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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Sep 18. 2019

 40대 마흔,
마음이 흔들려도 되는 나이

생산자를 꿈꾸는 40대를 위해

40대에 접어들었다고요?  
원래 고민 많아지는 시기 아니었던가요.





이십 대나 삼십 대 시절에는 '나이 든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 해 두 해 지나 나이를 먹는다고 해도 외형상 티가 날 정도의 '늙음'을 실감하지 못할 때가 바로 그 연령대이기도 했으니까요.


젊은 시절의 저는 젊은 게 너무도 당연하여 '나이 듦'에 대한 고민과 '나이 든 자신'에 대한 상상을 전혀 해보지 않았어요. 서른아홉을 지나 마흔 살이 되던 해에야 비로소 주춤하며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되었죠.


'마흔'은 스물, 서른과 달랐어요. '마흔'이라는 단어는 어감에서부터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공자는 40세를 무엇에도 정신을 빼앗기지 않기에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불혹 (不惑)'이라 했지만, 그건 공자님 말씀일 뿐이라 여기고 저 멀리 밀쳐놓았습니다. 불안해하는 건 저의 특권인 양 행동했었지요.


마음을 달래 보려 여러 공부 모임에도 참여했어요. 스스로를 바짝 채근하던 시기를 거치다 보니 어느 정도의 불안감이 해소되는 듯도 하였습니다. 제가 원하는 방향의 인생으로 제 자신을 이끌고 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도 빠져 봤어요. 날마다의 새로운 다짐은 당시 저의 특기였습니다.


다짐은 다짐일 뿐이던가요?! 인생은 '미리 보기'가 허용되지 않죠. '정확한 예측도 불가'입니다. 숱한 다짐이 실현되기는커녕 한꺼번에 끝나고 마는 순간들이 눈앞에서 휙휙 지나갔어요.


크고 작은 인생의 고비들이 제 삶을 휘청이게 만들었고 그때마다 저는 온갖 변명을 댔지요. '사람 때문에, 상황 때문에, 환경 때문에 내가 어떻게 날 위해 온전히 시간을 낼 수 있겠어?' 저 스스로를 위해 준비했던 시간을 제 삶에서 가장 먼저 도려냈습니다. 불안하고 일이 안 풀리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나, 보살피기'를 그만둬 버렸어요.


누군가를 원망하기 위해 '나 자신'을 구석으로 쫓아 벌세워 버렸던 어리석은 순간들이었죠내가 이루지 못한 일들을 전부 나를 제외한 주변의 탓으로 돌리며 불만과 불안으로 40대의 순간순간들을 뭉텅뭉텅 소비해 버렸습니다.


스스로가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면 자책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누가 그러든가요? 저는 현명하지 못해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고요. 어리석어서 누구의 말에도 쉽사리 흔들렸어요.


당시의 저는 인생이란 배 안에서 극심한 뱃멀미를 하고 있었습니다. 뱃멀미를 멈출 수만 있다면 배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겠다고 여겨질 정도로 고통스러웠어요.




아들러는 말하지.
감점법이 아니라 가점법으로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기시미 이치로의 책 <마흔에게>를 통해 사십 대의 저는 전적으로 '뺄셈 사고'(감점법)를 하며 제 자신의 '생산성'에만 초점을 맞추며 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쟤보다 못했으니 -1. 내가 원하던 걸 이루지 못했으니 -1. 계획대로 실천 못했으니 -1 ....'

온통 스스로에게 감점만을 주는 삶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를 점수 매기러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닌데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매정할 정도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죠. 저 역시 오랜 시간 그랬기에 힘겨웠습니다.


아들러 심리학의 전문가답게 기시미 이치로는 우리에게 '타자' 혹은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과 경쟁하거나 승부 낼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직 '지금의 자신'보다 나아지기 위한 노력이야말로 '건전한 노력'이라 고 말하죠.


아들러가 말하는 '건전한 우월성의 추구'에는 이상적인 모습에서 하나씩 지워나가는 감점법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 올린 것을 하나씩 더해가는 가점법으로 평가하는 눈이 필요합니다.  


<마흔에게 > 43쪽





나이 들면서 이전처럼 활동하지 못한다고 실망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생산성' 에만 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생산성'에서 찾지 않게 되면 어떤 상황이 와도 스스로가 가치 없다고 여기지 않는다고 해요. 무언가 생산하지 못했다고 가치 없는 게 아니라, 우리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갓난아기의 웃음에 부모가 행복해하고, 아픈 부모의 살아있음에 감사해하는 자식 입장에서 생각해 볼까요? 그들에게는 갓난아기와 아픈 부모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만으로 가치 있는 것이죠. 


갓난아기와 아픈 부모는 충분히 그 가족들(타자)에게 공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러가 말하는 그 유명한 '타자 공헌'입니다.


'나는 무언가를 해내서 소중한 게 아니라. 그저 '나'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시간과 인생의 길이는 문제가 아니야.
춤추듯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면 되는 거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을 보는 관점을 '키네시스'와 '에네르게이아'로 나누어 언급을 합니다. 


젊은 시기를 인생의 시작점으로, 늙은 시기를 인생의 종착점으로 규정짓고 시간과 인생이 끝을 향해가는 움직임으로만 보는 것을 '키네시스'라 불렀습니다. 키네시스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무슨 일이든 빠르고 효율적으로 완수해 내는 것이 중요하게 되죠. 중단되거나 방향이 틀어지는 것은 불완전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 겁니다.


반면 어딘가에 도달하지 않더라도 그 과정의 한순간 한순간이 완전하며 완성된 것이라고 보는 '에네르게이아'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에네르게이아'는 '이루고 있는 것'이 전부이며, 그것이 그대로 '이룬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시간이나 인생의 길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 거죠.



에네르게이아를 비유하자면 춤입니다. 춤출 때는 순간순간이 즐겁습니다. 도중에 멈추더라도 괜찮습니다. 춤이란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추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살아 있는 '지금, 여기'가 그 자체로 완성된 에네르게이아입니다. 에네르게이아의 관점으로 살아간다면 남은 인생을 생각하며 우울해하거나 암담한 기분이 되지 않을 겁니다.


<마흔에게>  86쪽




마흔의 시기를 지난 저를 어느 누구도 젊다고 부르지는 않을 테지만 이전보다 덜 불안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동안 많이 겪어냈기에 생겨난 '삶의 굳은살' 덕도 있겠지만 다른 무엇보다 현재의 제가 '지금'을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과거로의 회귀도. 성급한 미래에 대한 추측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건 저를 위한 게 아니니까요. 스스로를 위한다면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내어 즐겁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하며 완성된 것, '에네르게이아'라는 것을 이젠 압니다. 우리 모두 후회와 불안으로 오늘을 망치는 시행착오는 넘치도록 하지 않았나요?!


마음 흔들리면서도 '지금, 여기'에서 신나게 살아 보는 것. 스스로에게 가족들에게 1점씩 부여하면서 오늘을 '가점의 날'로 만들어 보는 것. 


인생, 그렇게 살면 그 자체만으로도 멋스럽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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