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트 #2

by 이승훈

다른 날과 다름없이 하교 후 우리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규식은 체육관에 들려야 해서 조금 늦게 올 예정이었고, 부모님 역시 아직 퇴근 전이었다. 고요하던 집 안이 곧 유나의 놀란 소리로 채워졌다.

"아!"

"왜 그래?"

마시던 커피가 옷으로 쏟아져 엉망이 됐다. 검게 보이던 옷이 더욱 검게 보였다. 가져온 수건으로 커피를 닦아냈다. 하지만 여전히 남은 얼룩은 어쩔 수 없었다.

"갈아입고 올래?"

"아니 됐어. 그냥 좀 누워있을래. 오늘따라 몸이 안 좋네."

"그래 그럼. 깨워줄까?"

"응. 한 시간 후로 부탁해."

"그래."

얼마나 지났을까. 한 시간이 됐을 무렵 누워있는 유나를 확인했다. 얼룩은 마를 기미도 없이 여전히 짙은 검은색을 뽐내고 있었고, 피곤한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조금 더 자게 두는 것이 좋겠다 생각해 그대로 방을 나왔다. 얼마나 흘렀을까. 곧 규식이 운동을 마치고 문을 열었다.

"왔어?"

"어. 유나는?"

"유나 피곤하다고 좀 잔대."

"같이 먹으려고 떡볶이 사 왔는데. 깨워서 먹자."

"그래. 내가 깨울까?"

"아냐 내가 깨울게. 포장만 좀 뜯어줘."

규식은 들고 온 떡볶이를 내게 건네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포장지를 벗기려던 찰나 방 안에서 규식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놀라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유... 유나 왜 그래?"

"아 얼룩 말하는 거야? 아까 커피를 쏟아.."

"거 피잖아. 유나야 왜 그래! 일어나 봐!"

고요하던 방안이 이내 규식의 절규로 가득 찼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유나는 원래부터 몸이 좋지 않은 아이였다. 자세한 병명은 듣지 못했지만 어린 나이부터 이 병원 저 병원 옮겨 다니며 꽤나 고생을 했고, 전학도 잦아 이렇다 할 친구도 없었다. 그토록 밝았던 유나에게 이런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소문은 금방 퍼졌다. 사실이 어쨌든 간에 나는 유나를 죽인 가해자가 되어있었다. 처음에는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정도였던 소문이 둘만 있을 때 머리가 돌아 죽는걸 가만히 지켜봤다는 이야기까지. 그런 터무니없는 소문이 돌아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맞는 말일 것이다. 색만 못 보는 병신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 모든 것이 꿈은 아닐까. 이대로 눈을 감고 죽고 싶다 같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학교에 갈 생각은 아예 할 수도 없었다. 그저 병든 닭 마냥 방 안에 틀어박혀 눈을 감고 억지로 잠에 드는 수밖에 없었다. 매일같이 규식이 찾아왔지만, 단 한 번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규식을 보면 유나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나를 저 깊은 어두운 기억 속으로 끌어당길 것만 같았다. 사고가 일어나고 얼마 안 돼서 나는 결국 도망치듯 평생을 살았던 동네에서 떠났다.


규식을 다시 본 것은 대학교였다. 인기 있는 교양이 이미 가득 찬 후라 어쩔 없이 '생활과 체육'이라는 과목을 수강 신청했고, 늘 그랬듯 익숙하게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승훈이냐?"

규식이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보처럼 규식을 쳐다볼 뿐이었다. 규식과 나는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내가 도망치 듯 동네를 떠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학교에 두고두고 남아있을 것 같았던 유나의 죽음은 금세 잊혔다고 했다.

"나는 아직까지 그때의 기억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데, 사람들은 그게 아니었나 봐. 한 달. 아니 채 2주도 되지 않았는데, 유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더라. 그저 잠깐 있던 사람. 성격은 좀 좋았던 애. 진절머리가 나더라고. 우리는 그 사건으로 이렇게 헤어지고, 아직까지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데 그들은 그저 지나가는 기억 중 하나였으니까. 그래서 조용히 혼자 지내다가 졸업했다."

규식이 하는 말에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 유나의 얘기만 나오면 나는 죄인이 됐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색도 못 보는 병신이 친구 하나 구하지 못한 것이니까.

"네 잘못 아니야."

마치 내 마음이라도 읽은 것처럼 규식이 말했다.

"원래부터 아픈 애였어. 의사가 그랬다더라. 아마 처음 발견하자마자 병원에 데려왔어도 희망이 없었을 거라고. 사실 그동안에도 죽을 뻔한 위기가 많았고. 그러니 자책하지 마."

"내가 만약 색만 볼 수 있었다면, 적어도 그 상황에서 그렇게 되진 않았겠지."

"이미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애였어. 네가 색을 보고 바로 신고를 했어도 살 가능성이 적었다고. 그러니 이제 제발 똑바로 살아. 슬프지만 산사람은 살아야지. 유나도 그걸 바라고 있을 거야."

규식과 나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규식과 나는 점차 예전의 모습을 찾아갔다. 셋은 아니지만, 함께하면 즐거웠던 그때로. 지루하던 대학생활이 조금은 재밌어졌다. 규식과 함께 할 때면 종종 유나 생각이 났지만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이 유나가 바라는 일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유나는 점점 내 기억 깊은 곳에 묻어져가고 있었다. 졸업 후 규식은 2년 넘는 시간 동안 체육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나 역시 특별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회사에 다니며 매일 같은 하루를 살아왔고, 그날 역시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회사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그 길이 규식이게 전화가 왔다.

"퇴근하냐?"

"그렇지."

"술이나 한 잔 하자."

익숙한 포차에 규식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이미 한 병을 비운 소주와 그 옆에 쌓여있는 책들. 2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듯 많이 낡고 때가 타있었다. 아직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지만, 규식이 어떤 말을 할지 짐작할 수 있었.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을 건넸다.

"시험 준비는 할 만해?"

"때려치우려고."

"때려치우고 뭐하려고?"

"글쎄. 적어도 지금보단 낫겠지. 돈 한 푼 못 버는 지금보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어떤 위로도 규식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말없이 빈 소주잔에 술을 따라주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지금부터라도 취직 준비해야지. 뭐 체육교육과 나온 나를 써주는 회사가 많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규식의 말에 한동안 우리 사이에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곧 내 앞에 놓인 소주 한 잔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규식아. 나랑 동업할래?"


머리가 핑 돌정도로 고개를 휙휙 저어댔다. 내 나름의 잡념을 떨쳐내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서둘러 일을 시작해야 했다. 일이 많이 밀린 탓도 있지만, 일에 깊게 빠져야만 지금 이 생각을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책상 한쪽에 수북이 쌓여있는 원고지를 쳐다봤다. 어제 직원들이 1차 검토를 끝낸 작품들이었다. 소설부터 에세이까지. 다양한 종류의 원고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시작해볼까'

책상 위에 수북이 놓인 원고를 회의 테이블로 옮겼다. 많은 원고들을 다 옮기고 나서야 첫 장을 넘겼다. 시계는 벌써 점심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점심도 거른 채 원고 읽는 것에 집중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집중해서 원고를 읽던 중 누군가 옆으로 다가왔다. 한 손에는 샌드위치를, 다른 한 손에는 커피 한 잔을 든 채 온 사람은 규식이었다. '역시'하는 표정과 함께 규식은 말없이 샌드위치를 내게 내밀었다. 나 역시 말없이 샌드위치를 받아 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또 이러고 있냐?"

규식이 예고도 없이 말을 건넸다. 샌드위치를 입에 넣은 채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뭐가."

"또 그때 생각에 이러고 있는 거냐고."

"그런 거 아냐. 여기 밀린 원고 좀 봐봐. 바쁘다."

규식은 아닌 것을 뻔히 알면서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내가 규식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래서 괜찮은 원고 좀 건졌어?"

"아니. 필력도 필력인데, 너무 평범한 주제야. 로맨스. 판타지. 에세이. 원고 반이상 읽은 작품이 없다."

"너야 원래 깐깐하게 보는 걸로 유명하잖냐."

"진짜래도. 요새 원고를 보내는 사람은 많은데, 어떻게 이렇게 마음에 드는 작품은 없는지 참.."

"이 중에 하나는 있지 않겠냐. 우리 신간 책 찍어낸지 한 달도 넘은 거 알고 있지? 완전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시장성이 있으면 찍자고. 작품 완성도도 완성도지만 우리 직원들 월급도 주고 회식도 해야 하지 않겠냐."

"그래."

일단 대답하긴 했지만, 사실 마음속에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뒤로 우리는 말없이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가라는 말을 남긴 채 규식은 자리에서 사라졌다. 규식이 퇴근하고 난 뒤에도 나는 자리에 묶인 사람처럼 몇 시간 동안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마지막 원고를 읽을 무렵 알 수 없는 허탈감이 몰려왔다.

"마음에 드는 게 어떻게 하나도 없는지."

시계를 쳐다보니 이미 자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규식이 사다 준 커피를 입에 가져갔지만, 이미 식을 대로 식어버린 상태였다. 새 커피를 가지고 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부터 허리까지. 쑤시지 않은 곳이 없었다. 원고를 읽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려 이내 자리로 돌아왔다. 정리는 내일 하기로 하고 컴퓨터를 켜 그룹웨어에 들어갔다. 전자결재가 수북이 쌓여있을 줄 알았던 내 예상과는 다르게 결제창은 말끔했다. 본부장인 규식이 모든 결재를 처리하고 간 것이리라. 덕분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컴퓨터를 끄지 않은 채 포털의 한 웹소설 사이트에 들어갔다. 작품을 찾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일을 하면서부터 시작된 내 오래된 버릇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허탕이었다. 대사가 한 페이지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는 판타지와 무협소설은 유일하게 우리 출판사에서 취급하지 않는 장르였다. 그런 판타지물과 무협소설이 포털에 빼곡히 차있었다. 컴퓨터를 끄려던 찰나 내 눈에 신간 소설이 보였다. 'M'. 보통은 강렬한 제목으로 독자들을 유입시켜야 하는 포털에서 너무 평범한, 너무 정직한 제목이었다. 호기심에 작품을 눌러 들어갔다. 아직 완결 나지 않은 작품. 들어온 김에 프롤로그나 보고 퇴근하자 마음먹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침을 깨운 것은 알람이 아닌 다솔 씨의 목소리였다.

"대표님 일어나세요!"

익숙하지 않은 알람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집이 아닌 사무실이었다. 눈 앞에는 다솔 씨가 결재서류와 함께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뒤이어 규식이 들어왔다.

"미친놈. 밤샌 거야?"

그제야 어제 집에 들어가지 않고 사무실에서 잠이 든 기억이 났다. 엉성한 자세로 잠에 들어서 그런지 목이 뻐근하게 몸을 눌러왔다.

"사우나라도 갔다가 퇴근해. 오늘 업무는 내가 볼 테니까. 급한 건 연락할게."

규식은 언제나 든든한 조력자였다.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컴퓨터를 끄기 위해 마우스에 손을 가져가 잠금화면을 풀었다. 순간 눈에 한 소설이 보였다. 어제 읽던 아마추어 작가의 소설이었다. 이제야 내가 왜 이 시간까지 회사에 남아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환희가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다솔 씨와 규식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우리 출간 작품 찾았다!"


규식과 직원들마저 조금만 다듬는다면 좋은 작품이라며 계약을 추진하길 원했다. 망설일 것이 없었다. 내가 직접 작가 메일로 글을 써서 보냈다. 글을 쓰는 내내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추후 계약에서 우리가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좋은 작품은 맞지만, 엄연한 사업이었다. 우리 회사가 최대한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 알았던 계약은 몇 주가 지나도록 제자리였다. 메일에 회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메일을 너무 사무적으로 보냈나?"

"글쎄. 그래도 작가 모두가 바라는 기회인데, 답장 하나 없겠어?"

규식도 의아한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뭐 찾은 건 없고?"

"아. 확실한 건 아닌데 하나 있긴 있어."

"뭔데?"

눈을 크게 뜨고 규식을 바라봤다.

"작가 메일 아이디랑 동일한 아이디를 사용하는 SNS 계정 하나를 찾았어. 뭐 이것마저 게시물이 많진 않았지만.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들이 꽤 여러 장 있더라고. 장소는 여기."

규식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소가 적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서둘러 가방을 챙다.

"나 갔다 올게!"

급하게 말을 마치고 서둘러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알 수 없는 설렘이 몸을 감쌌다.


도착한 곳은 울 근교에 있는 한 꽃집이었다. 필이면 꽃집이라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꽃이었다. 꽃에 알레르기가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처럼 꽃을 보며 감흥을 느낄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어떤 아름다운 꽃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색맹이었으니까.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 차문을 닫았다. 싫다고 모든 일을 피해 갈 수는 없는 일이다. 꽃이 싫은 것보다 다른 출판사에게 작가를 빼앗기는 일이 더 싫었다. 마음을 다잡고 꽃집의 문을 열었다.

'끼익'

나무로 된 문이 세월이 느껴지는 소리를 내며 내부를 보여주었다. 역시나 흑색으로 가득한 공간. 냄새가 아니었다면 이 수많은 꽃이 조화였어도 알지 못했으리라. 여러 종류의 꽃이 나를 반겼지만, 나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작가를 찾기 시작했다. 작은 꽃집이었지만 마치 미로처럼 복잡한 구조였다. 눈 앞을 가리는 기다란 풀들을 치워가며 사람을 찾던 중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찾았다. 기쁜 마음에 뒤를 돌아봤다. 한 여자가 앞치마를 입고 한 손에는 꽃을 든 채 서있었다. 뒤로 묶은 머리가 잘 어울렸다. 말을 걸려던 찰나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볼 수 없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어지러움이 머리를 때렸다. 곧 눈 앞의 시야가 빙글빙글 돌더니 곧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뜬 곳은 병실 안이었다. 흑색의 천장과 나를 덮고 있는 흑색의 이불. 침대 옆에는 가습기가 틀어져있었고, 한쪽 팔에는 링거가 꽂혀있었다. 어떻게 된 것인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꽃집에 갔고, 만나고자 했던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기억은 여기서 끊어졌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스스로 진단을 내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몸 어디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가뿐한 느낌. 팔에 맞고 있는 링거 때문일 것이다. 그때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규식이 들어왔다. 자고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일어나 놀랐는지 규식은 서둘러 내 옆으로 다가왔다.

"몸은? 괜찮아?"

"응 가뿐하다."

규식의 말에 대답하며 웃어 보였다.

"웃기는. 지금이 웃을 때냐."

"괜찮아. 근데 왜 그런 거래? 나 왜 여기 있는 거야?"

"기억 안 나? 너 그 꽃집에서 쓰러졌잖아."

"쓰러졌다고?"

"그래 인마. 네가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작가님이 119 불러서 너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작가님?"

"응. 그 여자분이 작가 맞다고 하더라. 너 쓰러지는 바람에 계약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고."

규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팔에 붙어있는 링거 바늘을 빼버렸다. 놀란 규식이 내 팔을 잡으며 말렸다.

"뭐 하는 거야 인마. 너 피로가 누적된 것 같다고 당분간 쉬어야 된다 그랬어!"

하지만 규식의 말은 안중에도 없었다. 빨리 계약을 성사시켜야 한다. 그 정도의 작품이라면 언제 다른 출판사가 작가를 데려갈지 몰랐다.

"운전해줄 거야 말 거야."

내 말에 규식은 포기했다는 듯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내며 흔들어 보였다.


꽃집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갔다. 흑색의 꽃들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었다. 빨리 작가를 찾아 계약을 시작해야 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규식은 오래간만에 온 꽃집이 재밌다는 듯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때 꽃집의 한 문이 열리더니 한 여자가 나왔다. 로 묶은 머리와 앞치마. 그래 분명 쓰러지기 전에 봤던 여자였다. 곧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

놀란 듯 나를 쳐다보는 여자. 하지만 내 세상은 다시금 핑핑 돌기 시작했다. 규식이 마침 나타나서 부축해주지 않았다면 다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규식이 한껏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그러니까 내가 지금은 안된다고 했잖아!"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나를 꾸짖는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말했다.

"저거 무슨 색이냐 규식아.."

나는 여자가 입고 있는 앞치마를 가리키며 규식에게 물었다.

"무슨 색은 무슨 색이야. 갈색이네. 갑자기 왜 그래?"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한 규식이 순간 이상함을 느끼고 나를 쳐다봤다. 입에서 쏟아질 말은 많은 것 같았지만, 규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내 눈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 아무래도 색이 보이는 것 같은데.."

세 남녀 사이의 어색한 공기만 흘렀다.


결과적으로 색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색은 너와 함께 있을 때만 내게 나타났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네 몸이 닿은 곳에서만 색이 보였다. 평생을 어둡고 칙칙했던 장미는 너를 만나고 그 어떤 색보다 강렬하고 진한 여운을 남기는 빨간색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뿐인가. 늘 한 가지 색일 거라 생각하던 나무는 제각기 다른 색을 띠며 내게 다가왔다. 이상함과 동시에 황홀한 경험이었다. 그 후 매일같이 너를 찾아갔다. 함께 책을 출판하자던 내 말이 거절당한 이유가 주였지만, 사실 그것은 변명거리에 불과했다. 너로 인해 보게 되는 색이 질리지도 않을 만큼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어떤 날은 노란색 꽃이 그려진 찻잔에 커피를 마셨고, 어떤 날은 검은색 화분이 자기도 흑색과는 다르다며 자신의 온전한 색을 보여주기도 했다. 매일이 새로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니까. 왜 싫은 건데요?"

"말씀드렸잖아요. 책은 그냥 취미로 쓰는 거예요."

쌀쌀맞게 말하는 행동과는 달리 너는 또다시 예고 없이 찾아온 내게 국화차 한 잔을 건넸다. 노란색 국화가 너의 손길이 떠나니 곧 흑색의 국화로 변했다. 은 맛일 테지만, 기분 탓에 몇 모금 들이키지 못했다.

"그 취미로 돈도 벌고, 더 많은 독자들에게 소개되면 좋잖아요."

너는 말없이 차 한 모금을 마시더니 나를 쳐다봤다. 너의 갈색 눈동자가 또렷이 보였다. 괜스레 이상한 느낌에 서둘러 눈을 피했다.

"더 많은 독자가 보는 게 문제예요."

작심한 듯 말하는 너의 말에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너를 쏘아붙였다.

"왜 그게 문제죠? 더 많은 독자가 보고, 더 많은 사람이 당신의 이야기를 좋아해 준다면 작가로서 최고의 행복 아닌가요?"

"물론 그렇겠죠. 별 것도 아닌 제 책을 봐준다면. 하지만, 독자가 많이 생긴다는 것은 그만큼 제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늘어난다는 거잖아요."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작가 역시 연예인이나 공인과 다르지 않았다. 조금만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스토리가 전개되면 작가의 의견이나 계획은 안중에도 없이 '스토리가 산으로 가네', '진작 완결 냈어야 하는데 질질 끌다가 이모양이네."같은 괜히 아니꼬운 소리를 듣기도 해야 했다. 역시 그 부분을 모르지 않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됐죠? 안 되는 이유. 앞으로 그냥 놀러 오는 건 상관없지만, 계약 내용을 가지고 오시려면 안 오셨으면 좋겠어요."

너는 그 한마디와 함께 서둘러 너의 일터로 떠났다.

"앞으로 찾아오지 않을게요. 혹시나 생각이 바뀐다면 여기로 연락 주세요."

나는 명함 하나를 흑색 책상 위에 내려두고는 서둘러 너에게서 빠져나왔다. 안타까움에 쉽사리 차에 시동을 걸지 못했지만, 이내 한숨을 푹 쉬고 회사로 향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규식이 다그치 듯 소리쳤다. 방 한쪽에는 다솔씨가 결재서류 하나를 들고 당황스러운 듯 규식과 나를 쳐다봤다.

"아 결재해달라고?"

그제야 다솔씨에게 손을 내밀어 결재서류를 받아냈다. 그 모습을 이상하게 쳐다보던 다솔씨가 결재된 서류를 받아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규식은 방 문을 닫더니 내게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계약 안된 거 한 두 번이야? 우리가 그렇게 큰 출판사도 아니고 어떻게 매번 계약을 따! 아니 그리고, 우리가 건넨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것도 아니라며."

규식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책의 내용이, 너와 함께 보던 각양각색의 꽃들이, 너의 수수하게 묶은 갈색 머리와 선명한 눈동자만이 머릿속에 떠다녔다. 이미 너는 나를 깊은 곳으로 끌어당긴 후였다. 규식도 이내 포기한 채 자리에 풀썩하고 주저앉았다. 규식과의 적막을 깬 건 오랜만에 들어보는 노크소리였다.

"대표님 누가 찾아오셨는데요."

찾아왔다니. 찾아 올 사람은 없었는데. 의아함은 다솔씨의 뒤를 확인하고 나서야 풀렸다. 흑색의 풍경 사이에서 혼자만 오롯이 색을 가지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 규식도 그런 너를 알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미소를 지었다. 이 상황에 적응이 되지 않은 나만 자리에 멍청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전 01화팔레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