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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Nov 07. 2019

새벽에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올해 6월부터 새벽 기상을 시작해서 5개월이 넘었습니다. 낮잠을 자는 한이 있어도 새벽 5시 전에 날마다 기상을 했어요. 6시를 넘겨 일어난 날은 한 두어 번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새벽 기상의 장점은 하루가 일찍 시작된다는 것. 독서와 글쓰기 등 집중이 필요한 일을 잘할 수 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반면에 늦은 밤까지 깨 있으면서 가질 수 있었던 느낌들은 많이 사라진 것 같아요.


예전에 새벽 2-3시까지 잠 못 들고 깨어 있을 때는요. 주변이 다 조용하니까 귀가 예민해집니다. 식탁에 앉아서 잘 넘어가지도 않는 책만 펼쳐 놓고 있는데 무슨 소리가 들려와요. 아득하면서도 미세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겁니다. 처음에는 벌레가 기어 다니는 건가 해서 집안의 불을 모두 켜고 주방 바닥을 살펴보기도 했어요.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도 모르겠는데 귀에는 계속 들려오는 소리.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헤매도 소리의 근원지를 찾지 못해서 불을 꺼버렸죠. 식탁 위 스탠드만 밝혀 놓은 채 다시 앉아 있었는데요. 소리는 계속 났습니다.  


결국 두 팔 걷어 부치고 소리의 정체를 찾아 나섰어요. 무섭기도 했지만 '그 소리'를 무시하고 잠드는 게 더 무섭겠더라고요. 집안에 가족 외에 다른 생명체인 벌레들이 기어 다니게 놔둘 수는 없었으니까요. 저는 그 자잘하고 자그락대는 소리를 내는 것들이 벌레일 거라는 확신을 가졌었는데요. 아니었어요.




그 소리는...

바로 씻어 놓은 쌀 바가지에서 나고 있었습니다.


뒷날 아침밥을 하려고 쌀을 미리 씻어 물을 부어 놓았는데요. 쌀이 물속에서 불어가며 내는 소리였던 겁니다.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된 다음에 벌레가 아니라 안심을 했지만요. 그날 바가지 안 물속에서 불어가던 쌀들이 내는 소리가 굉장히 구슬프게 들렸어요.


쌀들이 우네. 쌀들도 우는구나. 나도 울고 싶다. 같이 울자....  그렇게 감정이 흘러가더라고요.



몇 달 전에 시집을 봤습니다.

고영민 시인의 <공손한 손>이라는 시집이에요. 거기에 제가 느낀 그 순간의 감정이 그대로 나와있어서 반가웠어요.  




쌀이 울 때


-고영민


마른 저녁 길을 걸어와

천천히 옷 벗어 벽에 걸어두고

쌀통에서

한 줌,

꼭 혼자 먹을 만큼의

쌀을 퍼

물에 담가놓으면

아느작, 아느작

쌀이 물먹는 소리

어머니는 그 소리를 쌀이 운다고 했다



시인이 표현한 쌀이 우는소리.

아느작 아느작.


쌀이 우는소리를 들으며 시인은 시를 지었고요.

쌀이 우는소리를 들으며 저는 그 새벽에 조용히 같이 따라 울었어요.


새벽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룰 때는요. 이런저런 많은 생각과 감정이 넘쳐흘렀습니다. 새벽 기상의 습관화로 일찍 일어나게 된 지금은요. 흘러넘치는 감정보다는 집중하는 힘이 더 키워지는 것 같습니다.


당분간은 새벽 기상이 좋아서 이 생활을 유지하겠지만요. 어느 날 문득 새벽 2-3시의 나 혼자만의 감성을 찾고 싶을 때는 언제든 그때로 돌아갈는지도 모르겠어요.


'세상에 이것 아니면 안 돼.' 하는 절대적인 뭔가를 정해 놓고 살고 싶지는 않아요. 왜 이랬다 저랬다 변덕을 부리냐고 누가 흉을 보더라도요. 이렇게도 살아보고 저렇게도 살아 보며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하루를 생산성 있게 시작하는 새벽 기상도 사랑하지만요. 쌀이 우는소리를 듣고 같이 울 수 있었던 그 새벽의 깨어있음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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