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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조용한 관종의 24시

<달콤한 간택일지 1>

by 노란까치

꿀복이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추억이 겹겹이 쌓이면서 서로가 일상에서 영향을 많이 주는 것 같다.

꿀복이는 정말 말 그대로 ‘꿀’ 떨어지는 ‘복’ 덩이임이 틀림없다.


어디서 그런 비유를 들었던 것 같은데, 고양이는 정신과 의사라면 강아지는 외과의사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들은 매일같이 강아지와 산책을 하기 때문에 건강해지고, 마치 외과의사 같고, 고양이는 정신적으로 위안을 주기 때문에 정신과 의사라는 말이 있다. 꿀복이는 나에게 위로와 끊임없는 미션을 주는 고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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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복이는 대체로 호기심이 많고 사람한테 거부감이 없는 고양이라 초반에는 애교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꿀복이를 관찰한 느낌의 결론은, 꿀복이는 ‘상냥자’ 고양이다.

꿀복이는 자신만의 고집이 강하기 때문에 절대로 싫어하는 건 죽어도 안 하는 편이고,
내가 큰 소리를 지르건, 부탁을 해도 꿋꿋하고 당당한 눈빛은 변함이 없다.


고양이마다 조금 케바케이긴 하겠지만, 확실히 꿀복이는 내 눈치 따윈 절대 보지 않고, 결국 하고 싶은 걸 집요하게 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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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복이와 같이 생활하면서 느낀 것은 고양이는 대체로 특정 루틴, 하고 싶은 고집, 이 부분은 쉽사리 통제가 안 되기 때문에, 그냥 다른 호기심 요소를 더 자극해서 눈을 돌려주는 것으로 대체하고 있다.


그리고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은, 나는 강아지들만 후각이 뛰어나 냄새 맡는 걸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고양이 후각의 능력은 진짜 상상을 초월한다.

청각도 물론 뛰어나지만, 후각 능력도 상당하다는 걸 꿀복이를 보며 깨닫게 된다.

고양이들은 수직 본능도 있어서 높은 곳도 본인이 원하는 곳으로 가서 거침없이 행동한다.
어디에 숨겨놔도 꿀복이 코의 레이더망은 마약탐지견처럼 미친 듯이 발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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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복이는 생선류를 가장 좋아하는데, 생선뿐 아니라 갑각류(굴, 조개, 오징어 등) 바다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를 가장 좋아하는 것 같다.

어느 날은 코다리찜을 배달해서 시켜 먹고, 남은 코다리를 잠깐 냄비에 넣고 인덕션에 올려두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꿀복이 앞발이 주황색으로 보였다. 내 눈이 이상한가 하고 다시 꿀복이를 살펴보니,
앞발이 주황색으로 염색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하고 꿀복이 주변을 탐색하니, 주방 식탁 위에 범행 흔적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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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는 꿀복이의 주황 발자국이 남겨져 있었고, 그 발자국을 따라가 보니 인덕션 위 냄비 뚜껑이 열려 있었고, 코다리를 건드린 흔적이 보였다.


꿀복이가 코를 사용해 냄비 뚜껑을 열고, 그 상태로 앞발로 찍먹을 하며 냄비 안 코다리를 넘본 것 같다.
아무래도 비린내 때문에 다가가긴 했으나 양념이 많이 매웠고, 각만큼 먹을 수는 없었던 터라 몇 번 찍먹만 시도하고, 더는 건드리진 않은 것 같았다.

너무 황당해서 앞발을 닦아주려 물티슈로 계속 닦았지만, 털에 주황 양념색이 배어버려서 닦이지 않았다. 앞발 젤리(육구) 냄새를 맡아보니 코다리찜 냄새가 아직도 났다.


그 사건 이후로는 모든 음식물은 주방에 내어두지 않고, 베란다나 냉동 보관으로 철저히 밀폐하고 있다.

꿀복이랑 하루를 보내고 있으면, 말없이 다가오고 말없이 사고를 치기 때문에 ‘조용한 관종’ 같은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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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관종의 하루는 생각보다 할 일이 많다.

고양이들이 그저 한가롭게 잠이나 자고, 간식 먹고 또 자고, 이런 패턴으로 편하게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디테일하게 관찰해 보니, 나름 꿀복이도 하루 일과가 바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자정이 지나면 혼자 창문마다 여기저기 다니며 하울링과 ‘우다다’를 하며 외로운 싸움을 벌이기 일쑤였다.
새벽 4~5시 사이, 남편이 일찍 출근하기 때문에 나 대신 꿀복이가 출근길 배웅을 현관까지 해주곤 한다.

그리고 오전 7시 30분에서 8시 사이에는 반드시 나를 깨우기 시작한다.


모닝콜 서비스를 연중무휴 실시하며, 나를 깨움으로써 꿀복이의 본격 루틴이 시작되는 것 같다.
영양제 간식도 받아먹어야 하고, 화장실도 얼른 치우라고 요구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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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집사도 훈련시켜야 하니, 꿀복이는 나름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내가 서재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는 내 옆 방석으로 와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감시하기 시작한다.

물론 옆에서 그루밍을 하다가 오전잠을 자긴 하지만, 츄르값을 벌어오는지 아닌지를 점검하는 것 같았다.
나와 같이 정오가 되면 점심 식사를 했고, 12시에 자동 급식기 소리가 나면 벌떡 일어나 단숨에 5초 컷으로 해치운다. 그리고는 집사가 먹는 음식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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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맛있는 거 먹는 건 아닌지, 뭘 챙겨 먹는지 호기심이 많고 항상 ‘기미’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꿀복이가 원하는 것은 놔두는 편이지만, 꿀복이의 안전과 건강에 직결된 문제는 나도 꽤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소리를 질러도 말을 안 듣고, 때릴 수도 없고, 내가 울 수도 없어서 나만의 무기를 하나 만들었다.

바로 꿀복이가 극도로 싫어하는 걸 하는 것이다. 물 분무기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

꿀복이가 밥도 먹고 사람 음식에 식탐을 부릴 때는 분무기를 들고 얼굴에 한 방 뿌려주면 알아서 도망간다. 1m쯤 떨어져서 그제야 내 눈치를 본다. 몇 번 그렇게 패턴을 익히고 학습하다 보니, 이제는 내가 분무기만 들어도 알아서 도망간다.


이렇게 분무기 하나로, 조용한 관종 녀석을 제압할 수 있다.

그렇게 우당탕탕 점심시간이 끝나면, 소파나 캣타워 등 자신만의 최애 장소로 가서 그루밍을 하다가 낮잠을 자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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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혼자 우다다 놀이하다가 집사 훈련까지 했으니 잠이 올 만하다.

그리고 오후 4시가 넘으면 남편이 도착한다. 남편은 오자마자 꿀복이와 격한 놀이를 해주고, 밀린 뽀뽀도 하며 꿀복이와 교감을 나눈다.


그리고 오후 6시, 내가 퇴근과 동시에 저녁 식사가 시작된다. 꿀복이는 또 자동 급식기로 달려가 5초 컷으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우리의 저녁 메뉴가 궁금한지 또 개입하기 시작하는데, 그럴 때마다 분무기를 들면 기지개를 켜며 자연스럽게 자리를 이동한다.


쿠쿠에서 밥 짓는 소리가 들리고, 마지막 뜸을 들인 뒤 완료 멜로디가 나온다.
꿀복이는 그 소리가 끝나면 내가 밥솥을 열고 주걱으로 밥을 뒤적이는 패턴을 이미 이해하고 있어서,
옆에 와서 주걱에 붙은 밥풀 몇 알을 얻어먹으려고 기다린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밥풀 자체가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는 않아서 5알 정도, 많으면 10알 정도 주걱에 붙은 밥풀을 주곤 한다.


갓 지은 밥이 맛있는 걸 꿀복이도 알아버렸는지, 쿠쿠 취사 완료 소리에 진심으로 흥분한다.

밥 먹고 나서 집안일 몇 가지 하다 보면 어느덧 시간이 10시가 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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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사냥 놀이를 해주고 싶지만, 피곤할 때는 적극적으로 못 해줄 때도 많다.
그래서 10시 이후에는 몸으로 대화하듯 사냥 놀이를 해주곤 한다. 간식을 곳곳에 숨겨 놓아 직접 찾아다니며 먹게 하거나, 매일 장난감을 바꿔 가며 흥미를 유발해 준다.

그렇게 12시가 되어 나는 잠자리에 들고, 꿀복이도 소파에서 쪽잠을 자다가 내가 잠든 사이 내 다리 밑으로 와서 함께 잠든다.


이런 패턴으로 거의 24시간의 하루를 보내고 있으며, 꿀복이는 직·간접적으로 나를 조용히 감시하고 있다.

내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고양이도 내 루틴을 알고 있고, 나름 본인이 만든 영역 안에 나를 두고 하나의 소유물처럼 인지하는 것 같기도 하다.


고양이를 왜 그렇게까지 집사들이 자발적으로 신분을 낮춰가며 보좌하고 보필하고 그러는지 예전에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고양이는 확실히 사람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길들이는 밀당의 고수들이다.


이런 ‘조용한 관종’ 고양이의 평범한 일상 속에, 또다시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회식이라고 했던 남편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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