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찾아와 계약을 하겠다는 너를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내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규식은 누구보다 빠르게 작성해둔 계약서를 너에게 내밀었다. 너 역시 계약서를 잡아들고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나도 모르게 계약서에 서명하던 너를 멈춰 세웠다. 규식의 소리 없는 원망이 나를 향했다. 너는 잠시 계약서를 내려놓더니 나를 보고 말했다.
"대표님의 그 말이 생각나서요."
"그 말이요?"
"더 많은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읽고 좋아해 준다면 작가로서 최고의 행복이 아니겠냐는 말이요. 대표님이 가시고 생각해봤어요. 어떤 즐거움이 나에게 글을 쓰게 해 주었을까. 단지 글 쓰는 행위 자체였을까. 그러던 중 한 장면이 생각나더라고요. 처음 글을 쓰고 누군가에게 보여줬을 때 정말 재밌다며, 다음 편은 언제나 오냐고 저를 재촉했던 장면이요. 저는 아마 그때 가장 큰 행복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규식이 놀리는 표정을 짓고 나를 쳐다봤다. 민망해진 내 얼굴을 들킨 것 같아 당황했지만, 너는 어느새 고개를 계약서에 묻고 서명을 써 내려갔다. 그게 우리의 첫 번째 이야기였다.
책을 출판하는 것은 꽤나 많은 작업이 필요했다. 이미 다 쓴 내용이라도 수정이 필요한 곳은 수정을 해야 했고, 단어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문장이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꼼꼼히 검열하고 수정해야 했다. 보통은 교정교열 업체에게 맡기는 편이지만 내 성격상 교정교열을 마치고 나온 책이라도 직접 검수를 하는 편이었다. 내가 출판하고 싶은 책이라면 더더욱.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시간을 봤을 땐 이미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피로가 몰려왔다. 책에 집중하고 있을 땐 모르지만, 작은 글자를 한 글자 한 글자 몰두해서 보다 보면 그 피로감은 말할 것도 없었다. 책상 위에 붙어있는 포스트잇을 한 장 떼서 무언가 쓰기 시작했다.
'내일은 연차 낸다'
규식에게 남기는 메모였다. 늘 마지막 검수가 끝난 다음날은 스스로에게 연차를 주곤 했다. 한 권의 책을 완성했다는 보람과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줬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올지 기대하는 것은 출판사에 다니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가방을 들고 회사를 나섰다. 차 옆자리에 아무렇게나 가방을 던지고서는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오늘따라 흑색의 달이 더욱 포근하게 다가왔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아무도 없는 집에 조명을 켰다. 곧 냉동실 문을 열고 무언가를 꺼냈다. 씻기 전에 넣어 둔 맥주였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맥주 한 캔을 비울 때면 그날 하루의 피로가 모두 씻겨져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옆에 누군가 없다는 외로움이 사무치게 힘들게도 했다.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열었다. 전화할 사람이라고는 규식뿐.
'어떻게 산거냐 그동안'
가정이 있는 규식이 이 시간에 나오기란 불가능했다. 몇 없는 연락처를 뒤지다 이내 포기하고 기대고 있던 소파에 던져버렸다. 잠시 멈춰있던 외로움이 다시금 사무쳤다. 그때 조용하던 핸드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누구지?'
연락 올 사람은 없는데. 핸드폰을 열고 본 메시지에는 너의 이름이 찍혀있었다.
'대표님 책은 어느 정도 되었나요?'
기쁨. 그것도 아니면 설렘. 도통 알 수 없는 감정이 내 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어떠랴. 지금 당장 행복하면 그만인 것을. 서둘러 너에게 답장을 하려던 내 손을 가까스로 막았다.
'뭐 밀당 같은 걸 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조금만 더 이따가 답장을 보낼까. 답장은 뭐라고 보내야 할까. 너무 딱딱하게 보내면 자기를 싫어한다고 오해하지는 않을까. 긴장감에 서둘러 핸드폰을 열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뭐야 이 시간에?"
규식이었다.
"야야 규식아. 연락 왔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무슨 연락?"
"작가님한테 연락 왔다고!"
"난 또. 그게 뭐?"
"그게 뭐라니? 이 시간에 연락이 왔는데!"
수화기 너머로 규식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그래서 뭐라고 왔는데?"
"책 얼마나 완성됐냐고."
"그럼 대답해주면 되겠네."
"뭐라고? 너무 바로 답장하면 좀 그렇겠지?"
"아이고 연애 안 해 본 티 그만 내고 빨리 답장해드려라. 지금 몇 시인 줄 알지?"
하여튼 감성 없는 놈. 친구가 위급한 상황에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소금이나 뿌리다니.
"알았다."
무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고 답장을 보냈다.
'검수 끝났습니다. 금주 내로 출판 작업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나도 모르게 메시지를 보내고 핸드폰과 멀찍이 거리를 유지했다. 안 그래도 고요하던 집이 더욱 고요해졌다. 그 적막이 싫은 듯 핸드폰은 바로 알림을 울려댔다. 꽤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재빨리 핸드폰을 잡아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 그런가요. 밤늦게 죄송합니다.'
맥이 탁 풀리는 문자. 그럼 그렇지. 규식의 말이 맞았다. 핸드폰을 내려두려는 찰나 다시 한번 알림이 왔다.
'대표님이 보시기에는 어떻던가요?'
그렇지! 한줄기 보이는 희망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밀당은 까맣게 잊은 채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마치 처음 핸드폰을 사고 여기저기 문자를 보내던 어릴 때의 나처럼.
'교정한 부분이 꽤나 있었지만 스토리나 내용 전개는 훌륭합니다.'
'아니 그런 거 말고요. 대표님이 보시기에 사람들이 좋게 평가할만한 책인가요?'
'아무리 훌륭한 대작이라도 비평은 있기 마련입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그런가요..'
'하지만 저와 제 직원들은 하나같이 매력적인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작가님의 1호 팬이라고 해두죠.'
'감사합니다. 사실 책을 처음 출판하는 거라 아직도 이게 맞는지 모르겠고 그러네요. 밤늦게 죄송했습니다.'
아쉬움. 분명 아쉬움이었다. 이렇게 연락을 끝내버리면 다시 혼자가 된 집안에 남는 것뿐. 한참을 망설이다 메시지를 보냈다.
'괜찮다면 내일 회사에 한 번 나오시죠. 책 표지에 관해 의논도 필요하고, 어느 정도 완성된 지 직접 확인하신다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실 겁니다.'
'아 그래도 될까요? 안 그래도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너의 설렘이 메신저 너머로 나에게 전달됐다.
'내일 오전에 모시러 가겠습니다.'
짤막한 메시지와 함께 대화를 마무리했다. 더 이상 외로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설렘과 기대. 서둘러 마시던 맥주캔을 치워버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내일 오전부터 준비하려면 꽤나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것이다.
"어 뭐야? 오늘 연차 낸다며?"
규식이 의아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하여튼 눈치 없는 놈.
"오늘 작가님에게 표지 디자인이랑 진행상태 좀 말씀드리려고. 다솔씨 표지 디자인 완성된 거 지금 가지고 있나요?"
"네 대표님. 방으로 가져다 드릴까요?"
"네. 다솔씨도 본부장이랑 같이 들어오세요. 디자인에 대해 의논도 필요할 것 같고."
"네 알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내 호출에 다솔씨가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다. 표지 디자인부터 책 완성 과정까지 함께하는 것은 이제 막 출판사에 들어온 사원에게는 경험하기 힘든 것이었으니까. 너에게 줄 커피를 내렸을 때 규식과 다솔씨가 들어왔다. 이미 양손에는 여러 가지 표지 디자인 샘플이 들려있었다.
"커피?"
"됐다. 아침에 다솔씨랑 이미 한 잔 했어."
"그건 네 생각이고. 내가 내린 커피를 마신 건 아니잖아. 다솔씨 커피?"
"좋습니다 대표님!"
"봤지?"
으쓱대는 눈빛으로 규식을 흘겨봤다. 규식이 눈을 얇게 뜨고 비꼬았지만, 이 모습이 재밌다는 듯 다솔씨와 너는 피식대며 웃고 있었다. 내려진 커피를 가지고 테이블에 앉았다.
"자 시작해볼까요?"
세 사람의 열띤 이야기가 오고 갔다. 너 역시 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것저것 꺼내 들며 너의 의견을 규식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좁혀지지 않는 의견 차이. 출판사의 입장에서 본 표지 디자인과 작가인 네가 본 표지 디자인은 확실히 선택의 기준이 달랐다.
"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훅 들어온 너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식은땀이 났다. 색맹인 나는 언제나 표지 디자인 문제에서 늘 한걸음 뒤에 있었다. 디자인에 대한 문제는 전적으로 규식의 판단으로 진행됐다.
"아 저는 그러니까..."
망설이며 규식을 쳐다봤다. 규식이 알겠다는 듯 너에게 대답했다.
"대표님이 워낙에 디자인 보는 눈이 없어서요. 디자인은 보통 제가 결정합니다."
"아.. 네.."
문득, 네가 들고 있는 표지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이지만 흑색의 공간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그래. 너를 보고 있느라 네가 들고 있는 디자인에서 색감이 느껴지는 것을 차마 몰랐다.
"잠깐만!"
순간 소리를 내 나도 모르게 모두를 집중시켰다.
"그.. 작가님이 손에 들고 저를 좀 보여주시겠어요?"
"이렇게요?"
너는 어색하게 디자인을 양손에 들고 내게 보여줬다. 또렷이 보이는 색감. 두 남녀 사이에 피만큼 진한 와인색으로 디자인된 표지와 바다색이라고 들어왔던 푸르스름한 색으로 디자인된 표지. 처음으로 디자인의 색이 눈에 들어왔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눈물이 핑 돌았다.
"괜찮으세요 대표님?"
서둘러 고개를 흔들고 대답했다.
"아 네. 괜찮아요. 요새 눈이 너무 건조해서. 저는 작가님 의견이 좋은 것 같은데요?"
규식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그러다 문득 네가 집은 물건의 색이 보인다는 것을 알았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저 파란색 디자인이 괜찮긴 하지만, 어쨌든 신인의 책이잖아. 상품 매대에서 눈에 확 보여야 한다고!"
"물론 눈에 띄는 장점은 있겠지만, 매대에서 책 사는 사람만 우리 독자 아니잖아. 온라인에서 주로 판매를 진행할 예정이기도 하고. 그리고 또 네가 워낙 마케팅 잘하잖아. 표지 디자인 색이 눈에 안 띈다고 해서 네가 홍보를 못하겠냐."
의견을 말하며 규식을 치켜세웠다. 규식이 내심 으쓱한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래. 물론 그렇긴 하지."
하여튼 다루기 쉬운 놈.
"그래 그럼 디자인은 이걸로 결정하기로 하고,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길었던 회의를 마치고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가님. 식사나 같이 하시죠."
"그래요. 같이 식사나 하시죠."
눈치 없는 규식이 또다시 끼어들었다.
"너는 밀린 일이 많지 않아? 내가 어제 처리 못한 서류들이 꽤나 있는데?"
"무슨 서류? 다 처리해놓고 갔던데?"
"아 생각해보니까 아직 못 준 서류가 있네. 그거 지금 줄까?"
규식이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서둘러 상황을 수습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나는 밀린 업무가 좀 있어서. 두 분이서 식사 맛있게 하세요."
방을 나가는 규식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쳤지만 상관없었다. 내게 중요한 건 앞으로 너와 보낼 시간이었으니까.
"가실까요 작가님?"
한껏 들뜬 목소리로 너와 함께 회사를 나섰다.
규식과 자주 가던 식당으로 향했다. 규식이 아닌 너와 함께 가게로 들어가자 사장님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오늘은 새로운 사람이네?"
"아 규식이는 회사에 남은 일이 있어서요."
"보기 좋네. 남자랑 다니지 말고 좀 여자랑 다니고 그래."
사장님은 짓궂은 농담을 던지고는 주방으로 사라졌다. 뜻밖의 장난에 나도 모르게 네 눈치를 봤지만, 너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메뉴판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여기는 뭐가 맛있어요?"
"주먹고기가 맛있습니다."
"주먹고기요?"
"네. 고생도 하셨으니 마음껏 드세요. 작가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갈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네가 부담스러워 할 수 있을 것 같아 익숙한 고깃집으로 데려왔다. 다행히도 너는 음식이 입에 맞았는지, 연신 맛있다는 말과 함께였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식사가 한창일 무렵 너는 내게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대표님은 원래 디자인 작업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으세요?"
뜻밖의 질문.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네 보통은 규식이가 주로 결정을 합니다. 아무래도 디자인 쪽으로 보는 눈도 없고, 그런 부분은 규식이가 잘 결정하는 편이니까요."
"그럼 아까는 왜 제 편 들어주신 거예요?"
아차. 상대는 의도치 않았지만 스스로가 궁지에 몰렸음을 인지했다. 어디서부터,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색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래서 대표란 놈이 책 표지 디자인 컨펌조차 하지 못한다고? 심지어 학교 다닐 때는 '눈깔병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고? 편안했던 내 표정이 붉어졌다. 당황하기도 했지만, 더욱 느껴지는 수치심. 내면 깊숙한 곳의 치부를 들키기라도 한 것 마냥,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다 드셨으면 일어나시죠."
나는 그 짧은 순간에 규식을 만나기 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사람들에게 상처 받기 싫어 선을 긋고 혼자였던 나처럼. 너의 얼굴에서 당황한 모습이 훤히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나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집에 갈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의 방향으로 등을 돌려 사라졌다.
"뭐?"
"말했잖아. 앞으로 작가님과 논의할 게 있으면 네가 하라고."
갑자기 자신을 불러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규식은 재차 되물었다.
"그러니까. 왜 그런 거냐고.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닌데. 너 또 무슨 사고 쳤어?"
"그런 거 아니래도."
"또 그때 그 일이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알고 있던 규식이었다. 어제의 내 모습을 봤더라도, 규식은 처음이 아니었다. 성인이 되며 겨우 나아지나 싶었지만, 결국 제자리였다.
"네 말은 무슨 뜻인 줄은 알겠는데, 당분간만이다. 나도 일 많아."
규식은 그렇게 한마디 말을 남긴 채 방을 나갔다.
'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어제의 내 모습을 생각하니 너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이게 최선일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니까. 아니 나를 이해해주고 내 편에 섰다가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한 사람도 있었으니까. 잡념을 떨쳐내기 위해 책상에 놓인 서류들을 하나씩 읽어갔다. 오늘따라 유독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출간 작업은 원활히 흘러갔다. 그도 그럴 것이 작업은 이미 다 해둔 상태였고, 인쇄 후 책을 찍어내는 작업만이 남아있었다. 너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피해 다니는 것도 익숙해져 이제는 규식을 거쳐 너의 소식을 듣는 것도 어색하지 않았다.
"드디어 내일이네."
"그러게. 디자인도 깔끔하고, 내용도 괜찮고. 이번엔 진짜 기대해봐도 될 것 같다."
규식이 한껏 기대감에 찬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하지만 지나친 기대는 더 큰 실망을 안겨줄 수도 있는 법. 나 또한 마음 한편에 기대감이 차있었지만, 애써 침착한 척 규식의 말을 끊어냈다.
"그게 쉽냐."
"노력은 해야지."
"아무튼 출간은 내일 직접 작가님 모시고 가서 보여드리는 게 좋을 것 같다. 첫 출판이라 의미도 있을 거고."
"아 그게. 그래서 말인데.."
뭔데 이렇게 뜸을 들이는 것일까. 보통 할 말은 하고 사는 편인 규식이 말을 더듬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몸을 감쌌다.
"뭔데?"
"아 그게 그러니까. 이게 내가 의도한 건 아니고 작가님이 원해서.."
"그러니까 뭐냐고!"
답답한 마음에 규식을 다그치던 중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들어오는 한 존재. 어둡고 칙칙한 흑색의 공간에 너라는 색이 점점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염색을 했는지 조금 밝아진 머리와 초록색이라 불리는 색의 니트를 걸치고 온 너는 나를 보더니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나도 모르게 너를 따라 인사했다.
"아. 오늘 미팅이 있는 걸 깜빡했네. 그럼 두 분 이야기 나누세요."
서둘러 방을 나가는 규식을 노려봤지만, 규식은 내 시선 따위는 무시한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너와 나 사이에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그동안 피해 다닌 이유를 줄줄이 설명이라도 해야 할까. 아니면 그저 업무적인 이야기로 대화를 채워가야 할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내게 너는 먼저 말을 건넸다.
"잘 지내셨나요 대표님?"
안부 인사치고는 꽤나 날이 서있었다.
"아 네. 작가님도 잘 지내셨고요?"
"아뇨. 저는 별로. 누구 때문에."
아. 화가 난 것이 분명하다. 이런 상황은 익숙하지 않았다. 사람을 대하는 노하우나 그것도 아니라면 노련미라도 있어야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내게 없었다. 또다시 너와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커피 드시겠어요?"
기껏 한다는 말이 '커피 드시겠어요'라니. 내가 생각해도 멍청한 질문에 당장이라도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지만 너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막 내려지는 커피 냄새가 우리의 공간을 따뜻하게 채워갔다.
네 손에 쥐어진 커피잔의 색이 하얀색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안에 있는 검은색의 커피가 모두 사라질 때가 돼서야 출간 이야기는 끝이 났다. 사실 이야기할 것도 없었지만, 애써 이런저런 내용을 꺼내가며 말을 이어갔다.
"본부장님한테 다 들었어요."
"네?"
재차 되묻는 내 질문에 너는 잠시 망설이더니 힘겹게 말을 꺼냈다.
"색이 보이지 않으신다고..."
누군가 머리를 세게 때린 듯 어지러웠다. 순간 온갖 생각이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왜? 규식이가 그런 말을 쉽게 했을 리가 없는데?'
누구보다도 내 치부를 아는 규식이었다. 그런 규식이가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너에게 내 치부를 말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춰져 나조차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 숨겨두었던 감정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 같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달아오르고 있는 내게 너는 급히 말을 이어갔다.
"본부장님한테 말해달라고 한 건 저예요. 사실 그날 이후로 꽤나 힘들었거든요. 제가 대표님한테 무슨 실수라도 한 건지. 제 책이 마음에 안 드시는 건지. 본부장님한테 이야기했더니 '색이 보이지 않아 그런 부분에 있어 민감하다.'정도 들은 거고요."
그래. 규식에게는 내가 이런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평생을 검은색 공간에 지내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너로 인해 색이 보인다고 하니, 규식 역시 나만큼이나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하늘이 주신 기회를 나 스스로 걷어차고 있는 꼴이었으니, 규식 입장에서는 꽤나 답답했을 것이 분명했다. 규식의 입장이 이해가 되면서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일단 규식이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더 들으신 말은 없나요?"
"그게.. 저한테는 색이 보인다고.."
'하 이 자식.'
규식을 향한 분노가 다시 한번 끓어올랐다.
"그 외에는 따로 들은 건 없어요."
"죄송합니다. 조금 당황스러워서요. 회사 직원들도 모르는 이야기니까요."
너는 한참을 망설이다 내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제가 가진 색이 보인다는 건 정말인가요?"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그만일 테지만, 내게는 너무 힘들었다. 너의 무언가를 몰래 훔쳐보다 걸린 사람처럼 가까스로 대답했다.
"네.."
"아.. 그럼 제 머리색이 무슨 색인지 혹시.."
너는 조심스레 물었다. 자칫 무례한 질문일 수 있었으나, 나를 배려해 조심스레 묻는 너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저번보다 조금 밝아진 갈색이라고 표현하면 될까요?"
너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하얀 얼굴에 빨간 입술로 짓는 네 미소가 아름다웠다.
"왜 웃으시죠?"
너의 불그스름한 미소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평상심을 찾은 듯 네게 말을 건넸다.
"보기와는 다르게 꽤나 섬세하신 것 같아서요."
말을 마치고 다시 고개를 숙이고 쿡쿡 웃어대는 너를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까와는 다른 침묵이 너와 나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