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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기언 Oct 11. 2023

1. 집을 뛰쳐나갔다.

템플스테이 로망스

우울증은 결국 인생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혹은, 항우울증 약의 힘인지 뭔지 모를 남아 있는 힘으로 살기 위해 무릎을 꿇리고 만다.

살게 해달라고 머리를 조아리며, 소파에서 한껏 굽은 등을 새우처럼 말아 두 손을 있는 힘껏 깍지를 끼고 아는 신들께 빌게 한다.


2차 성징이 나타나지도 않은 10대 초반의 남자아이는 이제 더 이상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런 아이를 그 애미 또한 사랑하지 않는다.

둘은 그저 가족이라는 또아리 속에서 서로를 옭아매며 모자지간의 측은지심을 느끼다가, 때로는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하며 결국은 파국을 맞는 하루하루를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나 쟤랑 더 있다가는 내가 죽을 것 같아. 제발 빨리 집에 와줘. 제발 “


정말 그랬다.

아이는 더 이상 엄마의 말에 복종하는 어린 내 새끼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동안 내가 아이에게 퍼부었던 저주 섞인 온갖 더러운 말을 똑같이 되갚아주느라 암기력을 다 소진해 버려 머리통이 어지러워 보였다.


회사에서 퇴근하는 남편에게 전활 걸어 좀 더 빨리 올 수 없냐고 채근하며 주방 식탁 아래서 눈치를 보며 앉아 있는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 너도 하루하루가 불안하기도 하겠다. 한참 잘 시간인데 말이야.”


퇴근 시간 러시아워를 뚫고 한 시간 반 만에 온 남편의 얼굴을 보자마자 한바탕 모자지간 쎄한 기운이 집안을 감도는 것을 느껴보라는 듯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항우울제를 복용하면 깊은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한두 시간의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다.

일상이 그런 식이다.


거실에서 아들과 배달음식으로 저녁을 때우고 뒷정리를 하던 남편이 인기척을 느끼자 잘 잤냐고 한다.

그리곤 잠깐 방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왜? 그냥 여기서 얘기해.”

“아니, 방에서 둘이 얘기할 게 있어서”


안방 문을 닫고 낮은 목소리로 그가 얘기한다.

사뭇 진지한 표정의 그의 얼굴을 보니 뭔가 심각한 얘기를 하려나보다.


“혹시 애한테 ’ 병신새끼‘라고 했어?”


아빠가 오자마자 아이는 지가 나한테 소리 지르고 문을 쾅쾅 닫고 열고 하던 생난리는 쏙 뺀 채 화가 나 파충류의 뇌를 탑재한 우울증 걸린 엄마가 냅다 질러버린 더러운 말 한마디를 탁 건져 이른 모양이다.


“응. 했어. 숙제하라고 좋게 몇 번 말해도 듣는 척도 안 하길래 그랬어. 지가 소리소리 지른 건 말 안 하지?”


“그렇다고 아이한테 그런 심한 말을 하면 어떡해? 다 당신한테 되돌아온다는 거 잘 알잖아. 좀만 참았어야지.”


“왜 맨날 나만 참아? 내가 엄마라서? 내가 어른이라서?”


“당신 잠시 아이랑 떨어져 있어 보는 건 어때?

처갓댁에 가 있던지 아님 템플스테이 한 일주일 다녀올래? “


“울 엄마는 뭔 죄야? 그리고 애 학교는 누가 보내?”


“그런 건 내가 어떻게 해볼 테니까 지금 템플스테이 하는 곳 알아보고 바로 예약해. 응? 우리 이렇게 가다간 애 잃어. 쟤 아직 어려서 이 정도지 더 크면 손 쓸 수도 없다구.”


솔깃한 제안이었다. 솔직히…

아침에 눈 뜨자마자부터 학교에 가기 싫다는 아이를 구슬리다가 협박도 하다가 너 마음대로 하라고 안방으로 들어가 누워버리는 시간들.

아이가 학교에서 매일매일 콜렉트콜로 집에 오고 싶다고 머리가 아프다고 숨이 안 쉬어진다고 울먹거리는 전화를 받으며 너무 힘들면 보건실에서 조금만 누워있으면 나을 거라고 다독여줘야 하는 순간들.

그냥 아무도 보지 않고 히끼꼬모리처럼 며칠만 호텔방에 콕 처박혀 자다 깨다만 하고 싶었었다.


그런데 막상 집을 나가라니 남겨진 두 남자들에 대한 약간의 걱정과 내 고양이의 안부 그리고 알 수 없는 막연한 감정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떠나면 너도 알 거야. 내가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한 작은 기대를 품고 남편의 제안대로 녹색창에 “템플스테이”라고 써넣었다.

그리고 언젠가 가족들과 함께 가 본 적이 있는 절에서 운영하는 템플스테이 예약란에 보니 이미 예약은 꽉 차 있었다.


이상하게도 별생각 없다가도 템플스테이를 알아보니 괜히 더 애착이 가고, 내일 당장 간단한 짐을 싸서 절로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리고 예약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저 성인 여자 혼자 내일부터 머물 수 있는 방이 있을까요?”


상대방은 친절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로 너무 안타깝다는 감정을 가득 실어 대답한다.


“요새 여름철 휴가철이라 그런지 예약이 꽉 차 있네요. 혹시라도 취소분 생기면 지금 걸어주신 번호로 연락드려도 될까요?”


예상답변이지만 다른 절을 알아봐야 한다는 귀찮음이 몰려와 얼른 전화를 끊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알겠다고 하곤 갑작스러운 피곤함과 애닳아했던 마음이 한꺼번 덤벼드는 기분이 들어 취침 전 약을 일찍 먹어버린 채 곧장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른 아침.

머리맡에 두고 잔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아침부터 문자는 뭔가 중요한 내용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제대로 떠지지도, 노안이 와서 흐릿한 눈을 비비며 문자를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어제 문의 주셨던 XX사 템플스테이 사무국입니다. 갑자기 예약 취소건이 생겨서 연락드립니다.

다만 방안에 화장실과 욕실이 없고 공용 화장실과 샤워실을 사용하셔야 하는 방이며 금액은 일박 당 7만 원입니다. 예약 원하시면 성함과 연락처 그리고 주소를 간단히 적어서 답장 부탁드리겠습니다.‘


눈을 쓱쓱 비벼가며 오타가 여러 번 나서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예약하겠다는 답장 메시지를 발송하고는 남편을 깨웠다.


“일어나 봐, 나 오늘 전에 갔던 XX사 템플스테이 예약했어. 나가라고 했으니 둘이 알아서 회사랑 학교 잘 다녀.”


통보 아닌 통보를 하고 고속터미널에서 사둔 가볍고 많이 들어가는 천가방에 속옷 두벌씩과 양말 두 켤레, 화장품 파우치, 삼일분의 우울증 약, 그리고 읽다만 책 세 권을 쑤셔 넣었다.

대충 세수를 하고 더 대충 얼굴에 비비크림을 찍어 바르고 차키를 찾아 나가려는데 발목 주변에 번팅을 해대는 내 고양이가 가여워진다.


“엄마 잠깐 어디 좀 다녀올 테니까 형아랑 아빠랑 잘 지내고 있어. 알았지?”


자고 있는 아이방을 빼꼼 열어보니 여전히 꿈나라다.

인간 누구의 배웅도 없이 바로 차키를 손에 넣고 현관문 열고 나왔다.

뭔가로부터 도망치듯 자동차 on버튼을 누르고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온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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