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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기언 Mar 31. 2023

내 눈앞의 너

신도시 사는 80년대생 아줌마

작년 이맘때 사진을 스크롤해 본다.

의미 없는 그럴싸한 인스타그램용 사진들 사이에서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언젠가부터 사진 찍자고 폼 잡으라고 주문하면 그닥 호의적이지 않게 되었지만 여전히 아이는 내 카메라 속 1등 모델이다.


작년 이맘때,

성수동에서 리히텐슈타인의 전시가 있었다.

작품 몇 개 떠오르는 사람이라 내가 좋아하는 서울숲이 있는 성수동 갤러리아포레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엄마, 전시회 몇 분이나 봐요? “

“왜?”

“나는 전시장이 넘 덥고 답답하고 형 누나들도 무섭고 그래서 미술관 정말 싫은데 “

“지금 많이 봐둬. 나중에 어머님 감사합니다 할 거다”


“……..”


예민한 기질의 아이는 누군가의 비난 섞인 말투와 제재에 쉽게 상처받는다.

예전에 아이는 그림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림 가까이 몸이 갔을 뿐인데 스태프 형이 ‘뒤로 가세요!’라고 본인을 혼냈다며 당장에 나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비싼 티켓값을 지불하고 시간 내어 왔는데 그런 사소한 지적 하나 가지고 도망치듯 전시장을 나가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 생각했다.


“너는 별거 아닌 거 가지고 되게 민감하게 받아들이더라”

“아니… 그게 아니고 저 형아가 나만 혼냈어요.”


10살 남짓의 사내아이의 여린 가슴에 그 공간의 무게가 얼마나 무섭게 다가올까 공감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매번 도망치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모른 체 하며 끝까지 전시를 다 둘러보고 나왔다.

그제야 뒤돌아본 아이의 얼굴을 보니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한번 깜빡이기라도 하면 주르륵 떨어질 것만 같은 애처로운 표정이었다.



리히텐슈타인의 전시는 아이에게 비교적 신선하게 다가왔는지 그림이 아닌 포스터나 잡지 표지 일색의 전시임에도 군말 없이 따라와 주었다.

중간중간 설치미술에는 관람자들이 앉아서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아이를 앉혀놓고 사진도 찍었다.

마스크 너머의 아이의 표정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유쾌한 것만 같지는 않아 보였다.

쫄랑쫄랑 따라다니며 오동통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게 뭔지 저게 뭔지 호기심 만발하던 아이가 아님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다.


언제까지나 아이를 내 시야 안에서 머물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 취미생활을 함께 하도록 강요하고 회유하고 요청해서 함께 하는 시간을 늘리는 것도 이제는 점점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아이를 데리고 미술관을 가는 이유는 언젠가 먼 훗날, 아이가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낼 때 자연스럽게 미술관을 찾을 수 있길 바래서랄까.

혹은 마음에 드는 여자친구와의 데이트가 함께 미술 작품을 보며 도란도란 얘기 나눌 수 있는 고상한 취향을 잠재적으로 심어 두고 파서?


쇼핑센터에 장성한 아들의 팔짱을 끼고 세상 갑옷 걸친 듯 의기양양한 중년 여성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본 적이 있다.


‘내 아들도 청년이 되어서도 엄마에게 선뜻 팔짱을 내어줄까? 아니면 남들 볼까 슬며시 뿌리칠까?’


오지도 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더욱더 내 손잡고 간질거리는 몸을 주체 못 해 이리저리 흔드는 사내아이의 손을 더욱더 힘줘 쥐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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