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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들 Jan 04. 2024

로코코 미술 이해하기

삶을 심각하게 살 필요가 있는가?

로코코는 마치 이런 겁니다. 여러분은 학창 시절에 열심히 공부를 했고 그렇게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또한 서울대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를 했고 그렇게 좋은 직장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서울에 집도 하나 장만했고 부모님께 매달 용돈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열심히 살았고 이제 자기 삶을 안정된 궤도 위에 올려놓게 되었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어떤 허무를 느낍니다. 여러분은 분명 삶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앞만 보며 달려왔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학벌과 직장과 재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마음속에 어떤 공허가 감돕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난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걸까?”






이게 로코코 예술의 세계관입니다. 로코코는 귀족의 예술입니다. 이들은 17세기 과학혁명을 통해 엄청난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오죽했으면 “태초에 하나님이 뉴턴이 있으라 하시니…”라고 말했을까요? 태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게 아니라 뉴턴의 법칙이 있었습니다. 과학 혁명이 이룩한 성취는 지금 봐도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데 귀족들의 마음에 어떤 공허함이 싹틉니다.


“난 세상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런데 내 마음은 왜 이렇게 풍족하지 못할까? 분명 난 대단한 일을 성취했는데 내 삶은 왜 여전히 공허할까?”


이 성취 뒤의 공허함을 극복하기 위해 로코코는 이제 즐깁니다. 이는 마치 사회적 의무를 다한 중산층들이 와인, 자동차, 오디오, 인테리어, 명품, 애견 등에 돈과 시간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중산층은 살 만합니다. 더 이상 치열하고 힘겹게 세상과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서 돈 조금 더 번다고 해도 삶의 근본적 공허함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정도의 돈만 있어도 걱정 없이 살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심각하고 치열하게 사회에서 투쟁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는 소비활동을 하며 내 마음 속의 공허를 잊고 싶습니다.



이렇게 로코코 귀족들은 자기 삶을 가꿉니다. 연인과 살을 부대끼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예쁜 옷을 입고, 예쁜 집을 만들고, 예쁜 정부를 두는 것이 이제 삶의 전부입니다. 로코코 귀족들은 말합니다.


“아, 살아보니까 인생 그렇게 거창한 것 아니더라. 그냥 잘 먹고 잘 웃는 게 전부더라. 인생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 그냥 오늘은 섹스하고 내일은 맛있는 거 먹고 다음 날은 사냥을 하자. 우리는 이제 그럴 만한 재력이 있다. 예전처럼 심각하게 세상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말자. 과학 혁명으로 모든 게 끝났다. 내가 더 이상 뭘 이룰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뭘 더 이룬다고 한들 내 삶이 뭐가 달라지겠는가? 이제는 그냥 먹고 마시자. 그렇게 공허함을 잊자.”


이것이 로코코 미술이 나중에 혁명가들에게 엄청난 비판을 받는 이유입니다. 혁명가들은 예술이 인간 마음속에 있는 선을 끄집어내고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데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로코코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보여줍니다. 로코코 미술에는 어떤 정치적-사회적 의미도 없습니다. 단지 예쁘게 그리고 싶을 뿐입니다.



위 그림은 프라고나르의 <그네>입니다. 어떤가요? 이 그림은 가볍습니다. 다비드가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같은 비장함이나 심각함이 전혀 없습니다. <그네> 속 인물들은 그저 삶을 즐길 뿐입니다. 잘생긴 남자가 있고 예쁜 여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쁜 나무들이 있고 충분한 돈이 있습니다. 무엇을 더 바라나요? 삶에 이 이상의 것이 있을 수나 있나요? 이룰 것 다 이루었으니 이제 그냥 즐겁게 놀겠습니다.


물론 로코코는 어떤 슬픔도 보여줍니다. 인간은 인간인 이상 ‘단지 즐기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인간은 삶의 본질과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허무를 느끼며 괴로워합니다. 이런 허무, 괴로움을 잊기 위해 로코코는 즐기지만 마음 한 구석에 있는 허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와토나 랑그레의 그림은 예쁩니다. 그런데 어떤 슬픔이 있습니다. 어떤 공허가 있습니다.


로코코는 사회적 성취를 이룬 상승하는 중산층을 위한, 혹은 이제는 더 이상 예전처럼 권력을 가질 수 없는 귀족집안을 위한 예술입니다.






(제 브런치에 없는, 미술과 관련된 또 다른 글들을 읽고 싶으시다면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https://studiocroissant.com/painting-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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