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알람 소리가 요란하게 귀를 때렸다. 눈을 감은 채 소리가 나는 곳으로 이리저리 손을 내밀어 이내 알람을 꺼버렸다. 더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곧 침대에서 일어났다. 온전히 정신이 든 것은 아니지만, 뜨거운 커피 한 잔이면 정신이 들 것이다. 이불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거실로 나와 어젯밤 미리 갈아둔 원두로 금세 커피 한 잔을 만들어냈다. 커피가 목을 타고 몸 안까지 들어왔다. 목에서 식도로, 식도에서 몸 안으로 이동하는 것이 생생히 느껴진다. 마치 내 장기가 '나는 아직 건재히 살아있으니 오늘 하루도 움직일 수 있다'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굳이 아침 공복에 커피를 마시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잔을 들고 거실 베란다로 향했다. 이미 해가 떴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나에게는 그저 여전히 어둡고 칙칙한 색의 아침이었다. 아무런 색도 볼 수 없는 소위 '색맹'의 나에게는 추위가 짙게 깔린 새벽이나, 저녁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검은색의 아침을 멍하니 쳐다보다 이내 몸을 돌려 거실로 향했다. 출근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시루 속 콩나물이 되어버리는 지옥철을 타고 겨우 회사 앞에 내렸다. 차를 타고 다니면 편할 법도 하지만, 출퇴근길은 꼭 지하철을 고수했다. 지하철은 나에게 생각의 장이었다. 출근 시간을 그저 멍하니 보내도 되지만, 글자 하나라도 쓰다 보면 어느새 그것이 쌓이고 쌓여 한 권의 책이 된다. 내가 처음 쓴 책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일을 하며 회사를 다닐 무렵 처음 완성한 책 역시 이 지하철에서 탄생했다. 역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니 이내 회사가 눈에 들어왔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다고 할 수 있는 건물에 위치한 회사. 직원 10명의 작은 회사였지만, 그 수에 비해 크다면 큰 건물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대표님이라는 소리는 아직까지도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호칭이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작은 회사지만 그토록 원했던 회사의 대표였으니까. 자리에 앉아 어제 온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사내 그룹웨어에 들어갔다. 대표의 승인을 기다리는 전자결재가 하룻밤 사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그때 고요한 사무실의 적막을 깨며 한 직원이 들어왔다. 디자인팀에 새로 들어온 다솔씨였다.
"아 다솔씨."
"대표님, 급하게 결재받아야 할 게 있어서요."
회사를 차리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의사결정의 속도였다. 아무리 급한 건이라도 팀장의 승인을 거쳐 대표의 스케줄을 기다려 결재를 맡아야 하는 비효율적인 시스템에 넌더리가 나있던 차였기에 내 방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있었다. 누구든 필요할 때마다 들어올 수 있도록.
"아 네. 무엇이죠?"
대답은 했지만 조금 의아했다. 처리해야 할 것은 그날그날 바로 처리해주는 성격이었다. 전자결재와 메일이 수북이 쌓여도 모두 그 날 처리하려고 노력했다. 결재를 기다리는 직원들을 생각해서인 이유도 있지만, 내 앞에 무엇인가 쌓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유가 컸다. 카카오톡 어플 위에 빨간 숫자가 쌓이는 것을 못 참는 것과 비슷하다면 비슷할 것이다. 그런 내가 이토록 급한 건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의문은 문서를 건네받고서야 풀렸다. 건네받은 문서 위에는 대문짝만 하게 문서의 제목이 적혀있었다.
'ㅇㅇ책 표지 변경의 건'
얼핏 회사의 본부장이자 친구인 규식에게 들었던 내용이다. 기존 디자인의 색감이 별로이니, 새로 만들자는 내용이었고, 그것을 다솔 씨가 완성해 직접 가지고 온 것이었다. 결재를 망설일 내용은 아니었지만, 난 이 문서에 결재를 할 수 없었다. 당황스러운 내 표정을 들키기 싫어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했다.
"이 건은 조금 후에 결재를 하도록 하죠. 금방 처리할 테니까 걱정할 것 없습니다. 결재 후에 자리로 가져다 줄게요."
"네 대표님.."
의아한 표정의 다솔 씨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복잡한 내용의 문건도 아니거니와 내가 이렇게 결재를 망설이는 적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다솔 씨가 나가자마자 규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더니 이내 규식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야 너 어디야?"
화가 난 목소리로 규식을 쏘아붙이자 규식이 당황한 듯 대답했다.
"나 오늘 미팅 있다고 했잖아. 왜 무슨 일 있어?"
"책 표지 디자인 변경하는 거. 결재 안 했지?"
"아 맞다 그거 깜빡했다!"
"그러니까 내가 결재 밀리지 말고 바로바로 하라고 했잖아!"
"알았어 미안해."
"내용은?"
"내용은 다 검토했고, 결재만 하면 돼"
"그래 알았다."
말을 마치고 무정하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 정도 일에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내가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질 법도 하지만, 규식이와는 이미 10년도 더 된 사이였다. 이 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아니 규식만이 알고 있는 내용이자 내 나름의 아킬레스건 같은 것이었다. 다솔 씨의 자리에 결재가 완료된 문서를 내려놓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풀썩 주저앉았다. 처음부터 '색'에 관한 문제에 이토록 예민했던 것은 아니었다.
'왜 또 그때 생각이..'
나지막이 던진 혼잣말과 함께 마음속 어딘가에 깊게 묻어두었던 무언가가 조금씩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색이 보이지 않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불편함이 있었다. 단순히 색이 보이지 않아 물건을 찾지 못한다거나, 그림을 보지 못한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참기 힘들고 나를 좌절시켰던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선천적으로 색이 보이지 않았기에 어린 나는 모두가 나와 동일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자라왔다. 유년기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에 맞춰 나 또한 성장하며 문제는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학교 미술시간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친구들에게 '눈깔병신'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못했다. 그것뿐이면 다행이었다. 자신들의 무리가 아니기에 오는 경멸 어린 눈빛과 시선. 그들의 부모 역시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자신의 아이를 자신의 품 깊숙한 곳으로 끌어당기기까지. 성인이 된 지금도 힘든 그 상황이 겨우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견디기에는 꽤나 힘들었다. 수 없이 많은 전학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정신과 치료. 내면의 문은 더더욱 큰 자물쇠로 잠겼으며, 그렇게 잠겨진 문은 나조차 찾을 수 없는 깊숙한 곳에 숨겨졌다. 그렇게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올라갈 무렵 나는 나만의 생존법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생존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모든 이들과 가까워지지 않는다'
모든 이들과 가까워지지 않는다면, 내가 색맹인 이유를 굳이 알릴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었다. 혹여 가끔씩 색을 구분해야 하는 일을 부탁받으면 차가운 얼굴로 거절하면 그뿐이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내 주변에는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었다. 그저 '눈깔병신'이라는 별명이 붙지 않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렇게 고3 수험생이 되었을 때는 그것이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질 때도 많았다. 귀찮게 하는 사람 없이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고, 성적도 꽤나 잘 나왔다. 색이 가득한 세상에서 색 없이 사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나타난 건 바로 그 무렵이었다.
"오늘은 전학생이 있다."
매일 같은 아침 조회시간이 조금은 다른 말로 시작되었다. 전학생이 있다는 말과 함께 들어오는 너의 모습. 꽤나 짧게 줄인 교복 치마와 딱 붙는 셔츠, 몸집에 비해 큰 가방을 메고 들어와 너는 당당하게 인사했다.
"이름 김유나. 잘 부탁한다."
당당한 너의 모습에 나는 잠시 동안 멍하니 너를 바라봤다. 하지만 금세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어쨌든 나와 엮일 사람은 아니었기에.
"아 자리는 저기 승훈이 옆이 좋겠구나."
아차 싶었다. 빈자리가 내 옆자리 밖에 없었구나. 당황한 눈으로 다시 선생님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너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어느샌가 내 옆자리에 와 내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대답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굳이 대답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황한 내 표정을 네게,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으로 인해 교실은 싸늘한 적막에 잠겼다. 너는 잠시 놀란 듯하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이 나가고 주변엔 사람들로 가득했다. 평소 내 주변에 얼씬도 않던 사람들을 '너'라는 한 사람이 가득 채운 것이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이어폰을 꼈다. 하지만 노래는 틀지 않았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 둘러 쌓여있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요즘은 어떤 말과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나는 누구보다도 외로운 나 자신의 상황을 애써 부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유나야, 짝꿍이 쟤라서 어떡해?"
약간은 말소리를 줄인 한 친구가 너에게 말을 걸었다.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너는 되물었다.
"왜?"
"쟤 완전 별로야. 아까 봤지? 네 인사받아주지도 않는 거. 우리가 뭐 부탁하거나 친해지려고 해도 눈길 한 번 안 줘. 소문에 아무런 감정도 못 느낀다는 얘기도 있고, 귀신을 본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무튼 조심해."
역시 괜한 관심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잠시나마 내 좌우명을 잊고 있었다.
'모든 이들과 가까워지지 않는다.'
꺼져있던 노래를 틀기 위해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었다. 노래의 재생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너의 짧은 말소리가 이어폰 너머로 들렸다.
"아닌 것 같은데."
종례시간의 끝을 알리는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아무리 적응하려 해도 내 주변에 아무도 없는 상황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모두들 내 이야기를 수군거리고, 친구 하나 없는 나를 비웃는 듯했다. 특히나, 학교 일정이 끝나면 더욱 그랬다. 삼삼오오 모여 오늘은 피시방에 가자, 맛집에 가자며 웃고 떠드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내게 너무 힘든 일이었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뒷문을 열고 학교 밖으로 향했다. 교문을 나오고 나서야 이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학교를 도망치듯 나오면 좋은 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 시간에는 하교하는 친구들을 만날 일이 거의 없다. 즉, 신경 쓸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지겹도록 귀에 박아두었던 이어폰을 뺐다. 노래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보다 주위의 소리를 듣는 것을 더 좋아했다. 완전히 보이진 않지만, 듣는 것엔 문제가 없었기에 주변 소리를 더욱 많이 들으려고 노력했다. 차도를 벗어나 골목으로 접어들자 이내 많은 소리가 들려왔다. 동네 슈퍼 앞 의자에 앉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어르신들의 목소리. 먼저 하교한 동네 꼬마들의 웃음소리. 하나같이 소중한 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났다.
"야!"
그때 평화롭던 시간을 방해하는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한 여자가 서있었다. 전학생 김유나였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어쩔 줄 몰라 다시 몸을 돌려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유나는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내 빠른 걸음을 쫓아오며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대답 안 할 거야?"
"..."
"이 동네 오래 살았어? 나는 이사온지 얼마 안 돼서"
"..."
"학교는 역시 지루해 그렇지?"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나도 모르게 강한 말로 쏘아붙였다.
"용건이 뭐야?"
남에게 그렇게 언성을 높인 적도, 가족 이외의 누군가와 대화를 해본 적도 거의 없었다. 대답을 하고 뒤늦게 민망함이 밀려왔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내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달아오르고 있을 것이다.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유나는 꼬투리라도 잡은 마냥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나를 따라왔다.
"용건 없는데. 꼭 용건이 있어야 말 걸 수 있는 거야?"
"용건 없으면 가줄래? 조용히 가고 싶어서."
"나는 원래 누구랑 같이 안 가면 심심해서 못 참아."
"근데 왜 그게 나야? 아까 보니까 친구들 많이 생겼던데."
"나는 너랑 가고 싶은데?"
"..."
유나의 당돌한 대답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서둘러 걸어온 탓에 집 앞에 도착했다. 바로 뒤에 산이 있는, 조용한 동네의 작은 빌라였다.
"미안한데 우리 집은 여기라서."
매정하게 말을 마치고는 빌라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찰나 유나의 말이 내 발걸음을 잡아챘다.
"우리 집도 여긴데?"
여느 때와 같이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갈 준비를 하던 중 낯선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띵동'
오래간만에 들려오는, 그것도 이런 이른 아침에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밥을 먹던 부모님도 놀라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누구세요?"
엄마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약간의 경계심을 품은 목소리로 물었다.
"안녕하세요. 저 옆집 사는 승훈이 친구 김유나라고 합니다!"
유나였다. 언젠가 학교 가는 길에 마주치는 것 정도야 예상하고 있었지만, 우리 집 문을 열고 들어올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친구?"
"네. 어제 전학 왔거든요. 혹시 승훈이는 아직 멀었나요?"
"아직 밥 먹고 있는 중인데.. 들어와서 기다리겠어요?"
"아.. 아냐! 다 먹었어요!"
유나가 집에 들어오는 상황은 죽기보다 싫었다. 밖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내 공간에 누군가 들어오는 것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으니까. 무슨 색인 지도 모르는 침대와 이불. 어떤 취향으로 꾸며진지 알 수 없는 가구와 물품들을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내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도 마시지 않은 채 서둘러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너 뭐야."
"뭐가?"
"뭐라니. 왜 아침부터 우리 집 문을 두들기는 건데?"
"학교 같이 가려고."
"아니 그니까 그 학교를 왜 나랑 가야 하는 거냐고 묻는 거잖아."
"같은 이웃인데 같이 가면 안돼? 그리고 저번에 말했다시피 나는 누구랑 같이 안 가면 심심해서 못 참거든."
"아니.."
더 반박하고 싶었지만 대화가 끝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는 이내 말을 줄였다. 다음엔 어떻게 유나를 피해야 할까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더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런 바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나는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쉼 없이 말을 이어갔다. 취미는 무엇이냐는 식상한 질문부터 이 동네에 괜찮은 식당을 물어보는 쓸데없는 질문까지. 대답을 하지 않는 내게 지칠 법도 하건만, 유나는 그런 건 개의치 않았다. 끝없는 질문은 학교에 도착하고 유나 곁으로 친구들이 모이자 그제야 끝이 났다. 다시 말을 걸기 전에 서둘러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아침에 듣기로 작정한 노래가 지금에야 나오고 있었다.
소동은 얼마 후의 일이었다. 왜인지 내 자리 주변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껏 흥분한 듯한 소리와 수군대는 소리. 그 가운데 흑색의 사람 2명이 서로의 검은 눈을 쳐다보며 한껏 날을 세우고 있었다. 북적거리는 게 싫어 돌아온 길을 나가려 하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취소하라고 그 말."
"왜 내가 틀린 말 했냐?"
"말이 심하잖아!"
"왜 사실이잖아. 아 마침 저기 있네. 눈깔병신."
같은 반 남자였다. 평소 언행이 좋지 않아 되도록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한 손에는 내 생활기록부가 들려있었다. 안 봐도 눈에 선했다. 교무실 어딘가에서 내 생활기록부를 봤을 테고, 신나서 이곳으로 들고 왔을 것이다.
'그래 2년이나 감춰졌으니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언젠가 예상하고 있던 일이기에 애써 마음을 다잡고 나가던 문으로 향했다. 익숙한 비웃음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닌 척하면서 뒤에서 나를 욕하는 사람들, 대놓고 나를 비웃는 사람들. 이제는 적응됐다 싶었지만, 결국 나는 여전히 내 마음을 숨기고 있었나 보다.
"사과하라고!"
유나의 흥분한 목소리와 함께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곧 유나가 바닥에 쓰러졌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틈도 없이 주먹을 날렸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 역시 바닥에 쓰러졌다. 검은 눈동자에 보이는 당황함 그와 함께 느껴지는 분노.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던지는 말을 알 수 있었다.
'니까짓 게!'
그는 바닥에서 일어나 내게 달려들며 주먹을 날렸다.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았다.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감기는 눈에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주먹은 내게 닿지 않았다. 그와 나 사이에는 어느새 다른 남자가 남자의 손을 잡고 서있었다. 그것이 규식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본래 다른 반이었던 규식은 학교에서 나름 유명했다. 아마추어 복싱대회에서도 몇 번 우승한 적이 있는 그를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학교의 노는 친구들. 그러니까 소위 '일진'이라 불리는 친구들이 규식과 함께 다니고자 했으나, 규식은 그런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규식 역시 나와는 다른 의미로 늘 혼자였다. 그런 규식이 처음으로 내게 다가온 것이다.
"그쯤하지?"
뜻밖의 등장에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규식은 강하게 잡고 있던 남자의 손목을 무심히 내던지고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괜찮냐?"
"응."
제대로 된 감사인사도 못한 채 쓰러진 유나를 데리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규식이 그런 우리의 뒤를 아닌척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그 뒤로 우리는 둘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 매 쉬는 시간마다 규식이 유나와 내가 있는 반으로 놀러 왔고, 점심을 같이 먹는 것은 물론이며 하교 후에도 서로의 집에서 함께 공부를 하거나 시간을 보냈다. 부모님 역시 말은 안 했지만 처음으로 친구들과 잘 지내는 내 모습에 적잖이 감격스러운 것 같았다. 더욱이 유나와 규식이 좋았던 것은 내 과거를 굳이 캐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이라면 이야기 못할 것도 아니었으나, 불편한 이야기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나 역시 그들의 과거를 굳이 묻지 않았다. 암묵적인 서로의 약속이었다.
유나는 바다 같았다. 그것도 태평양처럼 넓은 바다.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유나'라는 바다에 빠지더니 점점 바다 깊숙한 곳으로 항해를 하고 있었다. 사람의 관계는 늘 그랬다. 가까워지면 그 사람의 다른 좋은 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문득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나한테 왜 그랬어?"
"뭘?"
"처음에 말이야. 대답도 안 했는데 내게 계속해서 말 걸었잖아. 그거 왜 그런 거냐고."
"그냥 그러고 싶어서. 애들은 네가 싸늘하다고 하는데, 내 눈엔 외로워 보였거든. 그것도 엄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나 그리고 규식. 이 둘이 있는 시간은 지금껏 살아왔던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제야 신이 나를 돌아봐준 느낌. 하지만 신이 그 행복을 곧 가져갈 것이라는 것을 난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