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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Sep 21. 2019

파리 개선문에서 배운 '거리두기'의 진실


아주 오래전 대학생 때 프랑스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핸드폰은 당연히 없었기 때문에 여행 내내 필름 카메라에 의지해 사진을 찍었어야 했어요. 필름 한 통에 24장짜리와 36장짜리가 있었는데요. 당연히 더 많이 찍으려고 36장짜리 십여 통을 사 가지고 출국을 했지요. '살면서 내가 프랑스에 올 일이 또 있겠어?' 하면서 말입니다. 


프랑스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특히나 파리에서 기념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사진이 어떻게 나왔을지 여행 내내 궁금했지만 별 수 없었죠. 귀국할 때까지 꾹 참을 수밖에요. 


우리나라에 오자마자 필름을 맡긴 후 며칠이 지나 사진을 보게 되었어요. 대체로 다 엉망이었답니다. 요즘처럼 디지털카메라나 핸드폰을 이용했다면 화면을 보고 마음에 안 드는 장면을 삭제하고 다시 찍었겠지만 당시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거든요. 찍으면 찍는 대로 잘 찍혔겠거니 생각하며 믿을 도리밖에 없었죠. 그러고 나서는 연이어 다음 장소로 이동만 할 뿐이었어요. 



가장 황당했던 사진은 개선문 앞에서 찍은 것이었는데요. 개선문이 실제로 보면 굉장히 크거든요. 그냥 문이라고 생각하고 갔다가 어마어마한 건물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가로 세로 거의 50미터에 달하는 이 건축물은 근처의 관광객들을 전부 개미처럼 보이게 할 정도였죠. 


개미 같던 우리들은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치켜들기도 하면서 열심히 구경을 했었습니다. 분명 다른 관광객들처럼 사진도 찍었는데 귀국해서 현상한 사진에서는 개선문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사진마다 전부 정체모를 담벼락 앞에서 폼 잡고 있는 친구들 모습뿐이었어요. 




'사진을 뭐 이렇게 찍었냐???'

'개선문은 대체 왜 없는 건데??'

'이거 찍은 사람 누구였지???' 

하며 친구들끼리 번갈아 원망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담벼락 사진이 개선문 앞에서 찍은 거라는 건 우리들만 아는 비밀이었죠. ᅠ




그로부터 또 6-7년이 지나 프랑스에 가게 되었어요.  못 갈 줄 알았던 프랑스였는데 다시 가게 되니 '비련의 담벼락, 개선문'이 떠오르더라고요. 이번에는 기필코 기막힌 사진 한 장을 건지고야 말겠다고 벼르며 개선문으로 향했어요. 


그런데 일행 중 한 사람이 개선문 쪽으로 가지 않고 아주 멀찍이 떨어진 길로 사람들을 안내하더라고요. 영문도 모른 채 투덜대며 그 사람에게 이끌려 한참 먼 곳까지 걸어갔어요.  그러고 나서 개선문을  바라보았어요. 비로소 한눈에 전체 개선문의 외관이 다 보였습니다.  




그제야 저는 깨달았어요. 어떠한 것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바짝 붙은 지점, 곁에서는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죠. 20대 초반의 저는 같은 개선문을 보고도 담벼락의 일부만을 볼 수 있었는데 30대로 들어선 저는 온전한 개선문을 한눈에 볼 수 있었어요. ᅠ


개선문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 도로를  지나 달리는 차를 넘어 멈춰 선 그곳. 거기에서 저는 일정 수준의 거리를 반드시 두어야만 사물이든, 사람이든 그들의 실체를 온전히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그리고 돌아왔어요. 


그 후 20년 가까이 저는 때론 거리두기에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하며 살아왔지만 언제나 머릿속에는 그때의 깨달음이 있었어요. 너무 가까이 있으면 모든 것이 들러붙어서 형태가 이지러져 보일 수 있다고. 그러니 적당한 간격 유지, 거리 두기는 온전한 형태를 지키기 위한 최선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깨달은 것'을 항상 실천하지 못한다고 해서 '깨달음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시행착오를 겪으며 사람은 성장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저희 집 식탁은 주방 벽면 앞에 몇 년째 그대로 있었어요. 식탁으로서의 용도보다는 딸아이와 앉아서 컴퓨터를 하거나 책을 읽는 용도로 사용했었지요. 


몇 달 전  문득 '우리는 날마다 벽 앞에만 앉아 있었다'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면벽 수도' 도 아닌데. 내가 무슨 벽보고 수행할 정도나 되나? 싶었죠.  그전까지 신경도 쓰지 않았던 벽이 갑자기 너무 답답하게 다가오더라고요. ᅠ


그래서 어느 날 오후.  혼자서 식탁을 낑낑대고 끌어다가 거실 유리창 앞으로 옮겼어요. 그랬더니 보이지 않던 바깥세상이 창문 너머로 성큼 다가왔어요.  멀리 바다도 보였죠. 몇 년째 살던 집에서 그제야 비로소 새로운 세상 하나를 발견해 낸 거예요. 변하고 싶다는 제 욕구가 만들어낸 새 세상이었어요.


새벽 기상을 하면  그 식탁에 앉아 밖을 바라볼 때가 있어요. 어느 날은 주책맞게 눈물이 흐를 때도 있죠. 나이 들어서 그냥 흘러내리는 눈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노안 때문에 나는 눈물이라고도 믿지 않을 거고요. 저는 여태까지 보다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노력하는 중이니까 감수성도 계속 자라고 있다고 여기려고요. 저는 저를 키우는 일을 멈추지 않으려 해요.





또 하나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날마다 살피고  관심 갖지 않으면  '기존의 것들이 변형되어도 모를 수 있겠구나' 하는 사실이었죠.  


저희 집 식탁의 좌 우가 3센티나 차이 날 정도로 기울어져 있더군요. 주방에 있을 때는 식탁이 기울어져 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벽 앞에 딱 붙어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거실 창가로 식탁을 옮겨 멀리서 바라보니 기울어짐이 한눈에 보였어요. 


원인도 알아냈죠. 오랜 시간 과도하게 쌓아 올려놓았던 책들의 무게를 식탁이 견뎌내지 못했던 거예요. 많은 책들을 식탁에서 내리고 당장 볼 책 한 두 권만 올려놓기로 했어요. '거리두기'를 하지 않았다면 저희 집 식탁은 무거운 책들로 인해 오늘도 한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기울어졌을 겁니다. 


삶도 그래요. 어느 한쪽으로의 과도한 치우침이 없으려면 자주 들여다보고, 띄엄띄엄 보기도 하고, 가끔은 멀찍이 떨어져 보기도 해야 할 것 같아요. 제대로 보아내려면 그 방법뿐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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