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하루에 3시간도 못 잔 것을 생각하면 꽤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연히 눈이 떠진 것은 아니었다. 너와 함께하는 첫 번째 여행에 일부러 알람을 맞춰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습관처럼 커피를 마시기 위해 거실로 향했다.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고 갈아냈다. 원두가 가루로 바뀌며 그라인더 밑으로 떨어졌다. 흑색 필터 위에 곱게 갈린 원두를 놓고 천천히 물을 부었다. 물이 가루에 닿는 순간 커피 향이 온 집안에 퍼졌다. 물을 다 따라 붓고는 컵을 찾았다. 흑색의 공간 안에서 빛나는 하얀색 컵 하나. 컵을 들고 커피를 부어 소파에 앉았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는 언제나 피곤한 육체를 깨우는 소중한 것이었다. 커피를 마시는 중 곧 의아함이 들었다.
'흑색의 공간에서 빛나는 하얀색 컵.'
분명 너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닌데, 이 하얀색 컵이 눈에 들어왔다. 당황함에 손에 들고 있는 컵을 다시 쳐다봤지만, 컵은 여전히 흑색의 커피를 담고 있는 하얀 컵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에 든 컵을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놨다.
'갑자기 색이 보인다니. 꿈인가?'
알 수 없는 의문이 머릿속에 가득했지만 곧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
'설마 하얀색이 다 보이는 건가?'
눈을 들어 집 안을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아까는 인지하지 못했던 하얀색이 눈에 들어왔다. 집 안 벽지와 장식품, 노트북 마우스와 키보드까지. 하얀색이 들어간 것은 모두 보이기 시작했다. 당황함에 볼을 꼬집어봤지만, 분명 꿈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네게 향하는 차 안에서도 생각은 끝나지 않았다. '왜일까.' '왜 갑자기 색이 보이기 시작하는 걸까.' '이런 비슷한 사례가 있었던가.'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런 사례는 보지 못했다. 더군다나 한 가지 색만 보인다는 것은 더더욱. 하얀색은 흑색 사이에서 보란 듯이 더욱 밝게 빛났다. 한강에 비친 구름과 지나가는 새하얀 색의 차들. 하얀색은 생각보다 많은 곳에 숨어있었다. 흑색과 하얀색의 풍경이 차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며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지만, 내게 나쁠 것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희망적이었다. 지금은 한 가지 색이었지만, 나중에는 모든 색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당장 병원에 가는 것보다 네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설렘으로 인한 조급함에 차의 속도를 올렸다.
너의 꽃집에서도 하얀색은 유난히 자신을 뽐냈다. 하얀색 장미, 바람꽃. 너무나 많은 하얀 꽃이 나를 반겼다. 제일 싫어하던 곳이 꽃집이었는데, 이제는 꽃을 보고 좋아하는 나를 보고 있으니 아이러니했다. 꽃에 정신이 팔려 있을 무렵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왔어?"
우연인지 너는 오늘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내 앞에 나타났다. 하늘거리는 원피스와 너의 수줍은 얼굴이 모든 배경을 압도할 만큼 아름다웠다.
"원피스 입었네?"
"응. 오랜만에 놀러 가는 거니까."
너는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너무 아름다워 나 또한 너를 따라 미소 지었다.
"갈까?"
"응."
제주도는 색을 보지 못하는 내게도 매력적인 곳이었다. 흑색의 바다지만, 더없이 투명한 흑색의 바다. 서쪽, 동쪽 가릴 것 없이 넓게 퍼져있는 아름다운 풍경과 곳곳에 숨어있는 예쁜 카페까지. 생각을 정리하고, 책을 검수하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었다. 차기작을 준비하는 네게 좋을 것 같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핑계일 뿐, 그저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았다.
'와!'
제주도에 처음 와본다는 너를 태우고 바로 바닷가로 향했다. 수없이 봤지만, 늘 아름다운 바다가 우리를 반겼다. 너는 창문을 열고 바다 냄새를 맡으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바다가 꽤나 인상 깊었는지, 너는 호텔로 가기도 전에 바닷가에 들어가자고 난리를 쳤다.
"들렀다가가자!"
"배 안 고파? 우리 한 끼도 안 먹었잖아. 밥부터 먹고 가자."
"싫어. 지금 가고 싶은 걸."
실망한 듯 가라앉는 너의 목소리에 하는 수 없이 바다 가까운 주차장으로 향했다. 해변에 도착하니 파도가 모래에 부딪쳐 사라지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우리는 말없이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이건 무슨 색으로 보여?"
갑작스러운 너의 질문. 색에 관해 예민한 나였지만, 너라면 얼마든지 대답해줄 수 있었다.
"흑색."
"그런데도 바다가 좋아?"
"같은 흑색의 바다라도 색이 조금 다르거든. 다른 의미로 투명한 바다를 느끼기도 하고."
"그럼 이렇게 하면?"
너는 말릴 틈도 없이 바다를 향해 몸을 던졌다. 너의 발에서 시작한 바다는 곧 너의 허리를 감쌌다. 네 주변이 점차 흑색에서 푸른색 바다로 변하기 시작했다. 네 주변의 색만 보였던 것과는 달리 바다는 빠른 속도로 색이 채워졌다. 얼마나 흘렀을까. 바다는 곧 수평선 너머까지 푸른색으로 채워졌다. 예고 없이 시작된 아름다운 풍경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이었다니. 흑색이었을 때도 아름다웠지만, 푸른색을 품은 바다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가슴이 메어질 정도였다. 아름다운 바다 한가운데에 네가 서있다. 푸르고 푸른 바다 가운데에 있는 아름다운 너. 어쩌면 너는 신이 내게 준 선물이 아닐까. 나는 말없이 네게 다가가 너를 꼭 끌어안았다. 너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내 품에 안겨있었다.
제주도에서의 3일은 너무도 짧았다. 관광도, 해야 할 작업도 모두 해야 했기에 그럴 수도 있었지만, 너와 함께 하는 시간은 언제나 짧고 아쉬웠다. 제주도에서의 근사한 식사를 위해 나는 미리 예약해둔 레스토랑으로 너를 데려갔다. 해산물을 사용해만 든 요리들이 코스로 나왔고, 함께 주문한 와인이 분위기를 더했다.
"여행 재밌었어?"
"응 너무! 제주도는 처음 와봤는데, 덕분에 좋은 곳도 많이 알게 되고 좋았어."
"다행이다. 나는 매년 오는 곳이야.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이곳만의 분위기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앞으로도 매년 같이 오자."
매년 같이 오자는 내 말에 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퍽이나 귀여웠다. 비어있는 너의 잔에 와인을 채웠다. 분위기가 좋아서일까. 평소보다도 더 취기가 오르는 느낌. 너 역시 오른 취기가 싫지 않은 듯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작은 실수로 너의 앞에 놓인 와인잔이 네 옷으로 쏟아졌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검붉은색의 와인은 네 옷을 순식간에 엉망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웨이터를 불러 자리를 치워달라고 해야겠다.'라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가슴이 답답했다. 단순한 불편함인 줄 알았던 가슴은 이내 호흡까지 가빠르게 만들더니, 제대로 서있기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네가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와인을 닦아내다 말고 내게 서둘러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
하지만 네가 가까이 올 수록 내 호흡은 더욱 가빠졌다. 너를 밀쳐내듯 밀어내고 화장실로 달렸다. 저녁에 먹은 음식들이 다 쏟아져 나왔다. 얼마나 흘렀을까. 이제야 조금 진정이 되어갈 무렵, 낯선 음성이 밖에서 나를 불렀다.
"손님, 괜찮으세요? 구급차 불러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일행분께서 걱정하고 계셔서요. 괜찮으신 건가요?"
"네. 곧 나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일행분은 자리로 안내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웨이터는 그렇게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세면대 앞에 서서 연거푸 얼굴을 씻어냈다. 하지만 씻어내면 씻어낼수록 오히려 생각은 복잡해졌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규식이 덕분에 그때의 일을 모두 잊었다 생각했지만, 여전히 유나의 일은 내게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저 스스로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 묻어두었을 뿐, 사라지지는 않은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참을 화장실 거울 앞에 서있었다.
여행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의 공기는 평소와 달랐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각자의 생각에 잠겨있었다. 크다면 큰 사건을 겪고 어떠한 말도 해주지 않는 내게 화가 났을 것이다.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일부러 네게 말을 건넸다.
"기분 안 좋아?"
"아니."
너는 감고 있는 눈을 뜨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어제 그 일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건 내가 지금은 이야기하지 못할.."
"나 머리가 좀 아픈데.."
내 말을 끊고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는 너. 갓길에 차를 세우고 너를 살폈다. 몸에서 흐르는 식은땀. 단지 어제의 그 일 때문에 그런 줄 알았던 너는 내 생각보다 꽤나 심각한 몸상태였다. 춥지 않은 날씨에 몸까지 떨고 있는 너를 보니 다시금 유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나까지 몸이 떨렸다. '두려움'
다시 소중한 누군가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몸 전체로 순식간에 퍼졌다. 안전벨트를 다시 조여매고 액셀을 밟았다. 규정속도보다 훨씬 높은 속도로 차선을 넘나들며 병원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믿지도 않는 신을 찾으며 제발 네가 무사하게 해 달라며 빌고 또 빌면서.
잠든 너를 옆에 두고 의사는 차트를 무심히 넘기며 말했다.
"몸에 이상은 없습니다. 단순 과로일 수도 있고요."
"아까 몸에서 식은땀이 엄청 흘렀는데요? 다른 곳이 이상이 전혀 없단 말인가요?"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의사를 쏘아붙였다.
"맥박, 피검사 모두 정상입니다. 피로가 쌓여 그런 것일 수도 있어 수액을 놔드렸습니다. 환자분 깨어나고 다시 상태 보겠습니다."
의사는 자기 할 말을 마치고는 쌩하니 가버렸다. 별 일 아니라니. 너를 만나면서 네가 이토록 아파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잠든 네 옆에서 간호를 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잠든 너를 보며 나는 밤새 너의 곁을 지켰다. 타들어가는 속도 모른 채 노란 달은 유달리 밝게 떠있었다.
아침이 되자 너는 깊은 잠에서 깨어 개운하다는 듯 멀쩡히 일어났다. 방금 일어난 너를 보고 놀라 대답할 틈도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괜찮아? 어디 아픈 데는 없어? 머리는 안 아파?"
"괜찮아."
너는 그런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차분히 말했다. 하지만 곧 네게서 또 다른 말이 들려왔다.
"어?"
"왜 어디 안 좋아?"
"이거 원래 검은색인가? 아니 검정이라기보다, 색이 없는 느낌인데."
너는 옆에 놓인 음료를 보더니 대뜸 이상한 말을 했다.
"무슨 말이야. 이거 노란색이잖아."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너의 손이 닿지도 않았는데 내가 노란 음료 색을 구분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의 달이 노란색이라는 것도 아무런 어색함 없이 받아들였던 게 생각났다.
'설마'
불안한 예감에 급히 너에게 하얀색 수건을 들이밀었다.
"이건.. 이건 무슨 색이야!"
"이 수건? 저거랑 비슷한 색인데. 검은색에 가까운 색. 흑색이라고 해야 하나?"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네가 보지 못하는 하얀색과 노란색은 이제 내가 너 없이도 볼 수 있는 색들과 같았다. 나는 너의 색을 빼앗아오고 있었다.
영원할 것 같았다. 네 덕분에 색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색맹인 나를 거리낌 없이 받아준 너라는 사람이 내 곁에 있었으니까. 너와 함께하는 일도 잘 풀렸고, 무엇보다 너는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던 행복은 그런 내 생각을 비웃 기라도 하듯 무참히 무너졌다. 나는 너를 빠르게 잠식해가고 있었다. 내가 너에게서 빼앗아온 두 가지 색은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세 가지 색으로 변해있었고, 그런 변화는 너와 나의 사이를 갉아먹기에 충분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뒤로 너와의 만남을 이어가지 않았다.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너의 말과 숱한 전화를 거절한 채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회사 역시 나가지 않았다. 그저 어두운 집구석에서 핸드폰을 꺼둔 채 병든 닭처럼 오지 않는 잠만 청할 뿐이었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검은색만 보다 보면 다시 네게로 색이 돌아가지 않을까. 검은색만 보다 보면 다시 색이 보이지 않게 되지는 않을까. 나는 이제 그토록 보고 싶던 색을 보이지 않게 해 달라는 작은 희망을 바라며 기도하고 있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내던 중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발견했다. 하지만 느낌이 조금 이상했다. 어색함과 동시에 익숙한 느낌. 하얀색의 우유는 다시 익숙한 흑색으로 돌아왔다. 눈이 커졌다. 꺼져있던 전화기를 켰다.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수백 개가 와있는 것은 보지도 않고 단숨에 네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네가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 전화를 꺼놨.."
"색 보여 안 보여?!"
너의 말을 끊은 채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일단 만나서 이야기해."
"빨리! 빨리 다시 봐봐. 주변에 하얀색이나 노란색 없어?"
"왜 그래 갑자기.."
"빨리 보라고!"
쏘아붙이는 내가 의아했는지 너는 잠깐만이라는 말과 함께 주변을 둘러봤다.
"어..?"
"보여?"
"색이.. 색이 다시 보이네..?"
괜찮다고 했지만, 다시 색이 보이는 게 신기했는지 너는 들뜬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다리가 풀려 소파에 주저앉았다. 내가 색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은 상관없었다. 그저 내가 너의 색을 빼앗지 않아서, 유나와 같이 불행한 결말이 되지 않아서 다행일 뿐이었다. 눈물이 흘렀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전화기를 붙들고 한참을 어린아이 마냥 서럽게 울어댔다.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듣고 있을 뿐이었다.
익숙한 흑색의 공간이 다시 내게로 찾아왔다. 흑색의 하늘과 태양. 잠깐이었지만 보게 되었던 하얀색 구름과 샛노란 달조차 익숙히 봐왔던 흑색의 구름과 달로 바뀌어있었다. 전처럼 다시 네게 색이 돌아가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 볼 수 없게 된 색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접으려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라도 이런 생각을 하면 어떤 못된 신이 다시 너와 내게 장난을 칠까 무서웠기에. 생각에 잠겨 창밖을 내다보던 중 네게서 전화가 왔다. 멍하니 울리는 전화기를 바라보다 끝내 너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색도 네게 돌아간 상황에 너의 전화를 피할 이유는 없었지만, 아직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전화를 피하는 내게 전화 걸기를 포기한 네가 곧 메시지를 보내왔다.
'전화 안 받을 거야?'
전화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으로 네게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아닌데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무슨 시간?'
'앞으로의 우리 관계도 그렇고..'
'우리 관계?'
너는 아직 내가 너 없이 색을 보게 된 것을, 그것이 너의 색을 빼앗아 온 것임을 알고 있지 못했다. 그저 스트레스나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잠시 색이 안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굳이 네게 내가 너의 색을 빼앗아 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진 않았다. 너와의 인연이 여기까지이더라도, 그런 잔인한 사실은 나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응. 네가 아플 때 많은 생각을 했어. 네가 스트레스로 잠시 동안 색이 보이지 않게 된 게 나 때문은 아닐까, 네 옆에 평범한 사람이 있었다면 네가 색이 안 보이게 되는 나쁜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고.'
'그런 근거도 없잖아. 그냥 잠시 아팠던 거야. 의사도 그랬잖아. 과로로 그런 거라고.'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네게 이유를 감추기로 마음먹은 이상 차라리 잘됐다 생각하고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야. 너 만나면서 그동안 회사에 소홀히 한 것도 있고, 내 생활이 많이 바뀌기도 했고. 잠시 시간을 가지면서 우리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전송 버튼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네게서 다른 답은 오지 않았다. 저런 메시지에 답을 기대한 내가 잘못된 것이리라 생각하고는 규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안 있어 규식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디야 너?"
전화를 받자마자 규식은 한참이나 내 전화를 기다린 사람처럼 격양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규식은 항상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나타났고, 내가 규식의 곁을 떠나도 먼저 찾아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를 챙겨주었다. 그런 규식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을 삼키고 규식의 질문에 짧은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소주나 한 잔 하자."
익숙한 포장마차에서 규식과 말없이 소주를 마셨다. 규식은 언제나 그렇듯 내게 먼저 무엇을 묻지 않았다. 그저 나와 함께 연신 소주를 마셔줄 뿐이었다. 그런 규식에게 또다시 무엇인가를 감추기 싫어 먼저 말을 꺼냈다.
"나 며칠 전에 색을 봤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너 계속해서 색 봤잖아."
"아니. 나 혼자 있을 때 말이야. 나 혼자서 색을 봤다고. 물론 3가지 정도의 색이었지만."
"잘됐네. 근데 봤었다니. 지금은 안 보인다는 거야?"
잔에 가득 담긴 소주잔을 한 번에 들이켜고는 규식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너 없이도 색을 볼 수 있게 된 일. 그 색이 점점 늘어 3가지나 되었던 일. 그리고 네가 색이 보이지 않게 된 일. 규식은 내 이야기를 다 듣고는 놀란 눈을 하고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게 네가 색을 빼앗아온 거라고? 확실해?"
"그럼 다른 이유가 있을까. 나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서 수백 번을 다시 생각해봐도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래서 이제 작가님이랑 그만 만나겠다고?"
"그래야지. 다른 방법이 없어."
"작가님 없이 괜찮겠어?"
"규식아, 나는 과연 진심으로 그 사람을 좋아한 걸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갑자기."
"그냥. 나는 어쩌면 색을 보기 위해 그 사람을 만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사실 그 정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단지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평생 보지 못했던 색이 보이니까, 그래서 만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아닌 거 너도 알잖아. 그런 바보 같은 생각할 거면 말 꺼내지도마."
"아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다시 그 사람한테 색이 돌아간 날, 이제 다시는 색을 볼 수 없겠지, 나만 입 다물면 그 사람이랑 계속해서 만나며 색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뭐?"
"물론 아주 잠깐이었어. 하지만 잠깐이라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건 내가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건 아닐까.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한 게 아닌 그 사람 조건을 사랑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더라고."
"사람이잖아. 평생을 못 보던 색을 갑자기 보게 되었고, 그 색을 또다시 갑자기 잃게 됐어. 당연한 거야.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위로 같은 말을 건네는 규식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다시 술잔에 소주를 따랐다. 잔에 담긴 소주잔을 보면서 나는 문득 규식에게 이상한 말을 건넸다.
"규식아 그때 기억나냐. 우리 왜 대학생 때 과 선배가 청담동 바에서 지인들이랑 졸업 파티한다고 놀러 오라고 해서 간 거."
"기억나지. 입장할 때 주는 무료 칵테일 들고 가운데서 둘이 멍청하게 서있다 왔잖아."
"그렇지. 한쪽에서 자기들끼리 놀러 온 사람들 기억나?"
"아 그 돈 많아 보이던 사람들? 기억나지. 정장에 수백만 원은 되어보이는 가방 들고 와서 비싼 양주 몇 병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자기들끼리 놀던 사람들."
"그래. 그 사람들 쳐다보다 결국 둘이 나와서 여기 포장마차에서 소주 마셨잖아. 비싼 칵테일이랑 맛있는 음식보다 여기서 먹었던 소주가 진짜 맛있었는데. 마음도 편하고 말이야."
"그랬지. 그 얘기는 갑자기 왜?"
"어쩌면 나는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랑 지금까지 어울렸던 건 아닐까 해서.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사람 잊고 다시 예전의 삶으로, 익숙했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색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잡생각 없이 마음은 편했던 그때로 말이야."
규식은 내가 하는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 말없이 포장 마자 천막을 타고 흐르는 굵은 빗방울을 쳐다보며 서로의 술잔을 비워갔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회사 대표 자리로 돌아와 밀린 업무와 신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규식은 그런 나에게 일부러 더 많은 일을 건네주며 함께 야근하기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런 규식의 배려 덕분에 나는 다른 생각 없이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종종 걸려오는 너의 연락은 모두 규식을 통해 전달됐다. 너와 연인으로서의 인연은 끝났지만, 출판사와 작가의 관계는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기에, 담당자가 필요했다. 규식은 나 대신 너와 연락하며 너의 신간 책 출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끔씩 규식이 네 소식을 내게 말해줄 때마다 마음 한편 너와 나 사이에 가까스로 쌓아 올리던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지만, 그렇게라도 네 소식을 듣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굳이 네 소식 듣기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네가 쓰고 있는 신간 책을 읽는 것도 나에게 있어서는 다른 위안이었다.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책을 쓸 때의 네 감정이 오롯이 전달되어 마치 내가 지금 너의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하루하루를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버텨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