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트 #6

by 이승훈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프로젝트를 정리하고 밤늦게 집으로 향했다. 눈만 붙이고 다시 회사에 나와야 하지만, 차라리 잡생각이 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차를 하고 집 앞에 올라왔을 때 문 앞에 있는 낯선 색들이 보였다. 흑색의 공간에 검은색 목티와 베이지 셔츠를 입고 문 앞에 주저앉아있는 누군가. 갈색 머리를 보기만 해도 그것이 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당황한 채 네게 다가가지 못했지만, 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대표님?"

"여기 어떻게 갑자기.."

"할 말이 있어서 왔어."

오랜만에 보는 네가 사무치게 반가웠지만,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내가 너를 다시 가까이한다면 분명 너의 색을 빼앗아 올 것이다. 내게 다가오려는 네게 거리를 유지하며 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마! 할 말 있으면 전화로 하자. 나 몸이 안 좋아서 지금은 말하기 힘들어."

"다 알고 왔어. 본부장님이 모두 이야기해줬어. 네가 내 색을 가져갔다는 거. 본부장님도 말하기 힘들어했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너와 끝나는 건 싫다고 설득했더니 이야기해주시더라."

결국 네게 모든 이야기가 들어갔다. 사실 규식에게 말하면서 언젠가는 네게 이야기가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규식은 언제나 내가 행복하게 살기 바라는 놈이었으니까. 어쩌면 나는 규식이 네게 모든 사실을 말해주기를 바라고 말한 것일지도 모른다. 비겁하게 네가 선택해서 어쩔 수 없이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계속 밖에 세워둘 거야?"

너의 말에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집 문을 열었다. 잠깐은 괜찮겠지라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그토록 그리워하던 너를 다시 나의 공간으로 끌어들였다.

"커피 마실래?"

"응. 부탁해."

너와 나 사이에 커피 내리는 소리만 들릴 뿐 누구 하나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다 내려진 커피를 네게 건네고 멀찌감치 거리를 유지했다. 흑색의 커피잔이 네게 전달되자 하얀색으로 변했다.

"그래서 찾아온 이유가 뭐야?"

일부러 퉁명스럽게 물었다. 당장이라도 가서 너를 끌어안고 싶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너를 안고 싶었지만, 그 한 번이 꺼져가는 내 욕심에 불을 지필 것 같아 간신히 참아냈다. 너는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퉁명스럽게 구는 거 아냐?"

"좀 피곤해서. 다 알았으면서 찾아온 이유가 뭐야?"

"네가 좋으니까. 너랑 헤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너의 말에 감정이 북받쳤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의 공존. 내가 너의 색을 빼앗아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내게 좋다고 말하는 너.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대답했다.

"그래서 다시 만나자고? 내가 네 색을 빼앗아오는 걸 알면서도?"

"그건 네 생각일 뿐이잖아.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거잖아. 진짜 내 몸상태가 안 좋아서 잠시 색이 안 보이는 것이었을 수도 있잖아."

"아닌 거 너도 알잖아. 시기도 딱 맞았고, 네가 보이지 않는 색이 내가 보이는 색과 정확히 맞았어. 너와 함께 한다면 내가 다시 너의 색을 가져갈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야. 너도 알고 있잖아."

"그렇지만.. 너는, 너는 이대로 나를 못 봐도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지금도 너를 죽도록 안고 싶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 그래서 그게 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내 욕심 채우자고 네 인생을 망가뜨리라고?"

"그런 말이 어딨어."

"제주도에서 내가 너를 뿌리친 적 있었지? 그거 내 옛 친구 때문이야. 너처럼 내게 먼저 다가와준 사람. 근데 그 사람 나 때문에 죽었어. 피를 흘리고 죽어가고 있었는데, 내가 색도 못 보는 병신이라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한 공간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고. 너라고 다를까? 색을 하나씩 빼앗다가 결국 너를 같은 결말로 만들지 말라는 법도 없는 거잖아!"

아무 잘못도 없는 너에게 나는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이런데도 나를 만날 수 있다고? 네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예상 밖의 이야기와 나의 반응에 너는 당황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와 나 사이에 적막만이 흘렀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른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족이라도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제 그만 돌아.."

"할 수 있어."

"뭐라고?"

"나는 너랑 이렇게 못 헤어져. 너를 감당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네가 말한 게 진짜 사실인지 확인해하기 전까지는 너를 떠날 수 없어. 네 맘대로 헤어지는 건 그때 다시 생각해. 그전까지는 네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을 거야."

반대로 내 말문이 막혔다. 모든 사실을 알고도 내 곁에 있겠다는 너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지만 그런 생각과 함께 드는 알 수 없는 안도감과 행복감. 너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일까. 아니면 너로 인해 세상의 색을 조금 더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일까. 하지만 둘 중 어느 것이던 앞으로 너와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너와 함께하는 일상이 다시 시작됐다. 색으로 가득 찬 너와 일어나 함께 밥을 먹고, 같이 회사에 나갔다. 너의 차기작을 준비하는 일이 우리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였기에 너는 항상 나와 함께 회사로 출근했고, 규식도 직원들 모두 다시 돌아온 너를 환영해주었다. 너와 같이하는 일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고될만도 하지만 언제나 행복했고, 수정된 원고를 읽다 쪽잠을 자도 너와 함께 있는 순간이 좋았다. 일을 마치면 너와 함께 내 집으로 향했다. 흑색의 공간을 항상 밝게 밝혀주는 너로 인해 집은 더 이상 차갑고 어두운 공간이 아닌, 따뜻하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서로를 안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상은 내겐 더없이 소중하고 행복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 잡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은 하루 종일 내 마음을 괴롭혔다. 언제 다시 너의 색을 빼앗아 올지 모르는 불안감과 그로 인한 죄책감.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한 번, 우연히 한 번 있었던 일이었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평소랑 다름없이 아침에 눈을 뜨고 너와 함께 회사에서 일을 하다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순간 비치는 이질감. 설마 하는 예상은 애석하게도 정확히 들어맞았다. 도로 가운데 있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노란색 점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불안한 예감에 옆에 있는 너를 쳐다봤다. 너 역시 이질감을 느꼈는지 자리에 서서 가만히 멈춰있었다. 결국 너와 나는 다시 같은 결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잡고 있던 너의 손을 놓으려 할 때 네가 내 손을 놓지 않겠다는 듯이 강하게 붙잡았다.

"왜 그래?"

너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내게 말했다.

"너 안보이잖아."

"뭐가. 나 다 보이는데?"

애써 웃으며 말하는 너였지만 이미 눈시울은 붉어질 대로 붉어진 상태였다. 그런 너의 모습에 나 역시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는 없었다.

"다 보여?"

"당연하지."

거짓말에 서툰 너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내 가슴팍에 머리를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너를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안아주었다.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시간이 멈춰 평생을 이대로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흐르던 눈물을 닦고 너의 얼굴을 쳐다봤다. 눈과 코가 붉어진 너의 얼굴마저 사랑스러웠다. 두 손으로 네 얼굴을 감싸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바보같이 누가 길거리에서 이렇게 우냐."

"너도 울었잖아."

간신히 대답하면서도 너는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

"너랑 함께하고 싶었는데. 매일을 너와 함께 한 침대에서 눈뜨고, 같이 장도 보고, 너 닮은 아이도 낳아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역시나 그건 내게 너무나 큰 욕심이었나 봐."

"아니야. 나 진짜 보인다니까. 나 다 보여. 그러니까.."

"우리.. 이제 그만하자."

마음속으로 꾹꾹 눌러왔던, 꺼내고 싶지 않던 그 말이 결국 너의 가슴을 향했다. 결국 어딘가에 있을 신은 결국 내편이 아니었다.


네가 없는 일상이 다시 시작됐지만 생각한 것만큼 아프거나 무기력하지 않았다. 어쩌면 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을 때 이런 상황에 대한 내 나름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금은 어색하지만 흑색의 공간에서 대충 아침을 차려먹고 회사에 출근했다. 여느때와 다르지 않게 업무를 진행했고,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퇴근 후에는 집 근처 헬스장에 들러 가볍게 운동을 한 뒤 집에 들어왔다. 네가 없을 때의 변하지 않던 나의 일상이었다. 운동까지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시계는 어느덧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둘러 저녁을 차려 대충 끼니를 때우고 침대에 누웠다. 네가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바쁜 하루였다. 평소 같으면 온몸이 지쳐 잠들어야 정상이지만,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꾹꾹 눌러왔던 너에 대한 감정들이 조금의 여유와 함께 폭풍처럼 몰려들었다. 너와 함께 밥을 먹고, 업무시간에 함께 서점을 돌아다니던 그때가 생각났다. 무채색의 배경 사이로 환하게 웃는 너의 불그스름한 미소, 흰색 원피스가 잘 어울리던 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또 닦아내었지만, 눈물은 눈치도 없이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핸드폰을 열었다 닫았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결국 나는 너에게 전화를 걸지 못했다. 그렇게 나의 어두운 새벽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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