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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wallow Oct 29. 2019

소아시아 역사문화산책

터키 이스탄불 2017: 동맥혈같이 흐르는 인류역사의 맥박(2)

갈라타 다리에 이스탄불이 있다

이스탄불을 찾을 때마다 이태리 제노아 상인이 무역을 했던 베이올루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관청지역이었던 파티흐로 넘어가는 갈라타 다리 위를 걷곤 한다. 지하철을 타고 카라코이에서 내려 노을이 켜지는 해 질 녘에 그 다리를 걸으면 마음에서 시적인 감정이 올라온다. 이 다리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골든 혼이라는 두 물길이 만나는 곳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리에 기대어 많은 강태공들이 낚시를 하고 있다. 그들은 생업으로 한 마리 한 마리 낚는 어부들로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보인다. 

다리 위에서는 모스크가 바라보이고 선착장에서는 동서양을 연결하는 배들이 수시로 움직인다. 선착장 부근에는 고등어 케밥을 파는 곳이 새로이 단장해 예전보다 조금 비싼 가격으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떠돌이 손님을 대상으로 인기 있는 음식은 케밥 외에도 구운 옥수수와 툴룸바가 있다. 툴룸바는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즐기던 후식인데 시럽을 넣어 상당히 달다. 우리의 강정과 비슷한데 단맛은 더 강하다.

여러 곳을 오가는 배를 타고 동양에 위치한 위스크다르로 가면서 좌우를 보니 볼가-돈이라는 러시아 배가 지나간다. 예전 볼가 강에 서서 멀리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았는데, 이 배는 볼가 강의 어느 항구에서 떠나 돈 강과 흑해 그리고 이곳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 지중해까지 가겠지 싶다. 강 주변에 펼쳐진 제국 시절의 건물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배를 타며 본 전경과 흡사해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위스크다르에 내려 보니 오랜 모스크가 보이고 여느 도시와 같이 번잡하다. 터키 용사들이 한국전에 참전해 고향을 그리면서 불렀다는 노래가 ‘위스크다르’였다는데, 그 노래의 본고장이 이곳이다.


탁심광장과 이스티크랄에서 만난 이스탄불의 눈

우리의 명동거리 같은 탁심 광장과 이스티크랄 거리를 걷는 것도 또 다른 묘미다. 탁심 광장에서 시작해 이스티크랄 거리를 걸으면서 터키의 남녀노소 사람들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거리 좌우에는 각종 상품가게와 식당들이 있는데 2017년에는 유럽인이 대폭 줄어들고 아랍인과 이란인들의 발길이 늘고 있다. 중동국가 사람들이 늘어서가 아니라 유럽인들이 눈에 보기 어려울 정도로 감소했다는 것이 터키와 유럽 간의 긴장된 현 상황을 말해준다.

이스티크랄 거리를 따라가면 유대교 사원, 아르메니아 기독교회 등 다양한 종교시설이 있고 노벨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이 자신의 작품으로만 만든 박물관이 있어 문학적으로도 풍요로운 곳이다. 18~19세기 당시의 인쇄물을 사진으로 만들어 파는 곳에도 가끔 들르기도 했다.

내가 특히 이 거리를 좋아하는 것은 이스티크랄 거리의 중간쯤에 세계적인 사진작가 아라 귤레르의 카페가 있어서다. 그는 아르메니아계 터키 작가로 이스탄불의 토속적인 정서를 서정적으로 담아내 ‘이스탄불의 눈’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뉴욕타임스>에서도 한 면을 할애해 그의 인상적인 작품들을 소개한 바 있다. 부둣가 어부의 모습, 짙은 주름진 얼굴의 노인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 커피점 앞의 사람들 등을 흑백사진에 담았는데, 감상하다 보면 50여 년 전의 터키 속으로 거니는 느낌이다.

한국에서 그의 작품을 본 후로 이 카페에서 세 번이나 그를 만났는데, 구순에 가까운 노장이라서 이제는 작품활동을 쉬고 있지만, 그의 여전한 한국에 대한 호감은 무척 반가웠다. 그는 젊은 시절 앙리 베르그송 같은 세계적인 작가들과 같이 작업했던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내가 이스탄불에 갈 때마다 탁심 광장의 포인트 호텔이라는 곳에 머물곤 했는데 호텔 내 사진작품을 전부 아라 귤레르의 사진으로 전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귀국하기 전, 아라 귤레르를 만나 곧 떠난다는 메시지를 전했는데 눈만 끔뻑끔뻑하던 그의 모습, 나이가 주는 무게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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