 지금 인센티브의 두 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솔씨가 손으로 브이 모양을 만들어 흔들어댔다. 오래간만에 받은 인센티브가 여간 좋았나 보다.
"작가님 차기작은 쓰실 거죠?"
"차기작이요?"
"네. 이렇게 반응이 좋으면 분명 차기작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을 거고요."
"본업이 있어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심장이 내려앉았다. 쓸데없는 질문이라 생각했던 규식의 질문이 곧 술자리를 적막에 휩싸이게 했다. 인기 작가가 글을 쓰지 않는다니. 벌써부터 우리 출판사로 너의 핸드폰 번호를 묻는 곳이 많았는데, 책을 쓰지 않겠다니. 너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네가 책을 쓰던, 쓰지 않던, 네가 내게 너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너의 말에 모든 이의 이목이 집중됐다.
"다음에 대표님이 직원들한테 더 많은 인센티브 주신다고 약속하시면 쓰겠습니다!".
그제야 모든 이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다. 한껏 긴장해있던 규식이 장난인 줄 알았다며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행복하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이 행복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라는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과 함께. 마음과는 다르게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은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규식과 다솔씨를 집에 보낸 후 너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너의 집이 멀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오늘은 너와 밤새 있고 싶은 이유가 더 컸다. 집 현관문을 열자, 알 수 없는 어색함이 너와 나 사이에 흘렀다. 하지만 어색함도 잠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너와 나는 서로의 입술을 맞댔다. 너의 빨간 입술이 내 흑색의 입술과 맞닿으니, 곧 내 입술에도 색이 번졌다. 굳게 닫혀있는 네 단추를 하나씩 풀며 입술에서 목으로, 목에서 가슴으로 점점 내려갔다. 너는 부끄러운지 내 손목을 잡았지만, 나는 멈출 생각이 없다는 듯 너의 손목을 다시 잡았다. 네 몸의 온기가 한층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밤이 아닌 우리의 밤을 보냈다.
"이거 봐 봐."
이불속에서 내 품에 안겨있던 네가 갑자기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이게 뭐야?"
"팔레트!"
"팔레트?"
"응 왜 있잖아. 여자들이 화장할 때 쓰는."
네가 손을 가져다 대니 흑색의 팔레트에 그제야 본연의 색이 나타났다.
"같은 색이라도 이렇게 여러 종류로 나뉜다? 브라운 계열이어도 그 색이 수십 가지가 있고, 빨간색도 수십 가지의 빨간색이 있어. 색을 단순히 '빨주노초파남보'로 나눌 수가 없는 거지."
"갑자기 이 얘기를 왜 하는 거야?"
"그냥. 앞으로 계속 너한테 알려주고 싶어서. 이 색은 무슨 색이다. 저 색은 무슨 색이다. 그러고 보면 나 팔레트 같지 않아? 팔레트도 그렇잖아. 여러 색의 물감을 팔레트에 짜야 색이 보이고, 무언가를 그릴 준비가 되는 것처럼 너도 내가 무언가를 만져야만 색이 보이는 거니까."
"그렇네."
작가 답다고 해야 할까. 생각지도 못한 상상에 피식 웃음이 났다.
"앞으로도 내가 이런저런 색 많이 보여줄게. 알았지?"
너의 사랑스러운 말에 나는 대답 대신 너를 꽉 끌어안았다. 그렇게 우리의 밤이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