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셋, 책방 알바생입니다만
화장대에 LED 등을 달았다.
안방 불을 켜는 대신 화장대에 붙은 스위치만 켜고 끄면 되는 생활의 편리한 장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스위치를 켜는 순간 내 눈에 사로잡히는 하얀색 실. 실. 실.
실의 향연.
코로나가 길어지자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의 정수리는 까만 먹이 물을 먹고 종이를 흡수하며 번지듯 검은색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자 아예 머리 전체를 검은색으로 물들여버렸다.
그리고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귓불까지 똑떨어지게 똑 단발을 했더니 다시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착각마저 들었다.
"머리 했어? 더 영(young) 해졌다 얘"
한 달에 한 번꼴로 만나 SNS로 털지 못한 수다를 떠는 친구가 카페에 먼저 도착해 인스타그램에 빠져있는 나를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멘트를 날리며 자리에 앉았다.
살면서 느는 건 집 울타리 밖과 안에서 다른 성격을 띠며 자동으로 나오는 멘트의 풍성함이 아닐까 싶다.
그 멘트를 내뱉기 위해서 함께 느는 건 변화에 대한 민감한 눈치이다.
"응. 밖에 나갈 일도 없는데 뿌염 하러 가는 것도 사치더라고"
사실이다.
헤어스타일에 변화를 주기보다는 석 달에 한 번씩 까맣게 본성을 드러내듯 길어 나오는 머리의 정수리를 다시 갈색으로 맞추러 가는 그 시간과 비용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고작해야 마스크 쓰고 집 앞에 재활용 쓰레기 버리러 가는 처지에 미용실에 따박따박 돈을 가져다 줄 당위성이 없어진 것이다.
미용실을 안 가게 되면서 함께 줄어든 비용은 네이버 쇼핑에 내 스타일만 알아서 척척 나열해 뜨는 사이트에서 충동적으로 구매하는 옷값이다.
소파에 누워 반나절을 보내며 고르고 고른 옷들을 장바구니에 넣고 며칠 후에 장바구니에 있는 그 옷들을 비워버리는 짓을 하며 나름대로 옷값을 아꼈다고 치부하곤 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버려진 반나절이라는 시간을 채워 받지 못한다.
코로나가 한풀 꺾인 것은 아니지만, 가족을 포함한 지인들이 코로나에 걸렸기에 면역력을 획득한 시점이 되었다.
점심을 먹고 아이들과 운동장에 나가 놀고 왔다는 아이의 상기된 뺨을 보니 학교 생활도 점점 정상궤도로 올라가고 있는 듯하다.
더불어 학부모회가 비대면에서 대면으로 전환되어 생각보다 자주 학교에 불려 나가게 되었다.
학년 대표라는 직함을 선뜻 수락한 건 코로나 때처럼 단톡방에서 의견 정리된 것을 복사해서 각반에 뿌려주기만 하면 되는 손가락 노동에 국한되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아이들의 수업이 정상화되며 엄마들의 모임도 슬슬 노트북 안에서 쪼개진 화면 속 얼굴로만이 아니라 비록 마스크를 썼으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할 수 있다는 장점을 부각시키며 회의 일정과 장소가 공지되기 시작했다.
금요일 오전 10시. 다목적실
10명 남짓의 학부모회 임원들이 모이는 그 모임을 나가기 위해 아이를 부랴부랴 등교시키고 평소 때처럼 유튜브 한 편 틀어놓고 커피를 홀짝거렸다.
'머 입고 나가야 해? 옷도 없는데...'
'신고 나갈 신발도 없는 것 같아'
'샤넬을 메고 나가면 너무 촌스럽겠지? 요새 샤넬 없는 엄마들이 어딨다고...'
'하아... 화장은 어디까지 해야 하는 거야?'
눈은 유튜브 화면을 바라보는데 머릿속에서 뱅뱅 맴도는 고민의 소리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파도처럼 싸악 물러가는 기분이 들었다.
유튜브는 자동으로 다른 프로그램을 재생하기 시작했고 달라진 유튜버의 목소리를 자각하며 시계를 봤다.
9시 30분.
집에서 학교까지는 느릿느릿 거북이처럼 기어가도 5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다.
주방 창문에서 설거지하며 바라보는 광경이 운동장이다.
샤워를 하고 저녁에 감고 제대로 말리지 않은 머리가 제멋대로 헝클어져있어서 그냥 단순하게 하나로 묶어 올리기로 했다.
미인들만 어울리는 쪽진 머리, 미인이 아닌 나는 어디서 나오는 용기인지 몰라도 용감하게 얼굴에 머리카락 한 올 내려오지 않게 참빗으로 빗어 올리기로 한다.
화장대 불을 켰다.
파란색 꼬리를 가진 참빗을 잡고 오른쪽으로 가르마를 만들어 빗어넘기는 순간 까만 밤에 유성 떨어지듯 흰머리가 우수수 쏟아 오른다.
이제 막 나기 시작한 건지 손가락 마디 하나만 한 흰머리카락들.
'간지럽더니만 언제 이렇게 흰머리 밭이 된 거야?'
서랍을 열어 족집게로 눈에 보이는 흰머리들을 하나씩 하나씩 잡아채기 시작했다.
흰머리를 뽑을 때마다 검은색 하늘이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 가르마의 위치를 바꿔가며 흰머리 밭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이미 길이가 상당한 흰머리를 뽑는 것보다 두껍지만 짧은 흰머리가 뽑는 손맛이 좋다.
눈알이 한 껏 위로 치켜 올라갔지만 어느 때보다도 집중해서 머리카락의 흰 실들을 골라내 없애는 작업은 시공간을 초월할 정도의 몰입감을 선사한다.
머리의 오른쪽 가르마에서 시작한 흰머리 뽑기 작업이 어느새 정수리를 거쳐 왼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9시 50분
이제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잡고 정수리 약간 아래에서 묶어버리면 된다.
겉에서 봤을 때 삐죽 나와 보이는 흰머리를 대강 없앴으니 희끗희끗함은 지워버린 셈이다.
뒤통수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비비크림을 바르고 눈 화장을 하는 데까지 5분도 안 걸리는 내 화장법은 20대 때 회사에 지각하지 않고도 어느 정도 예의를 차릴 정도의 속도감을 가졌었다.
그러나 10분 넘는 흰머리 뽑는 시간이 추가된 40대의 화장대 앞에서의 시간을 받아들이는 건 화장의 기술이 퇴화된 것이 아닌 늙고 초라해짐을 감추는 시간이 증가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늙어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나 고통스러움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저 주어진 하루하루 속에서 엄마로서, 주부로서, 중년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감내하는 것 같다.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이 파도 같은 감정들이 일상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노화가 그 원인이 되는 경우는 없다.
다만 불안이 가득하고 물질 소비문화 시대에서 내가 잘 사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인가 하는 물음에 에피쿠로스로부터 얻어내고자 노력한다.
그는 정신적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삶, 다시 말해 '아타락시아(Ataraxia)라 불리는 그 정신의 상태를 "평정"이라 했다.
바로 그 평정심을 가지고 유지하는 게 내가 가장 갈구하는 삶이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어가는 날들에도 마음이 불안하지 않는 건 평정심을 놓지 않고 노화에 있어 당연한 현상이라는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성만이 밤잠을 설치게 하는 불안과 공포를 치유할 수 있다고 보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40이 넘은 지금 종교처럼 받들기로 한 것이다.
'철학은 치료이며 구원은 세상의 이치를 이해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에피쿠로스의 핵심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오늘의 늘어난 흰머리만큼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며 족집게로 뽑을 수 있을 만큼 자란 지금에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다.
비록 외출 준비 시간이 10분 넘게 더 걸릴지라도 말이다.
- 언니 오늘은 학부모회가 있어서 오전 알바 대신 오후 알바로 나갈게!
사장님께 어제 말로는 일러뒀지만 그래도 한번 더 메시지로 남긴다.
우리 나이엔 서로 깜빡하므로 속절없이 나를 기다릴 수도 있거나 오픈이 안된 책방에 방문한 손님이 허탈하게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응 그래^^ 오전에 내가 나갈게!
사장님의 답장을 확인하고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승무원들이 쓴다는 강력 스프레이를 검색해서 뿌렸는데 과연 잔머리 하나 삐져나오지 않게 고정시켰다.
빳빳하게 굳어져 고정된 옆머리를 만져보고 교무실 앞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프거나 다친 아이들 말고는 이용이 금해져 있는 엘리베이터라는 걸 알기에 두 발 멀쩡한 어른이 타고 가는 게 아이들에게 들킬까 살짝 민망한 순간이었지만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 내며 계단을 오르는 게 더 신경 쓰이므로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른다.
4층에서 문이 열리고 발걸음을 내딛으며 나는 책방 알바생이 아닌 학년 대표로서의 책임감을 느끼며 약간은 긴장감을 안고 다목적실의 문을 살살 열어 들어갔다.
하루 중 오전은 학부형으로, 오후는 알바생으로, 저녁엔 엄마로 그리고 심야엔 온전히 나로 살아가는 내 생활이 아니 오늘 하루가 시간마다 다른 색으로 빛나는 하늘처럼 다채롭다고 느끼며 살아있음을 느낀다.
2022.10.22
엄기.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