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여전히 흑색인 커피를 내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있는 문을 열고 나가 자리에 앉았다. 현무암과 끝없이 넓게 펼쳐진 흑색의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제주도의 바다는 색이 없는 나에게도 아름다움을 줄 수 있을 정도로 깊고 맑은 바다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있다 보니 어느새 커피가 바닥나있었다. 아침을 먹지도 않고 1층으로 내려가 주섬주섬 옷을 입고 바다로 향했다. 공격적으로 솟아있는 현무암 사이에서 비교적 평평한 현무암에 앉아 오리발을 끼기 시작했다. 간단히 준비운동을 마치고는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색의 물이 내 발을 서서히 잡아당겼다. 초가을 바다였지만, 흑색의 바다 때문인지, 물은 더 차게 느껴졌다. 하지만 오히려 더 좋았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니까. 물에 잠시 적응을 마치고 바다 깊은 곳으로 잠수를 시작했다. 깊은 곳으로 내려갈수록 더욱더 어둡고 차가워지는 바닷물. 하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은 채 내려갔다. 어느새 바닥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리 어두운 곳이라지만, 내 나름의 고기 잡는 노하우가 있었다. 아직 활동적이지 못한 바위 속 물고기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호흡이 가빠질즈음 비교적 밝은 밖으로 나갔다 다시 잠수하기를 한참, 드디어 검은색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 검은형체도 나를 봤는지 바위속으로 재빨리 숨어 들어갔지만, 놓칠세라 바위속으로 손을 넣었다. 강하게 반항하는 물체를 손에쥔 채 뭍으로 나왔다. 돌문어였다. 돌문어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데, 오늘은 꽤나 운이 좋았다.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한 손에 문어를 들고 바로 앞 집으로 향했다. 마당에 있는 수도에서 대충 물을 뿌리고 스쿠버옷을 벗어 줄에 매달았다. 점심때쯤이면 다 말라있으리라. 샤워를 마치고 부엌에 나와 익숙하게 문어를 삶았다. 먹을 만큼만 잘라낸 뒤, 곧 문어라면을 만들어냈다. 종종 먹는 라면이지만, 바닷속에 들어갔다가 먹는 라면 맛은 무엇과도 비할바가 되지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또 한 잔의 커피를 내린 뒤 시계를 보았다. 어느덧 1시. 서둘러 서재로 향한 나는 머리를 대충 정리한 뒤 컴퓨터 앞에 앉았다. 곧 익숙한 얼굴들이 나를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다솔씨를 포함한 직원 몇 명과 규식이 함께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서로의 얼굴을 보고 회의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원격회의를 하는 것은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규식은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능숙하게 회의를 진행했다. 나 역시 회의에 열중하다 보니 어색한 감정은 금방 사라졌다. 그렇게 시계는 벌써 두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제주도에 내려오게 된 이유는 당연히 너 때문이었다. 익숙하고 자연스럽고, 아무리 잊은척해봐도 너를 지울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이, 심지어 규식이마저도 이제 내가 괜찮아졌다 생각할 정도였지만, 나는 밤마다 너 때문에 잠에 들 수 없었다. 하루에 수십 번씩 전화기를 집어 들었고, 술 없이는 잠들지 못했다. 차라리 네가 다른 사람처럼 아무런 색도 보이지 않았다면. 색 따위 보이지 않아도 되니, 그저 다른 평범한 사람과 같았다면. 신을 원망하고, 내 선택을 아무리 후회해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더 비참해질 뿐이었다. 회사에 출근해서 집으로 돌아와 술과 함께 잠드는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내 삶은 곧 무기력해졌고, 끝내 우울증약까지 복용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병원을 나와 한참 동안 흑색의 하늘을 쳐다봤다.
"이제 안 되겠다."
혼자만의 중얼거림과 함께 나는 차를 몰고 집 근처 부동산으로 향했다.
집을 처분하고 제주도에 원하던 집을 샀다. 제주도에 갈 때마다 들리던 카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영화에 나온 집을 개조해 만든 카페였다. 영화도 재밌었지만, 바로 앞 믿을 수 없게 펼쳐진 바다를 가진 집이었기에, 언젠가 이 집에서 살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건물주를 한동안 설득하고 나서야 어렵게 집을 구입할 수 있었다. 집 계약이 끝나자마자 바로 이삿날을 정했다. 제주도와 서울을 오가며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 규식을 찾아갔다.
"우리집까지 웬일이냐?"
규식의 말처럼 참 오랜만에 오는 곳이었다. 규식이 결혼을 하기 전에는 종종 들려 잠도 자고 가던 곳이었지만, 규식이 결혼을 한 뒤론 그마저도 힘들었다. 오랜만에 본 규식의 아내가 나를 반겼다.
"자주 좀 놀러 오시지.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셨어요."
"그러게요. 먹고살기 바빠서 잘 못 왔네요."
간만에 규식의 집에서 술 한잔 하다 보니 시계는 어느새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규식의 아내는 재밌게 놀다가라는 말과 함께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잠깐의 정적 후에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규식아, 나 일이 좀 있어서 잠깐 어디 좀 다녀와야겠다."
규식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 어디?"
"제주도"
"제주도?"
내 입에서 나온 뜻밖의 장소에 규식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곧 말을 이어갔다.
"작가님 때문이냐?"
규식은 별 놀랍지도 않다는 듯 물었다.
"응. 아무래도 좀 힘들어서."
규식은 말없이 잔을 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얼마나 힘들지는 내가 더 잘 알지. 그래 다녀와. 회사는 내가 보고 있을게."
"고맙다."
우리는 이후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잔을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했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위로가 되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에 새삼 기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바로 제주도로 내려왔다. 인테리어가 말끔히 되어있는 집에 들어서자 감회가 새로웠다. 문득 네 생각이 났다.
"나도 그럼 나중에 제주도집 구경시켜줘!"
언젠가 제주도 집을 사게 된다면 꼭 구경시켜달라던 너의 분홍빛 미소가 생생히 떠올랐다. 하지만 곧 머리를 휘휘 저으며 너를 지우려 노력했다.
"후, 시작해볼까?"
이사 오고 며칠은 정리할게 많아 잡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삿짐센터가 여기저기 놓아둔 박스를 정리하기 바빴고, 부족한 가구를 주문하고 받는 것도 일이었다. 그 와중에 규식의 제안으로 생긴 원격회의도 참여해야 하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회의는 문제없이 진행됐다. 건강에도 문제가 없었다. 회사일도 너에 관한 슬픈 기억도 이제는 차츰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우울증약도 복용량을 서서히 줄여나가, 1년이 조금 안돼서 완전히 끊을 수 있었다.
제주도에서의 삶은 네가 없다는 것만 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매일 아침 바다에 들어가 잡은 싱싱한 해산물로 아침을 차려먹고 회의에 참여한 뒤 회사 업무를 봤다. 업무에 지칠 때 즈음 2층 베란다에 설치해둔 해먹에 누워 책을 읽었다.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 그런 기분 좋은 상황에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해먹에 누워 잠들 때가 많았다.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은 알람을 쓰지 않는 것이었다. 늘 시간을 아껴 쓰기 위해 노력하던 도시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이곳에서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때에 하면 되었다. 이웃주민들도 마음에 들었다. 마주 보고 있는 집 이웃을 우연히 마주쳐도 머쓱하게 인사만 건네던 아파트와는 달리 이곳은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주민들은 보통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었는데, 한 번은 검은색 비닐봉지에 방금 딴 것처럼 잎사귀가 붙어있는 귤을 가져오시더니 내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내려온건지, 직업은 무엇인지, 이 집은 산 것인지. 사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해온 사람들이라면 이 상황이 못내 불편했겠지만, 어려서부터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컸던 내게는 이 상황이 그저 따뜻한 관심일 뿐이었다. 도시에서 내려온 것치고 싹싹하게 굴어서였을까. 마을 어르신들은 종종 내게 음식을 가져다주셨고, 나 역시 가끔 어르신들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네가 없는 삶에 차츰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회의가 끝나고 직원들이 나가자 규식이 머뭇거리며 말울 꺼냈다.
"저기, 작가님 말이야."
"그건은 네가 맡아서 하기로 했잖아."
규식의 말을 매정하게 끊어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무슨 일이길래 저렇게 망설이는 걸까. 내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 너의 이야기를 굳이 꺼낸 규식이었다.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불안한 마음에 아닌 척 규식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게 그러니까.. 작가님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더라."
"몸이 안 좋다고?"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여 규식에게 되물었다.
"응. 며칠 전에 찾아갔는데, 계속 뭘 떨어뜨리시더라고. 어디가 안 좋으시냐 했더니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다고는 하는데, 사실 작가님 이런 거 꽤나 오래됐다."
이상했다. 분명 나와 만날 때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때 색을 가져왔던 것이 문제일까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자세히 좀 알아봐 줘."
"응. 안 그래도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알게 되면 바로 연락할게."
말을 마치고 그제야 화면이 꺼졌다. 네가 믿는 신은 이 세상에 있는 걸까. 있다면 어째서 너와 나에게 이렇게 비참한 상황을 선물하는지, 참 궁금했다. 지금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답답하고 초조했다. 그저 네게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며칠 후 규식에게 들은 소식은 내게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망막색소변성증'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각막이식을 진행하지 않으면 시력을 잃을 수 있다는 게 의사의 진단. 속이 메스꺼워 화장실로 달려갔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고 했지만, 그게 나 때문은 아닐까.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몸속에서 암덩어리와 함께 솟구쳐 나오는 것 같았다. 이렇게 나는 유나에 이어 너까지 불행하게 만드는구나. 차라리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괜찮지 않았을까. 화장실 바닥에 앉아 규식에게 들은 말을 정리해갔다. 아직까지 기증자는 찾지 못했고, 이대로 가다가는 빠른 시일 내에 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기증자를 찾는 게 쉽지가 않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외투를 들고 차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