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너의 꽃집을 향해 차를 몰기 시작했다. 여전히 견고한 나무문을 밀고 들어간 곳엔 네가 있었다. 무채색의 꽃 사이로 푸른색 청바지와 하얀 티를 입은 네가 걸어가고 있었다. 꽃들에게 이야기를 건네듯 조심히 걸어가는 네 모습은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너를 부르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너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찰나 발에 밟힌 돌 하나. 인기척에 너는 나를 향해 돌아봤고, 곧 우리는 시간이 멈춘 사람들처럼 제자리에 서있었다. 꽃집에 찾아온 나비 한 마리가 우리 사이를 나풀나풀 날아다니며 시간이 멈춘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해줬다
너와 나의 이야기는 언제나 차나 커피 한 잔으로 시작됐다. 오랫동안 헤어졌던 연인이었지만, 우리는 마치 어제 헤어진 사람들처럼 차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동안 뭐하고 지냈는지, 책 집필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건지. 예상은 했지만 너는 너의 몸상태를 끝까지 내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도 그런 사실을 굳이 묻고 싶진 않았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너의 몸상태를 듣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떻게든 기증자를 찾아, 내게 다시 밝게 빛나는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온 것이니까.
"그래서 당분간 서울에 있는 거야?"
"응. 일 때문에 당분간 서울에 있어야 할 것 같아."
"집은? 어디서 생활하게?"
급하게 네게 달려온 터라 내게 서울에 집이 없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규식에게마저 연락을 하고 온 것이 아니니 얼마나 다급했는지 더 이상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나는 당황하지 않은 척 이리저리 둘러댔다.
"호텔에서 지내려고."
"편집장님 집에서 안 지내고?"
"규식이 집은 아무래도 가정이 있으니까 내가 불편해. 그냥 맘 편히 호텔에서 지내려고."
너는 잠시 애꿎은 찻잔만 만지더니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럼 당분간 우리집에서 지낼래?"
고민을 안 한 것은 아니었으나, 결국 나는 당분간 너의 집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처음 너의 집에 들어선 순간 한 번도 보지 못한 너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흑색이었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따뜻함.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함께 어울리는 가구들. 그런 집을 보여주기 민망한지 너는 급히 너의 물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너를 처음 내 흑색의 공간에 초대했을 때와 같이. 어색함도 잠시,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예전의 우리로 돌아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빼앗았고, 서로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시 예전의 우리로 돌아가있었다.
너와 함께 지내는 것은 행복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함께 아침을 먹은 뒤 가볍게 동네를 산책했다. 같이 장을 보는 것 또한 우리가 즐기던 일 중 하나였는데, 가끔씩 마트 여사님들이 잘 어울리는 부부라고 칭찬해줄 때면 내심 기분이 좋아 어깨가 으쓱했다. 장을 봐온 재료로 함께 아침을 차려먹으며 우리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그래서 오늘 출근하는 거야?"
"응. 그동안 원격으로만 회의하기도 했고, 한 번쯤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
"그래 다녀와. 본부장님께도 대신 안부 전해주고."
"응. 걱정 마."
말을 마치고 현관문을 나서 회사로 향했다. 한적한 골목에 자리 잡은 회사문을 여는 순간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낯선 목소리가 들려서일까. 직원들은 잠시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곧 나를 보고 기쁘게 맞아주었다. 변하지 않은 듯 많은 것이 변한 회사였다. 다솔씨는 어느새 막내자리를 벗어나 주임이 되었고, 새로 들어와 실물을 처음 보는 직원들도 있었다.
"자 그럼 회의할까요?"
"아 대표님!"
내 말 한마디에 수없이 많은 원망이 쏟아졌다. 나 역시 웃으며 가져온 커피와 빵을 건넸다.
"장난입니다. 이것 좀 드시면서 쉬었다 하시죠."
직원들의 웃음이 얼굴에 번졌다. 모두 간식을 가지고 휴게실로 가자 드디어 규식과 대면했다.
"잘 지냈냐?"
규식이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그럼. 제주도 좋더라. 놀러 오라니까 한 번을 안 오냐?"
"누구 빈자리 대신 메우느라 아주 죽는 줄 알았다니까."
사실이다. 내가 회사에 쏟는 시간이 적어질수록 바빠지는 건 규식이었다. 규식은 이미 내가 해야 할 업무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너한테 더 부탁하게 될 것 같다."
"부탁? 무슨 부탁?"
"회사.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제 네가 맡아줬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처럼 원격회의로 진행하고 가끔씩 서울 올라오면 되지."
"앞으로는 그것도 조금 힘들 것 같아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나는 규식을 방으로 불러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규식과 나는 직원들이 모두 퇴근할 때까지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회사 다녀올게."
네게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 운전대를 잡았다. 사실 오늘은 회사가 아닌 너의 병원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서둘러 네 눈의 기증자를 찾아야 했다. 그것이 나의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너를 조금이나마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병원에 도착해 규식이 미리 알아봐 준 주치의를 찾아갔다. 예상은 했지만, 주치의는 환자의 개인정보라며 절대 알려줄 수 없다며, 한사코 너의 병에 관해 알려주기를 거절했다. 하지만 나 역시 간절했다. 의사에게 너와 내가 무슨 관계인지, 이미 병에 대해 들어 알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며 여전히 기증자를 찾지 못한 것인지를 물었다. 주치의는 한숨을 쉬더니 곧 말을 이어갔다.
"기증자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국내 각막기증자는 수년을 기다리는 게 보통입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요즘 해외에서 가지고 온 각막이 손상이 되어 오는 경우가 많아 그마저도 이식이 힘들어졌습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장담은 못합니다만, 적어도 몇 년은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신이 있다면 어떻게 우리를 이런 상황까지 몰고 온 것일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라도 방법을 찾는 것 밖에 없었다. 나는 주치의실에서 오랜시간 이야기를 나눈 뒤 저녁 늦게 네 곁으로 돌아갔다.
너와 다시 오는 제주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제주도의 바람이 마음까지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너 역시 오랜만에 오는 제주도에 한껏 들떠있었다.
"드디어 그 집에 가보는 거야?"
"응. 서울에 올라와있어서 집 정리를 못했어. 엉망일텐데."
"괜찮아. 같이 청소하면 되지 뭐."
너를 태우고 해안도로를 달리길 한 시간. 어느새 제주도 집이 눈 앞에 보였다. 익숙하게 대문 옆 화분 밑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네가 나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아마 도어락이 아닌 열쇠로, 그것도 화분밑에 숨겨둔 열쇠로 문을 여는 모습에 조금은 놀란 것 같아 보였다.
"여긴 도둑 없어. 괜찮아."
나는 머쓱하게 말하고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역시나 넓게 펼쳐진 정원과 제주도 바람에 맞서 당당하기 서있는 2층집. 너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정원부터 집안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다녔다. 덕분에 나는 보이지 않는 집의 색을 하나하나 볼 수 있었다. 다행히 내가 상상하던 집의 색과 다르지 않았다. 너는 집 구경을 마친 뒤 정원으로 나와 화단을 보기 시작했다.
"아 그거. 옆집 어머님이 주셔서 심어봤어. 서울 가기 전에 싹도 안 났었는데, 어느새 제법 컸네."
"금잔화네."
역시 꽃집을 운영해서인지 너는 단번에 꽃을 알아차렸다.
"금잔화의 꽃말이 뭔지 알아?"
"뭔데?"
"비탄, 이별의 슬픔"
"꽃말이 좋은 편은 아니네."
너는 말없이 일어서서 내게 다가오더니 팔짱을 끼며 말했다.
"우리의 금잔화는 평생 활짝 피지 못하고 평생 봉오리로 남게 하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어디 갔다 왔는가?"
"서울에 좀 다녀왔습니다."
내가 온 것을 아셨는지, 이웃에 사는 어르신 몇 분이 물질을 마치고 집으로 찾아오셨다. 오전 내 이어진 물질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신 어르신들을 얼른 정원 평상으로 모셨다. 어르신들은 자연스럽게 평상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셨고, 나 역시 익숙한 듯 따뜻하게 차를 내려 어르신들에게 대접했다. 어르신들은 차를 받으면서 너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아니 결혼했었는가?"
혼자 생활하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여자를 데려오니 의아하셨을 만도 할 것이다. 서둘러 너와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려는 나를 가로막고 네가 대답했다.
"결혼할 사람이에요!"
너의 대답에 놀라 벙쪄있는 나와는 달리 너는 벌써 어르신들과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넓게 펼쳐진 바다를 배경 삼아 어르신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행복했다. 평생 너와 함께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와 나 모두가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이곳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이 항상 우리를 질투하는 것 마냥 우리의 결말은 지금까지 좋지 않았지만, 이번에야말로 보란 듯 너를 행복해주겠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