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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Oct 09. 2019

서랍에서 감정을 꺼내 쓸 수 있다면

감정조절. 대인관계


여름휴가 중 비가 오던 날이 있었습니다. 비를 피해 들어간 카페의 전경이 고즈넉하니 좋았어요. 카페 입구는 여러 가지 물건들로 꾸며져 있었는데 눈길을 사로잡는 서랍장이 보이더군요. 그것을 보자마자 저의 과거가 소환되었습니다.  


서랍이 많았던 그 장은 옛날 약방의 약장이었어요. 작은 서랍이 층층이 칸칸이 있었지요. 방바닥에 굴러다니던 소소한 물건들을 집어넣어 보관하기에는 더없이 좋았습니다. 그중에는 제가 맡아 놓은 서랍도 여러 개 있었거든요. 제 머리핀이라든지, 머리끈, 열쇠고리 같은 걸 넣어 두기도 했죠. 그리고 서랍 깊숙이 쪽지도 넣어 두었어요.


사춘기 무렵 저는 화가 나거나 감정이 상했을 때, 친구와 갈등을 겪었을 때, 야단을 맞았을 때 등등 기분이 나쁠 때는 어김없이 쪽지를 썼습니다. 그 쪽지에 당시의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연필로 진하게 썼어요. 아주 화가 많이 날 때는 빨간색 색연필로 바탕을 막 칠했습니다.  


검은색 볼펜으로 쓰고 초록 색연필로 글자 위를 따라가면서 색칠을 하기도 했는데요. 그때는 기분이 좋은 날이었습니다. 기념하고 싶거나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글로 남겼는데도 아쉬웠었는지 초록 색연필로 글자를 덧칠했어요. 글자 위에 초록색 옷을 입힌다고 생각하며 칠했던 기억이 납니다.  내 마음이 기쁘다는 걸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춘천 라뜰리에 김가의 서랍장


카페의 서랍장 몇 개에는 작은 화분이 들어 있었어요. 반쯤 열린 서랍 사이로 초록색 이파리들이 고개 내밀고 있는 순간을 보자니 지난날의 쪽지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밖에 없더군요. 초록 이파리들은 기쁨의 쪽지이고, 닫힌 서랍들은 화남과 슬픔의 쪽지처럼 보입니다.


누군가는 약장을 보면 약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저는 저의 사춘기 들끓던 감정들이 떠오릅니다. 물건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그 용도에 따라서 기억이 추억으로 자리바꿈 하여 아주 오래도록 남을 수도 있다는 걸 이렇게 또 알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생각해 봅니다. '내 마음속에 저런 약장 하나 들여놓으면 좋겠다. 칸칸이 나의 감정을 세분해서 넣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현명하고 적절하게 꺼내 쓰면 좋겠다' 하고 말이지요. 오히려 사춘기 때는 약장 서랍에 쪽지를 넣는 것으로 감정을 조절해 나갔던 저였는데요.  어른이 되어 사회생활, 결혼 생활을 하면서는 그 조절이 쉽지 않은 순간들을 맞이합니다. 감정의 파고를 겪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감정의 손상은 '말'에서 비롯됨을 느끼죠. 그 옛날 사춘기 때 제 감정이 상한 데에는 어김없이 '마음을 후벼 파고 틀어쥐는 야속한 말'이 있었습니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모두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은 거친 말, 또는 배려 없는 말과 짝을 이뤄 등장하는 무례한 행동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만이라도 제대로 깎고 다듬어서 꺼내 놓을 수 있다면, 우리의  '감정의 서랍'이 붉은 색연필 칠한 쪽지로 가득 찰 일은 없을 겁니다.

말 한마디에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의 삶이 참여한다. 먼저 화자의 삶에 따라 말의 의미와 표현이 결정되고, 그것들은 또다시 청자의 삶을 고려해 조정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 없이 말은 탄생할 수 없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단순히 화술이 능수능란한 상태를 이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해 성숙해져 있고,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여 이해하며, 어떤 상황을 읽는 안목까지 갖춘 총체적인 상태를 이른다. 그리고 그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 '말공부'다.


<말의 내공> 중에서


나의 삶이 중요한 만큼 누군가의 삶도 그러하다는 걸 항상 기억하려 합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나름 주의를 기울이고 싶은 건 사춘기 시절부터 유난스럽게 감정의 변화를 많이 겪어 본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팠던 말과 행동은 타인에게 주고 싶지 않아요. 타인의 마음속 감정의 서랍에 저에 대한 기억이 빨갛게 칠해지는 걸 원치 않으니까요.


과거의 누군가가 제게 들려준 희망찬 메시지는 초록 옷을 덧입은 씨앗이 되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풍성한 이파리를 피워냅니다. 저를 키운 게 칭찬과 격려뿐은 아니었겠지요. 상처와 비난도 저를 돌아보게 만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 와 더 진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싱싱한 초록 이파리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속 나만의 서랍에 나를 기운 나게 만드는 말과 감정들을 차곡차곡 챙겨 담아 넣어 둡니다. 그렇게 챙겨 놓은 말과 감정들이 어느 날 문득 흔들리고 슬퍼하는 나를 위로해 주러 고개 내밀지 모르니까요.


지금의 나의 감정을 알아채고 잘 챙기는 것은 먼 훗날 나를 감당해 줄 감정을 잘 꺼내 쓰기 위함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나를 키우고, 나를 챙기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나'이어야 하니까요.  오늘도 저는 제 자신을 챙기는 말을 들려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날마다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어. 그거면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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