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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Sep 19. 2019

우리 아이 너무 늦된 것은 아닐까요?육아고민.

평균의 종말 


선생님, 이러다가 우리 애가 못 걷는 건 아닐까요?


딸아이 어릴 때 걸음이 늦다는 소리를 듣고 불안해하며 서울대학교 병원까지 업고 간 적이 있습니다. 당시 아이는 14-5개월이 되었는데도 걸을 생각을 별로 하지 않고 하루 종일 기어 다니기 바빴거든요. 친구네 집 아이는 9개월부터 걸어서 발톱이 빠지기까지 했다는 소리를 듣자 더 불안해졌습니다. 이러다가 우리 아이는 걷지도 못하고 평생 기어 다니는 것이 아닐까?


아이가 날마다 기어 다니다 보니 어찌나 빠르던지 걸어 다니는 저를 앞지르는 순간이 오더군요. 걸어서 아장아장 와야 할 아이가 익숙해진 네 발?로 빠르고 힘차게 기어와서 달려 들때는 조금 무섭기도 했어요. 호랑이가 다가 오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땐 철없는 엄마였어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말귀도 알아듣는 애를 안고 저는 의사선생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이러다가 우리 애가 평생 못 걸으면 어떡하나요?"

아마도 제가 그렇게 불안해했기 때문에 아이가 더 걷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토드 로즈가 말한 평균의 종말.  
따라야 할 평균 같은 건 없다.





토드 로즈는 ADHD로 고등학교 중퇴 후 뒤늦게 공부하여 하버드대학에서 학위 취득 후 교수로 재직 중인 발달 심리학자입니다. 어린 시절의 그는 평균의 잣대로 보면 너무나 뒤처진 사람이었지만 '평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속도에 맞춰 학업에 집중을 하자 빛나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평균'에 매이기 시작하면 문제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평균'에 딱 맞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1940년대 말 미국 공군에서는 전투기 사고가 자주 발생합니다. 원인으로 오래전에 조종사들의 평균 신체에 맞추어 설계된 조종석을 의심하게 되는 돼요. 그래서 현역 조종사 4063명의 평균 신체를 바탕으로 조종석을 만들기로 합니다. 평균 조종사의 수치와 대조해본 결과 4063명 중 단 한 명도 평균값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결국 평균값에 맞춰진 고정된 조종석 대신 누구의 몸에도 조절 가능한 맞춤형 조종석이 개발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 조종석이 지금 우리들이 타고 있는 자동차의 좌석이 된 셈입니다. 




지금 못 걷는다고
앞으로도 못 걸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
결국엔 걷는다.



토드 로즈가 쓴  <평균의 종말>에는 '평균'이라는 오래되고 고질적이며 잘못된 관념을 깰 다양한 사례들이 나와 있어요. 그중에서 '걷기'와 관련된 이야기가 당연히 제 눈에 띄었습니다. 걷기는 누구나가 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죠. 제가 15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를 들면 뒤집기, 배밀이, 기어 다니기의 과정을 거친 후 걷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캐런 아돌프라는 여성 과학자는 이처럼 걷기에 정상적인 경로가 있어야 마땅하다는 가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섭니다. 캐런 아돌프는 28명의 영유아를 대상으로 기어 다니기 전부터 걸음마를 떼는 날까지의 발달 과정을 추적 관찰하게 되는데요. 그 결과 기어 다니기에 정상적인 경로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기들은 무려 25가지의 다양한 경로를 따랐는데 각 경로마다 독자적 동작 패턴을 띠었고 모든 경로가 걷기로 발전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걷기 전에 기기 단계에서 '배밀이'를 필수라고 여기는 믿음이 있지만 실상 절반 가까이의 아기들은 배밀이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파푸아뉴기니에 사는 원주민인 오족의 아기들은 걷기 전 필수 단계로 여긴 기어 다니기를 하지 않는다고 해요. 대신 똑바로 앉아서 바닥에 엉덩이를 끌고 다닌답니다. 오족의 아기들의 발달 단계에서 '기어 다니기'가 생략되고 '엉덩이 끌기'라는 과정이 들어간 배경을 살펴보면요. 오족의 부모들은 아기들을 바닥에 엎드려 놓는 것을 꺼린다고 합니다. 아기가 오랜 시간 바닥에 접해 있을 경우 기생충에 감염되거나 치명적 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때문이죠. 





이렇듯 우리가 아기들의 발달 단계상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배밀이 과정'이나 '기어 다니기 과정'이 생략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런 과정을 거치지 못한 아기들은 걷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대부분의 아기들이 걷게 됩니다. 이것을 '등결과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등결과성이란 시간에 따른 변화를 수반하는 시스템은 예외 없이 A에서 B에 도달하기까지 다양한 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못 걷는 상태  A에서 걷는 상태 B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람에 따라서 수많은 걷기 방법을 통해 결국 걷게 되는 거죠. '걷는다'는 결과는 같습니다. 


단지 중간 과정상 개개인에 따라 '걷기'를 향한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 다양한 방법의 차이야말로 '개개인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죠. 저희 딸아이는 거짓말처럼 병원에 갔다 온 다음 날부터 걸었어요. 하루만 참았으면 될 일을 제 예민함이 빚은 촌극이었죠. 



개개인성을 존중하라.
평균 따윈 내다 버려라.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이 평균적 발달 경로를 따르지 않는다는 생각에 불안해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물론 비정상적인 발달 경로가 없지는 않기 때문에 의학적 조치가 제때에 개입되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평균'이라는 잣대로 개인의 상태를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발달의 사다리는 없다. 사다리라기보다는, 우리 각자가 저마다 발달의 그물망을 가지고 있다. 이는 각각의 새로운 단계마다 우리 자신의 개개인성에 따라 새로운 가능성이 온갖 다양한 형태로 펼쳐진다는 얘기다.    


<평균의 종말> 202쪽



인간의 발달에는 그것이 생물학적 발달이든 정신적 발달이든 또는 도덕적이거나 직업적 발달이든지 간에 단 하나의 정상적인 경로가 없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나요? 저는 안심이 되더군요. 


엄청나게 잘난 사람들이 정해놓은 유일무이한 방법을 따라보고자 애써 피곤할 필요도 없고요. 대다수가 참여한다는 평균적이고 정상적인 경로를 따르지 않는다고 저를 외계인 취급하지도 않으려 합니다. 그냥 저는 저 개인. 저라는 고유한 사람으로서 제 방식대로 살며 제 삶의 테두리 안에서 조금씩 발전하는 방향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사이 여기저기 발 벗고 헤매다니고 벽에 부딪히며 멍들다 보니 그 사이 엄마인 저도 조금씩 자란 것 같습니다. 15년 전 초보 엄마의 미숙함을 버리고 '평균'은 없다는 것을 믿으며 저마다의 '개개인성'을 인정할 만큼. 

딱 그만큼은 자란 모양이에요. 참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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