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기언 Oct 29. 2022

결혼해서 정말 다행이야

마흔셋, 책방 알바생입니다만

- 40, 42, 43


업무 중 컴퓨터 화면 오른 하단으로 쑤욱 올라온 쪽지에는 알 수 없는 숫자가 세 개 박혀있었다.


- 뭐냐? 이번 주 로또번호면 나머지 세 개도 알려줘야지-.-


대수롭지 않게 가볍게 답을 해주고 쪽지창을 클릭해서 지웠다.

오전에 부장님께 보고해야 할 보고서를 작성 중인데 분위기가 어수선해서 부장님이 찾기 전에 먼저 제출해야 혼이 덜 날 것 같다는 것쯤은 10년 사회생활 짬바로 채운 눈치력이다.


- 이번 주 소개팅남들 나이. 내 나이가 몇인데 이런 노땅들을 한꺼번에 나한테 몰아주는 나쁜 년놈들부터 처단해야겠어!


다시 올라온 쪽지에는 분노에 이글거리는 캐릭터와 함께 아침에 나와 수다 한 판 떨어야 업무에 돌입하겠다는 의지가 결연한 내용이 또 한 가득이었다.

슬쩍 부장님 자리를 보니 경영지원실에서 온 전화를 받고는 급히 어딘가로 가려는 듯 벗어놓은 상의를 다시 입고 있었다.

인사이동 시즌을 앞두고 회사는 총성 없는 전쟁터처럼 이리저리 아군과 적군이 포진해 있었고 불모로 잡힌 일 잘하는 포로는 각종 조건을 내건 상대방에 맞트레이드될 운명에 처해있거나, 끝까지 이놈은 우리 편에서 놔주지 않겠다며 항거하는 움직임이 휘장막 뒤에서 빈번히 있었다.

나 같은 아줌마이자 육아휴직을 앞둔 잉여인간은 그 시장에서 버려야 할 카드였다.


- 33이면 늙은여우지, 크리스마스 케이크 이론도 모르냐? 여자 나이 25살만 돼도 퇴물 취급당하잖아. 근데 뭐하는 사람들이야?

- 하나는 변호사, 다른 하나는 회계사, 나머지는 중견기업 둘째 아들이라는데 아몰라. 더 짜증 나는 게 뭔지 알아?

- 직업은 괜찮네... 네가 원하던 바잖아.

- 변호사랑 둘째 아들이 이미 갔다 온 몸 이래. 썅.

- 아...


나도 31살까지 매주 소개팅을 했던 몸이라 소개팅 시장을 모르는  아니지만 불과 2 사이에 우리의 몸값이 이렇게 똥값이 되어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뭐라고 답을 보내줘야 할지 잠시 생각하며 손가락을 키보 드위에 올려둔 채 화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 너 시집 잘 갔어. 진짜... 안 그랬음 너도 내 꼴이야 지금.

- 응.. 알아.. 시집가길 얼마나 다행이니 ㅜㅜ... 근데 누가 해주는 거야?

- 애들한테 다 필요 없고 번듯한 직장에 돈 많은 사지 멀쩡 한 남자면 된다고 했더니 이렇게 왔어.

- 근데 한번 만나봐. 이 중에 하나라도 잘되면 좋지 뭘.

- 아 정말 돈 많고 능력 있는 젊은 남자들은 어릴 때 결혼을 무슨 체험학습처럼 하는 거니? 멀쩡하다 싶으면 다들 한 번씩 했대. 증말 이제는 좀 괜찮다 싶은 애들은 등본부터 떼어봐야 하나 싶어.

- 등본 떼면 나오나? 혼인신고 안 하면 아무도 모르지 않나

- 아몰라! 넌 그냥 시집가길 잘한 건 줄만 알어!

- 어...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몰랐던 '기혼자'라는 소속감 넘치는 푯말을 가슴에 차고 다니다 보니 주위의 남자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덤으로 얻었다.

미혼일 때는 내가 기준으로 삼았던 재력, 학력, 외모, 대화의 수월함등이 어느 정도 만족이 되면 나머지 것들은 눈을 싹 감아버리고 안 보이는 척하거나 봐도 안 본 것 마냥 무시하기도 했다.

운전을 하는데 100미터 가는 길에 차선을 무려 5번이나 바꾸는 성급한 성격도 그냥 무시했고, 식당에서 종업원한테 반말로 찍찍 찍어대는 갑질을 보면서도 두둑한 지갑을 보며 안 보이는 척했다.

집에 와서도 잘 도착했냐는 문자 한 통 없어도 비즈니스로 바쁜 사람이니까라며 상대를 두둔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결혼을 해서 보니 그런 놈들을 잘 걸러낸 나 자신이 아주 기특하다.

쉬는 날엔 운동도, 캠핑도, 골프도 마다하고 서재에 콕 박혀서 뭐하는지 모르겠는 집 귀신 남편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주말마다 혼자 운동 동호회다, 동창 만난다 하며 나가지 않고 우리 세 가족 맛난 거 먹는 게 제일이라는 남편이 오히려 가정적으로 느껴진다.

못된 말, 거친 행동 한번 한 적 없는 삶의 태도가 아이에게도 영향을 줘서인지 아이도 언행이 부드러운 편이다.

술이 아무리 취해도 이상한 주사 한번 부리지 않고 어떻게든 집으로 와서 조용히 자는 얌전한 행실 또한 남편으로서 괜찮은 것 같다.

물론 보수적인 성향 탓에 의견 충돌이 있을 때마다 약간의 투닥거림이 있지만 그래도 먼저 사과하는 연상의 오빠이기에 어느 정도 믿고 개기는 편이다.


십여 년 전 친구의 소개팅 남자들로 이루어진 그들이 이제는 오십을 넘겼겠다 싶다.

친구는 그중 한 명도 만나지 않았다.

그러다 부모님이 선을 주선해 준 옆동네 한 살 많은 S대 출신 박사님과 결혼 소식을 알려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푸근한 인상의 사람 좋은 친구의 신랑감은 다른 건 제쳐두고서라도 내 친구가 세상에서 제일 미인이라는 주술에라도 걸린 건지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서도 친구의 얼굴을 보느라 제대로 밥을 먹지도 못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세월이 지나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우리도 그냥 맘에서 학부형 신분이 된 어느 날 내가 물었다.


“야, 그렇게 돈 많은 남자 타령하더니 갑자기 노선을 바꾼 이유가 뭐냐?”


“내가 좀 무식하잖아… 그걸 우리 부모님이 모를 리가 없고…그래서 후대만큼은 똑똑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길 바라셔서 태어나서부터 쭉 영재 소리 듣고 자란 남편을 픽한 거지”


“이사도라 던컨과 아인슈타인이 생각난다. 이쁜 얼굴과 아인슈타인의 머리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지 않냐고 했더니 아인슈타인이 본인 얼굴과 던컨의 빈 머리를 닮은 아이도 태어난다며.”


“아…. 맞네… 그럴 수도 있네! 야 근데 우리 애는 얼굴도 머리도 아빠 판박이야!”


“다행인지… 애매하다만 어찌 됐든 너희 집안의 목표는 달성했으니 축하한다!”


시시덕거리며 표독스런 말을 던져도 웃음 어린 농담으로 받아줄 줄 아는 친구와 대화할 때만큼은 어린 소녀들처럼 작은 농담에도 목젖이 보일만큼 웃어댄다.

이 나이가 되니 삶을 살아가는데 뭐가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어렴풋하게나마 정의할 수 있기에 함께 생활하고 부대끼는 가족과 지인이 나와 얼마나 가치관을 비슷하게 지니고 사는지가 가장 크게 다가온다.


멋지고 키도 크고 돈도 많고 잘생기고 집안도 빵빵한 남자는 일단 보통 여자인 우리의 차지가 되지 않는다는 슬픈 팩트를 마흔이 다 되어서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을 나와 친구는 보통의 남자와 보통의 결혼을 하고서 관망하는 자세로 삶의 안정감을 느끼며 깨달았다.


우리 (각자) 결혼하길 잘했어. 진짜.


2022.10.26 엄기.언

이전 06화 젊은 남자 손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