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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Sep 29. 2019

팬심이 밥을 먹여줄까요?

나는 네가 정말 좋다


저희 집 베란다에서 밖을 내다보면 저 멀리 바다가 보입니다. 바다 건너기 전에 보이는 빈 땅이 바로 세브란스 병원이 들어오는 자리거든요. 밤이나 새벽에는 어두워서 빈 땅의 정체가 잘 안 보입니다. 낮에 보면 허옇게 빈 땅의 정체가 드러나는데요. 평일에는 공터지만, 토요일이나 일요일만 되면 점점이 사람의 실루엣이 보입니다.  



저희 집 앞에 연세대 송도 캠퍼스가 있는데요. 이 빈 땅은 연세대 것으로 세브란스 병원 착공 전까지 야구 동호회에게 임대를 주고 있나 봐요. 주말마다 야구를 하러 어디에선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한쪽에 차량들이 쪼르륵 줄 서 있고 사람들은 빈 땅에서 야구를 하죠.


저희 아파트 입주민들 중 몇몇 분들은 주말마다 공터 야구장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생활을 방해한다고 싫어하시기도 합니다. 공터 야구장 바로 옆 동의 아래층일 경우, 소음의 피해가 좀 있을 것 같기도 해요. 저는 바로 위층에서 내는 심한 층간 소음만 아니라면 주변 생활 소음 정도는 참는 편입니다. 생각해 보면 주말 서너 시간만 운영되는 공터 야구장이니까요.




3년 넘게 지켜본 결과, 이 야구 동호회는 거의 불멸 수준입니다. 주말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에 와서 야구를 하거든요. 비가 내리지 않는 한 예외 없이 야구는 지속됩니다. 그 얘기는 곧 펄펄 끓는 날씨에도 야구를 한다는 소리죠.  이번 여름 폭염 속에서도 그들은 저렇게 야구를 했습니다. 가만있어도 숨 막히는 더위에 뛰어다닙니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뭘까?' 매주 창문 밖의 그들을 보며 생각해요. 동네 야구 동호회이니 돈을 버는 일과도 상관없을 텐데 말이죠. '도대체 무슨 힘이 그들을 한 여름의 펄펄 끓는 공터에 모이게 하는 걸까?' 궁금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팬심'이라는 것 밖에는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더라고요.'재미를 바탕으로 한 팬심.'

'팬심'이라는 신조어의 사전적 정의는 운동 경기나 선수 또는 연극, 영화, 음악 따위나 배우, 가수 등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어떤 대상에 푹 빠지려면 그것을 미치도록 좋아하지 않고는 불가능하죠. 저는 집 앞 야구 동호회 분들에게서 야구를 향한 팬심을 봅니다. 그분들에게 평일은 주말 공터 야구를 기다리면서 설레는 나날이지 않을까요? 폭염이든 추위든 절대 상관 않는 그분들에게 주말 야구를 향한 팬심은 아마도 일상을 살아내게 하는 원동력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창문 너머의 주말 야구 동호회 분들을 볼 때마다 '나의 팬심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그토록 미치게 좋아해 본 적 있었는가?' 묻게 됩니다. 


몇 달 전. 딸아이가 좋아하는 웹툰 작가 루시드 님의 이벤트가 있었어요. 만화책과 관련 상품을 선물로 준다고 하더군요.  자신이 뽑혀야만 하는 이유를 써서 아이가 응모를 했나 봐요. 정주행을 두 번씩 했다는 내용을 보아하니 엄청 좋아하는 웹툰 작가님이 분명하죠. 아래는 딸아이가 쓴 이벤트 참여 내용인데요. 저한테도 한 번 보라고 문자로 보내주더라고요.  



그러면서 자기가 이벤트에 당첨될지 안될지를 저더러 점쳐 보라는 거예요. 저는 잘하면 될 것 같다고 말은 해주었죠. 그 말이 제 입에서 안 나오면 나올 때까지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는 걸 아니까요. 귀찮아서라도 딸아이가 원하는 쪽 대답을 들려줘야 했습니다.


하지만 안될 거라고 짐작은 했어요. 이런 이벤트를 하는 이유는  SNS를 가지고 있는 참여자들이 입소문을 내주는 '공유'를 전제로 하잖아요. 저희 딸아이는 17세인데 SNS가 없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거든요. 이벤트 참여를 하고 싶어서 바로 당일 인스타그램을  급조하더라고요. 귀찮음을 무릅쓰고요. 그 모습을 보고 알았죠.

'네가 루시드 웹툰 작가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딸아이는 이벤트에 당첨될 거라고 너무 기대하고 있는데 SNS를 활용한 홍보 마케팅의 진실을 알려주며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며칠을 거의 당첨자의 마인드로 딸아이가 즐겁게 생활하더라고요. 발표날 아침부터 홈페이지를 들락날락하더니 오후 6시 바로 직전 결과를 알게 되었어요. 떨어졌어요. 딸아이 말로는 자기보다 말도 안 되게 짧게 소감문을 쓴 사람도 붙었다는 거예요. 당연하죠. 그 사람은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가 어느 정도 되니까요. 아이의 실망감이 무척이나 크더라고요.


돈을 줄테니까 만화책을 사라고 했죠. 그랬더니 싫다더군요. 그럴 줄 알았어요. 딸아이는 최근 3-4개월간 구두쇠의 화신이 씌었는지 돈을 한 푼도 안 쓰려고 했거든요. 밖에서 목이 말라도 생수 사 먹는 게 아까워서 참고 집으로 뛰어오는 아이였어요. 물을 한 사발씩 들이켜면서도 돈을 안 쓰더라고요. 그렇게 구두쇠니까 비싼 만화책을 살 리가 없죠. 특히나 이벤트까지 떨어졌으면 기분 나빠서라도 더더욱 안 살 거라는 걸 알고는 있었어요.


그런데요. 그로부터 며칠 후. 긴긴 고민의 시간이 끝나고 구두쇠가 저에게 묻더라고요.

"인터넷으로 사면 얼마큼 싸게 해 주는데?"

엄청 싸다고 속여서 아이에게 만화책을 사주었습니다.


웹툰작가 루시드님의 <크리스마스트 쨈과 함께>입니다. 


구두쇠 딸아이가 공짜로 받을 수 있는 이벤트에 탈락하고도 엄마 돈 3만 원을 들여서라도 꼭 가지고 싶었던 만화책. 저는 이런 게 '팬심'이라고 생각해요.


저희 큰언니는 15세에 좋아하던 가수 조용필을 40년간 좋아합니다. 서울에서 콘서트, 디너쇼가 열리면 아무리 비싸도, 아무리 비가 와도 가거든요. 가면서 팔순 넘은 친정엄마를 모시고 다녀요. 저희 엄마는 귀찮아하시면서도 딸이 좋아하는 가수를 같이 보러 다녀 줍니다. 딸의 팬심이 40년간 지속되는 데에는 엄마의 인내도 있었어요. 공부 안 하고 정성 들여 엽서를 수십 통씩 라디오 방송에 보낼 때도 언니의 소녀 감성을 응원해 주었거든요.  


폭염 속에서도 공터를 뛰어다니게 만들고, 구두쇠의 지갑도 기꺼이 열게 하고, 중년과 노년의 모녀가 콘서트 장을 찾게 하는 힘.  이게 바로 팬심이죠. 무엇인가를 향한, 누군가를 향한 꺼지지 않는 관심과 응원이 우리의 오늘을 조금 더 풍성하게 키우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네가 좋다. 그래서 네가 하는 그 어떤 일도 다 좋다' 이런 마음. 참 귀하지 않나요? 

그러나 한 가지 주의사항이 있는데요. 팬심은 무릇 본인에게만 머무르지 않고요. 자꾸 주변을 물들인다는 데에 약간의 부작용이 따릅니다.


딸아이가 <크리스마스는 쨈과 함께>를 저와 남편에게도 읽으라고 강요하거든요. 남편은 날마다 너무 시달리니까 돋보기를 낀 채 3권까지 다 읽었어요. 저도 1권은 읽었는데요. 결국 3권까지 다 읽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팬심을 불러일으키는 유일한 존재인 제 딸아이가 부탁하는 일이잖아요. 딸아이가 원하는 그 일을 해주기 위해 이제 만화책 일독으로 넘어가려 합니다.


나의 팬심으로 나를 더욱 풍성하게 키울 일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면 재미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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