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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Nov 09. 2019

키오스크를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들

혼자 공부하는 훈련기, 블랭크


2년 전쯤 친구를 만나러 압구정동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약속 시간보다 너무 일찍 도착을 하는 바람에 맥도널드에 들렀어요. 그때만 해도 달달한 것들을 입에 달고 살 때였거든요. 갓 튀겨낸 애플파이랑 커피 한 잔을 마시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점심시간이 다가와서인지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았는데 카운터에 갔더니 주문을 안 받는 거예요. 점원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봤더니 자동 주문기가 있더군요. 요즘 이야기하는 무인 자동화 시스템 '키오스크'라는 것이었죠.


제 키 보다 더 큰 기계에 스크린이 떠 있고 메뉴를 선택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햄버거를 먹을 게 아니었기 때문에 디저트류에서 커피를 선택하고 나서 원하는 애플파이를 찾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애플파이가 안 보이는 거예요.


몇 번을 계속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며 처음 화면부터 다시 메뉴를 고른다고 헤맸더니 뒤에 있는 누군가가 가방 지퍼를 거칠게 여닫으며 바쁜 내색을 하더군요. 그  소리가 '아줌마, 기계 작동할 줄 모르면 먹지 마!'로 들렸어요. 결국 저는 좋아하지도 않는 아메리카노만 주문을 하고 물러나야 했죠.


처음 보는 낯선 기계, 제 뒤로 주문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 그들 중 누군가의 성마른 행동들이 절 하염없이 작아지게 만들더군요. 애플파이라도 하나 먹을 수 있었으면 덜 짜증 났을 텐데 그 눈치를 받고도 정작 먹고 싶은 애플파이 하나 못 먹어서 더 속상했었어요.



'도대체 저런 기계는 왜 들여놓은 거야??? 누구 좋으라고????'

그로부터 2년 가까이 흘러서 이제는 웬만한 곳에서는 전부 무인 자동화 시스템, 키오스크를 볼 수 있어요. 영화관, 패스트푸드점, 병원, 음식점 등등 키오스크가 광범위하게 퍼져있지요.


저는 그 사이 나름 익숙해져서요. 이제는 주문 못해서 못 먹는 음식은 없거든요. 다 주문해서 먹을 수 있고요. 잘 모르겠으면 뒷사람들 중에 착하게 생긴 사람한테 조금 도와달라고 부탁도 해요. 그래서 이전처럼 키오스크를 원망하지 않아요.


그런데 연세 드신 분들은 아직도 '키오스크'주문이 어렵기만 하신 거예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스크린의 글씨도 잘 안 보이고 카드 넣는 투입구에 카드 넣기도 여의치 않죠. 노인분들께는 온기 없고 까다로운 키오스크보다는 사람이 직접 주문받고 음료나 음식을 내어주는 시스템이 여러모로 훨씬 반갑게 느껴지겠지만 이젠 점점 환경이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기계 작동이 불편하고 눈치 주는 젊은이들이 원망스러운 노인들의 심정도 이해가 갑니다. 55세 이상의 디지털 정보화 수준이 일반인 대비 63% 정도라고 하더군요. 10명 중 4명은 디지털 기기에 대한 적응도가 떨어진다는 겁니다.


젊은 사람들이 '키오스크'를 선호하는 이유를 전해 들었는데요. '모르는 사람인 점원과 말을 섞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더군요. 낯선 사람과의 대화를 꺼리는 젊은이들의 취향에 '키오스크'는 딱 맞는 맞춤형 주문 기계인 거죠.


노인들과 젊은 사람들의 '키오스크'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이렇게 큽니다. 누구는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가 싫을 때 또 다른 누구는 공개된 장소에서 낯선 디지털 기기 오작동으로 인한 창피함을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 싫음의 이유가 다른 것처럼 보여도 결국 '나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내가 방해받는 느낌, 내가 무기력하게 창피당하는 느낌으로 말입니다. 방해받는 느낌이야 그 순간을 피해버리면 그만이지만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기분은 벗어나기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노인들이 정복해야 할 디지털 문명은 '키오스크'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스마트폰의 앱도 사용할 줄 알아야죠. 택시도 부르고 은행 업무도 보고 물건도 주문하고... 이 모든 것을 새롭게 배워야 하는 노년층의 입장에서는 '디지털 문맹자'같다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키오스크 한대 가격이 200만 원이 넘는데도 각 영업점들마다 도입을 서두르는 이유는 인건비 상승에서 기인했다고 합니다. 최저 임금 상승으로 인한 업주들의 부담감은  아르바이트생을 대체할 키오스크 구입 설치로 이어지고 있는 거죠.


영업이익을 고민해야 하는 가게 주인, 갑작스럽게 해고당하는 아르바이트생, 타인과 대화는 싫지만 신속한 것을 좋아하는 젊은이들, 디지털 래그(디지털 시대에 뒤떨어지는 현상)를 겪고 있는 노인들까지. 사람들과 그들의 입장에 따라서 '키오스크' 한 대를 바라보는 시선도 제각각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디지털 기술 적용 범위의 확대는 갈수록 가속화될 것이고요. 그로 인해 스마트 기기 사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실생활에서 오는 여러 불편 사항들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평생교육과정 등을 통해서 꾸준히 실습할 수 있는 환경도 마련되어야겠고요. 노인분들이 지치지 않고 배우고 익히는 지혜를 발휘하셔서 마음껏 '키오스크'를 활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래는 <나이 듦 수업>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나이 들수록 자기 자신이 추구하고 몰두하는 세계가 있는 사람들은 외로워하지도 않고 남을 괴롭히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이듦과 배움은 세트로 움직여야 하나 봐요. 제 스스로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라서 늘 명심하려고 합니다.



'나는 어떤 세계에 있는 어떤 존재이며 그래서 나는 어떤 자세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이 답을 제대로 찾는다면 그것이 지혜가 되죠. '블랭크'란 무엇이냐, 혼자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훈련기인 거죠. 스승이 없어요. 그러나 공부는 하고 싶고, 그래서 자기 혼자 공부한다는 것, 다시 말하면 '내 안에 스승을 모시는' 방법을 체득하는 기회가 된 거예요. 어느 정도 공부가 된 상태에서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않고 스스로 정리해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거죠.

이 엄청난 지적 업적을 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혼자 자기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노년을 맞이하신 분들은 다 지금 이 기회를 가지신 분들이에요.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혼자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나이듦 수업>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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