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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틸다 하나씨 Jul 25. 2024

사막과 논라

그리고 바다


나는 지금, 푸른 바다가 필요해요

나는 지금, 여름 햇볕이 필요해요

나는 지금, 모래사막이 필요해요


휴식고독탐험이 필요하거든요.


사막의 바다


베트남에도 사막이 있어요.

웅장한 모래 언덕은 베트남의 사막 지역 무이네(Mui Ne)의 White Sand Dunes 풍경입니다.

[Miền Trung], 1981

Lê Huy Tiếp (레 후이 띠엡)의

[Miền Trung], 베트남의 중부지방


그의 작품 앞에 한참 서있는 동안

'휴식, 고독, 탐험'의 갈증이 해갈되었습니다.


바다의 사나이 레 후이 띠엡의 작품에는 베트남 전역의 다양한 바다가 자주 등장합니다. '해안선의 다름'을 즐기는 묘미가 있지요.


회색 방파제와 수평을 이룬

차가운 색조의 푸른 바다 아래로

따듯한 색조의 금빛 모래 언덕이 펼쳐집니다.

보호색 같은 베트남 전통모자 논라(Nón lá)를 쓰고 탄탄한 근육을 뽐내는

한 남성의 붉은 수영복과 한낮의 그림자,

모래사막을 비추는 뜨거운 여름 햇볕에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모래 잡초 그림자의 사실적인 표현력에서

그럼에도 힘을 내야 한다는 강렬한 삶의 의지가 들어오고요.

어깨에 맨 밧줄에선 그림 밖으로 훅 낚아채 오고 싶은 충동이 드는 선명한 디테일이 보여요.

남자의 그림자를 등지며 퍼져나간 모래 물결의 모양에 해안가의 바람 소리마저 들려오는 듯합니다. 


단순해 보이는 그림 속에 참 많은 감동의 장치를 숨겨 두고 있네요.

하늘과 바다와 모래언덕과 한 남자의 형상이

수평으로 차례차례 배치되며 미묘한 균형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균형의 구도안에서 덤으로 얻는 것은

’ 평화로움‘이라는 선물입니다.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듯 착각이 드는 그의 극사실주의 그림 앞에서

바다가 그리운 목마름이 모래 바람을 타고 날아가버리는 듯합니다.




Lê Huy Tiếp(레 후이 띠엡)은 회화뿐 아니라 판화 예술로도 유명한 베트남 현대 미술의 선구자입니다.

그는 러시아 유학 후 하노이 공업 미술대학에서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고 2001년에는 국가 문학 예술상을 수상한 작가입니다.


극 사실주의, 낭만주의, 초현실주의의 화풍을 보여주는 그의 예술 인생 50주년 기념 전시회가 2020년에 열렸습니다. 전시되었던 작품들 중 바다를 주제로 한 그림들만 소개하려고 해요.

오늘은 바다가 필요한 날이니까요.


베트남 사이트를 열심히 찾아봤지만 맨 위에 소개한 작품 외에 오늘 제가 픽한 바다 풍경의 유화 작품들은 아쉽게도 작품의 제작 연도, 제목, 스토리 등 회화 정보를 찾기가 정말 쉽지 않았어요.

며칠 동안 찾고 찾기를 반복하다 더 깊이 들어가 보는 것을 멈췄습니다.


때로는 '이름 모를 그'를 감상하는 것도 신비함을 만끽하는 일이니까요.

그저... 감상해 볼게요.




어머니의 바다

이 그림 속 여성분은 아마도 그의 어머니인 것 같습니다.

정보를 찾던 중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에게 정말 로맨틱한 러브 스토리가 있었거든요.

당시 젊은 지식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학생 운동에 적극 참여하다 고향인 응에안으로 추방당했습니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혁명 조직과 연락을 시도하고 싶어 하지요. 상부로부터 그를 도와줄 한 여성 동지를 소개받게 되고 연상인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청혼을 거절합니다. 여성 혁명가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8월 혁명이 성공한 후로 오랜 시간이 흘러 그들은 공상 당원의 상급자가 되어 다시 만났는데 이는 그가 10년 넘게 그녀만을 기다렸기 때문이죠. 다시 한번 그는 그녀에게 청혼했지만, 그녀는 또다시 거절했습니다. 그녀는 고문으로 인해 어머니가 될 수 있는 능력을 잃었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의 간절한 마음과 조직의 설득으로 그녀는 결국 수락했고 1948년에 열린 그들의 결혼식은 지방 신문에 실리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2년 후 기적처럼 베트남 세기의 예술가가 된 '레 후이 띠엡'을 낳게 되었지요.

그림 속 이 여성은 작가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이었을는지도 모르지만, 왠지 아버지의 영화 같은 사랑을 그림으로 남겨두고 싶어 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에 근거하기보단 제가 느끼는 대로의 해석을 하는 날이니 작가도 이해하겠죠.


검은 생머리에 연청남방을 걸친 여성이 그림의 중심에 배치되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어요.

만삭이 되어가는 배 위에 손을 올리고 먼 곳을 바라보는 여성의 표정에 희망과 불안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담겨 보여요.

그녀가 응시하는 시선의 반대편으로 과거를 암시하는 듯한 전통 그림과 전등이 눈에 들어옵니다.

새로운 생명과 기존의 가치관 간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녀의 불안한 모습과 구름 낀 흐릿한 날의 바다를 담은 차분한 색조의 배경이 더해져 불투명한 앞날을 암시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녀를 등지고 누워 바다를 바라보는 누렁이의 뒷모습에도 왠지 그녀를 닮은 분위기가 있네요.

베트남 혁명 역사의 산 증인인 엄마는 아이의 미래를 염려하는 복잡한 감정의 선을 전달하며

깊은 사유의 여지를 건네주는 듯합니다.





고독의 바다


이 작가는 강아지를 참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림마다 나오는 누렁이와 저도 이제 반가운 인사를 나눌 사이가 된 것 같아요. 이름 모를 녀석이지만요.

그의 제자들은 그에게 처음 배운 것이 '존경'이었고, 두 번째로 배운 것이 '정직'이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푸근해 보이는 그의 웃음을 보면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동물을 사랑한 따듯한 성정의 사람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먼바다를 바라보는 저 누렁이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그림에는 보이지 않지만 옷을 다 벗어던지고 바다에 뛰어들어 신나게 헤엄치는 주인의 물건을 충성스럽게 지키는 중이겠지요? 베트남 대표 담배 555(남남남) 한 대를 피우고 코카콜라 한 병을 시원하게 원샷하고는 바다로 내달린 모습이 그려지네요.


주인 커플은 행복한 바다수영을 즐기고 있을 것 같은데

충성된 강아지의 뒷모습은 왠지 고독한 존재감을 뿜뿜하고 있습니다.

미묘한 감정의 대비를 마치 의도한듯한 작가는

잃어버린 과거와 어떤 기다림을 혹은 세상을 향한 고독의 감정을 자신이 사랑하는 강아지의 뒷모습에 이입해 보고 싶었던 같아요. 





휴식의 바다

그의 그림을 통해 베트남 곳곳의 해안선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네요

어느 바닷가로 소풍을 간 것일까요?

돌더미가 쌓인 모래사장 위에 피크닉 음식을 잔뜩 쌓아두고

바다를 그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림 속 그림을 완성한 후에

사랑하는 이가 그를 바라보며 남겨 준 사진 한 컷을 보게 되고 그것이 맘에 쏙 들어 다시금 정성을 다해 그린 것 같습니다.


전경에 툭 걸려있는 그의 감색 셔츠가 주는 내추럴함을 시작으로 지그재그를 그리며 펼쳐지는 자연경관들 (돌더미와 웅덩이, 낮은 절벽, 해안선을 따라 퍼지는 바다와 하늘) 그리고 소품들(피크닉 돗자리 위의 와인과 음식, 자전거, 나무배), 그에 더해 논라를 쓰고 물건을 파는 아주머니와 그녀의 개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그의 누렁이가 경쾌한 구도로 배치되고 있어요.

트위스트 스텝을 타고 구경하다 보면 저 끝 보일 듯 말듯한 섬으로 소실점이 모아지는

유쾌한 평화로움의 원근법을 담고 있네요. 





아픈 바다

베트남 전역에 매장수가 150여 곳이나 되는 한인 마트인 K-Market의 비닐봉지와 초록봉지가 바닷바람을 타고 날아다닙니다.

집 앞 마트에서 거의 매일 들고 오는 저 익숙한 봉지가 베트남 작가의 그림 속에서 보이다니…

깜짝 놀랐다가

이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바람 타고 날아다니는 불청객 같은 비닐봉지에게 화가 났다가

PPL인가 왜 하고 많은 것 중에 K-Market봉지인가 했다가

이 쓰레기의 주범이 대부분 한국사람이라는 걸 꼬집는 건가 했다가

알 수 없는 작가의 의도를 두고 혼자서 이러쿵저러쿵하고 있네요.


이 작품에서도 역시 도드라지는 작가의 원근법은

맑고 푸른 하늘과 잔잔한 에메랄드 빛 바다의 색조와 머스터드빛 모래사장 속에서 어울리며 평화로운 느낌을 주지만, 공중에 떠 있는 플라스틱 봉지 때문에 이내 불쾌감과 불안감이 조성됩니다.

이러한 감정선의 대비를 이용한 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해치는 환경오염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것에 성공적이었다고 생각되네요.

환경 문제를 고민하게 만드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으니까요.

이 작가분, 원근법에 감정선의 대비까지 담아내시는 스킬이 정말 탁월하시네요. 



구름 사이로 바다를 비추는 햇살 줄기는 찬란합니다.

빛줄기가 퍼지는 각도와 왼쪽 아래 모서리부터 화각이 퍼지는 구도가 맞물리게 배치하고

고뇌하는 주인공은 그림의 중심대처럼 오른쪽에 딱 두었습니다.

매력적인 구도속에 빛과 쓰레기를 < > 괄호모양처럼 맞물려 보이는 각도로 대비시킨

작가의 똑똑한 의도가 돋보입니다.   

전체적인 그림의 색감은 태양빛과 대비되며 쓰레기 더미가 가득한 바다에 피어오르는 그의 담배 연기처럼 희뿌옇습니다.

풀 죽은 누렁이의 밥그릇도 엎어져 있는 게 너무 슬프네요.

바다가 울고 있어요.

저 쓰레기를 누가 언제 다 치울까요?

파도를 타고 계속 밀려 들어오는 걸까요?

깨진 벽돌벽에 기대앉은 그의 염려가 티셔츠의 붉은 색감만큼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그의 한숨 소리가 깊게 들려오는 듯해요.


우리, 환경을 보호해요

바다를 울리지 말아요.

 




아련한 바다

애니메이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아련함이 퍼져나가네요.

낡은 고동색 문을 의지하고 기댄 나무 테이블 위에

이가 나간 자기 그릇과 황토 주전자, 파란 문양이 돋보이는 호리병과 술잔 그리고 살아 있는 소라와 해마 불가사리가 붙어있을 뿐인데…

왜…

그림을 바라보는 내내 가슴이 미어지는 걸까요…

흐릿한 바다 위 외로이 떠있는 한 척의 나무배 때문일까요

문 위에 붙어 달랑거리는 구겨진 종이와 연필이 남기고 싶은 어떤 편지 때문인 걸까요?


그리움에 지친

궂은 마음을 흐린 날씨에 담아 둔 바다 같아요.

슬퍼보이면서도 자세히 보면 그릇이 놓인 낡은 테이블 위로 자연광이 부드럽게 반사되어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고 있어요. 마음의 온도가 스르르 올라갑니다.

레 후이 띠엡은 섬세한 배치와 원근법의 천재인가 봐요.

문 밖으로 보이는 바다와 하늘의 포션은 그림의 1/4 정도일 뿐인데 시각적으로는 꽤 넓게 보이니까요.

특별한 배치와 구도로 그림 속 바다의 공간을 더욱 확장시키면서 제 마음속 구멍도 크게 늘려주는 느낌입니다.



바다의 아련함을 한동안 머금고 싶어

이제 마무리하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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