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유산에서 벗어나 적응하고 변화하기
심리상담사들은 종종 수퍼비전을 받는다. 수퍼비전은 선배 상담사로부터 자신이 수행한 상담과 심리검사에 대해 피드백을 받는 시간을 말한다. 상담사들은 저마다의 필요에 따라 수시로 수퍼비전을 받는다.
나도 오늘 선배 상담사 한 분으로부터 수퍼비전을 받았다. 수퍼비전은 긴장보다는 통찰의 즐거움이 더 많은 시간이다. 사전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1:1 미팅을 통해 피드백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중요한 내용을 어느 정도 다루고 미팅이 끝나갈 무렵, 선배 상담사님이 나에게 “보고서를 쓰시는 방식이 회사에서 PPT 보고서 작성하는 것과 비슷하시네요”라는 말을 하는게 아닌가. 나의 보고서에서 재미있게 느낀 점을 표현한 것이겠지만, 그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오랜 직장생활에 물들어져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직장인 사투리라는 말이 있다. 다른 곳에서는 잘 쓰지 않지만, 직장인들에 회사에 출근하면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특유의 용어와 말투를 뜻한다. 처음에는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 하나 둘 생겨났지만, 나중에는 직장인들의 소속감과 정체성을 대변하는 하나의 문화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 R&R 정리했어요?”
"클라이언트 반응 좀 탭핑해볼게요.”
"이 기획 피져빌리티 체크는 끝났나요?”
"1차 마일스톤 일정이 다음 주네요.”
"디자인팀이랑 컨센서스 맞추고 오세요.”
"이따 커피챗 어때요?”
"이 아젠다에 대해서 서비스 쪽 스탠스 체크해보세요.”
"이 대행사는 애티튜드가 좋네요.”
찰스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남아메리카 에콰도르에서 서쪽으로 1,000km 떨어진 화산군도인 갈라파고스 제도를 탐험하다가 진화론에 대한 아이디어를 형성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갈라파고스는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며, 활발한 화산활동과 지진, 그리고 해류의 접점에 위치한 탓에, 유례 없이 독특한 생태계를 형성하였기 떄문이다. 직장인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이라는 곳은 어떤 면에서 갈라파고스와 비슷하다. 매일 가던 곳에 계속 가고, 보던 사람을 계속 보고,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게다가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기까지 한 직장이라는 환경은, 고립된 문화와 행동 양식을 배양하기에 딱 좋은 장소이다. 그 안에서 직장인들은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방언을 개발하고 활용하기 이른 것이다.
나는 프리랜서로 일하기 전에 26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였다. 수없이 많은 회의에 참여하고, 보고서를 만들고, 회식을 했다. 그러면서 습득한 소프트한 지식 중에는 조직 안에서 더 원만하게, 편하게 생활하기 위한 노하우도 포함되어 있다. 까이지 않는 PPT 보고서를 만드는 방법, 회의 시간에 은근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법, 뭔가를 부탁하는 이메일을 요령있게 잘 쓰는 방법, S등급을 받는 자기평가서를 쓰는 방법, 회식 때 분위기 흐리지 않을 적당한 대화 소재, TPO에 맞는 맛집 리스트 등등. 온몸으로 부딪히고 깨지면서 배운 지식들은 26년의 재직 기간 동안 꽤나 유용하게 활용되었고, 첨엔 어수룩했던 것이 점점 더 세련되게 다듬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직장만이 우리가 살아가는 유일한 세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퇴직하기 전에도 나는 가족과 친구들과 동호회와 학교와 스터디 모임 같은 다양한 그룹에 속해 있었고, 퇴직한 후에는 직장 이외의 다른 그룹들이 내게 훨씬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우리가 일생에 거쳐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흡사 어느 SF 시리즈에서 멀티유니버스를 종횡무진 여행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직장 유니버스에서 벗어나 프리랜서 유니버스, 그리고 방구석 유니버스를 유유히 여행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아직도 나는 직장인 방언과 직장에서만 통하는 특유한 지식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몇 달 전에 만났던 한 내담자는 35년 동안 대기업에서 근무하며 고위직 임원까지 승진하신 분이었다. 지금은 퇴직하여 회사가 아닌 교회와 가정이 주된 생활 무대가 되었다. 직장근무 시절에 그는 많은 직원들과 소통하며 일했다. 격무에 시달리다 보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들어줄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답답하네. 빨리 얘기해봐.” 이것이 그가 회사에서 가장 많이 했던 말이라고 한다. 논리적이고 빠르게 대화하는 방식이 오랫동안 몸에 밴 것이다. 문제는 퇴직한 후에 발생했다. 일상의 대부분을 같이 보내게 된 아내와 자녀들과의 대화는 직장에서 하는 대화와는 많이 달랐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논리도 부족하고 결론도 없이 중구난방인 그런 대화를 매일 하려니 속이 터지는 것 같았다.
“저는 원래 그런 방식으로 대화하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먼저 두괄식으로 결론부터 말하고 그 다음에 부연 설명을 하는 게 맞지 않나요? 이 얘기 했다 저 얘기 했다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요?”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가족들과 대화하기가 너무나 어렵다고 말했다. 직장 생활이라는 고립된 삶의 형태가 오랫동안 이어진 것이 그의 이런 면모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대화 방식은 직장 생활이 그에게 남겨준 유물임이 분명하다.
갈라파고스의 동물들은 고립된 환경에서 특정 조건에 맞춰 진화했다. 예를 들면 갈라파고스 동물들 중에서 ‘핀치’라는 새는 서식지와 먹이에 따라 다양한 부리 형태를 가지고 있다. 큰땅핀치는 단단한 씨앗을 깨기에 적합한 큰 부리를, 초록와블러핀치는 곤충을 잡기에 알맞은 가늘고 뾰족한 부리를 지니고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갈라파고스 핀치의 부리 형태는 특정 유전자(BMP4)의 발현 수준에 따라 결정되며, 이는 부리의 크기와 모양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또한, 환경 변화에 따라 부리 형태가 빠르게 진화할 수 있음이 관찰되었다.
만일 갈라파고스에서 서식하기 유리하도록 진화한 동물들이 그들의 터전을 벗어나게 된다면 생존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이미 자리 잡고 있는 토착 생물들과 먹이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할 것이며, 새로운 병원균이나 기생충에 면역이 없을 수도 있다. 때로는 새로운 환경에 끼어든 침입종이 되어 다른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악역을 맡게 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일부 개체는 생존하기 위해 새로운 특성을 발달시키는 진화의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어떤 개체는 근연종과 교배하여 유전적 변화를 겪을 수도 있다. 이러한 적응과 진화를 하지 않는 종은 서서히 개체수가 줄어들고 끝내는 멸종하게 될 것이다.
평생 직장에서 일한 사람들은 직장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긴 시간 동안 적응하고 변화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변화의 결과로, 갈라파고스의 핀치가 자신의 부리를 환경에 적응시킨 것처럼, 직장인들만의 태도, 습관, 기술, 지식 등 소프트 스킬을 발달시켰을 것이다. 이러한 소프트 스킬은 그 사람의 몸과 마음에 완전히 체화되어 마치 자신이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할 것이다. 소프트 스킬을 배우기 이전의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유년기 기억상실’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직장생활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결국, 직장에서만 통할 수 있는 낡은 유산과 유년기 기억상실이라는 정신적인 문제 뿐일지도 모르겠다. 막대한 유산을 받으면 행복할테지만, 이 유산은 직장이 아닌 다른 유니버스에서는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기분이 마냥 좋을 수 없다. 이 유산 때문에 가족과 말다툼이 생기고, 예상치 못한 때 핀잔을 받게 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우리는 적응을 해야 한다. 뜻하지 않게 칩입종이 되어 다른 유니버스의 토착 생물들을 위협해서는 안된다. 새로운 환경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 적응하고 진화하고 교배해서 유전자를 바꿔야 한다.
NLP(Neuro-Linguistic Programming) 상담은 인간의 사고, 언어, 행동 패턴을 분석하고 변화시키는 데 초점을 두는 상담 모델을 말한다. NLP 기법은 통해 개인의 내적 프로세스를 탐구하고, 부정적인 사고나 행동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중점을 둔다. 특히, “unlearn”이라는 기법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배우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학습한 제한적인 사고, 행동 패턴, 믿음, 혹은 습관 등을 의식적으로 해체하고, 이를 더 유익하거나 긍정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과정을 말한다. 직장 생활의 유물 때문에 퇴직 이후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적응하고 진화하는데 이 unlearn의 과정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퍼비전을 받기 잘했다. 내게 남아 있는 직장 생활의 낡은 유산을 하나 더 발견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내게 얼마만큼의 낡은 유산이 남아 있는지 짐작하기 힘들다. 그저 이렇게 부딪혀 가며 하나씩 알아차릴 수 밖에 없다. 어떤 유산은 새로운 환경에서도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유산은 버리고 바꾸고 적응시켜야 하는 대상이다. 그 과정 또한 나 자신을 알아가고, 더 좋은 나를 만들어가는 흥미로운 과정의 일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