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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Feb 25.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13

Book Of Honour


이베리아 반도의 위대한 유산에 동참하게 된
극동아시아의 평범한 작가는 어떠한 전율을 느끼고야 말았는가?



숙소로 돌아와 우연으로 점철된 한낮의 행운과 낮술의 취기에 젖어 잠을 청했다. 마드리드에 와 제대로 취한 첫 시에스타였다. 그렇게 까무룩 잠들고 깨어나 보니 7시. 해는 여전히 짱짱했다. 시에스타가 끝나도 하루는 반이나 남았을 따름. 좋아. 세 시간 더 일하고 저녁은 10시에 먹는다. 여기는 스페인이고 태양에 가까운 곳이다.


정신을 차리고 오늘의 행적을 잊지 않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 그런데 메일이 와 있다. 열어보니 페르난도에게서 온 답메일이다. 잊고 있었던 또 다른 스페인 작가 페르난도! 그가 답메일을 준 것이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나는 곧바로 읽어나갔다. 그는 연락을 줘서 고맙고 답이 늦어 미안하다며 겸손한 인사를 건넸다. 그는 현재 벨기에 브뤼셀에서 지내고 있단다(대체 마드리드엔 누가 살고 있는가!) 그는 자신이 마드리드에 지금 있다면 내게 도시의 숨겨진 비밀스런 곳들과 자신이 좋아하는 곳들을 보여줄 수 있었을 거라고 가정법을 사용해 말했다. 말만으로도 무지 고마웠으나 역시 가정법일 따름이었다. 그래도 10월 말에는 마드리드로 돌아온다며 내가 그때까지 마드리드에 있으면 볼 수 있지 않겠냐고 했다. 당연하지. 나는 11월까지 이곳에 있으며 너를 만나기 전에 귀국하지 않을 수도 있다, 라고 이미 머릿속에서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뒤이어 그는 Malasaña, Huertas or Lavapiés 같은 쿨 플레이스는 돌아보았냐며 안 갔으면 가보라며 추천을 해줬다. 라바피에스는 며칠 전 갔던 벼룩시장이 열리던 지역 부근이었다. 나머지 두 군데는 살펴보니 우리로 치면 '익선동길'이나 '힙지로' 같은 문화와 상권이 결합된 신흥 힙플레이스인 듯했다. 무언가 현지인의 실질적인 추천을 받으니 기대감이 들었다. 벌써부터 그곳에 가보고 싶어 졌다. 또한 그는 토지문화관과 한국이 매우 그립다는 말을 덧붙이고는 멋진 세 마디로 메일을 마쳤다. Stay cool, have fun and write everyday!!!


마지막 느낌표 세 개짜리 write everyday야말로 이 메일이 페르난도를 해킹한 누군가가 한국 작가를 놀리려 보낸 게 아닌, 진짜 페르난도의 것임을 확실하게 인증해 주고 있었다. 작가 페르난도... 그 역시 같은 직업병을 앓고 있는 동종업자가 확실하다. 글쓰기의 강박이 없다면 그는 작가가 아니기에, 그는 강박을 느낌표 세 개의 박력으로 극복 중이고 내게도 힘을 내라고 말하고 있었다. 고마웠다. 안토니오의 첫 메일도 고마웠지만 페르난도는 더 디테일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나는 그가 알려준 세 군데 거리와 세 가지 지침을 잊지 않으며 이곳을 떠나기 전 그와 한 번쯤 마주하기를 희망했다.


새 메일이 하나 더 있었는데 이번에도 스페인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비로소 스페인 사람들과 친해지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끼며 메일을 열었다. '사라'라는 이름의 발신자는 이곳 레지던스의 문화 분야 담당자로, 내게 레지던스 생활은 잘하고 있는지 묻고 있었다. 물론이죠. 오늘은 시장 타파스에 낮술도 곁들여 먹고 시에스타도 달성했는걸요. 뒤이어 그녀는 내게 두 가지를 요청했다. 하나는 사진. 레지던스 측은 이곳에 초청되어 묵게 된 외부 주요 인사들에 대해 사진을 기록으로 남긴다며 잠시 사진을 찍을 시간을 가질 수 있냐고 물었다. 당연히 가능하죠. 나는 출판사에서 반대해도 늘 저자 사진을 찍어 보내는 사람이랍니다. 두 번째는 ‘Book of Honour’에 코멘트와 사인을 남겨달라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방명록이었는데, 그 방명록의 이름이 ‘북 오브 오너’였다. 오오. 역시 마음속으로 바로 답했다. 앱솔루트리!


Book of Honour ; Residencia de Estudiantes



그리하여 다음날 바로 나는 사라와 그녀의 직속 부하로 보이는 사진기를 들고 온 사내와 레지던스 로비 라운지에서 만났다. 사라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장신의 중년 여성으로 포스가 철철 넘쳤다. 그녀는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보물을 전달하는 메신저와 같은 분위기로 내게 다가와 고급스런 회색 천으로 감싼 ‘북 오브 오너’를 건넸다. 오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충만한 포스를 뿜고 있었다. 천으로 된 커버를 열어 보이자 마치 어린 시절 추억의 사진앨범처럼 두툼한 방명록, 북 오브 오너가 등장했다.


사라는 내게 페이지를 넘겨 보여주며 최근 2년 여 간 이곳에 머물렀던 석학들이 남긴 흔적을 보여줬다. 이것은 노벨상을 받은 누구의 사인이라고 알려줬으나 놀라기 바쁜 나머지 이름을 정확히 알아듣진 못했다. 사라는 지난해 이곳에 입주한 김이정 작가님이 남기신 방명 역시 보여주었다. 작가님은 한 페이지 가량을 할애해 자신의 소설 <유령의 시간>의 한 단락을 영어로 번역해 놓으시고 사인을 남겨놓으셨다. 실로 멋들어진 한 페이지였다. 어쨌거나 나 역시 여기에 글을 남기고 사인을 해야 한다니 순간 주눅이 들어버렸다.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사라는 지금 여기서 쓰는 것이 아니라며,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 이삼일 안에만 작성하고 리셉션에 돌려주면 된다고 했다.


한숨을 돌린 내게 사진 촬영이 남아 있었다. 사진기를 든 사내는 자신이 사진을 아주 잘 찍지는 못하니 많이 찍어서 골라야 한다는 농담과 함께 포즈를 부탁했다. 나 역시 잘 찍히는 법을 모르니 일단 많이 가보자는 농담을 했으나 그가 다 알아듣지는 못한 것 같아 살짝 김이 샜다. 나는 레지던스 로비와 발코니를 배경으로 뱃살에 잔뜩 힘을 준 채 향수병에 빠진 중년의 한국 작가를 연기했다. 그렇게 수십 장을 서둘러 찍었음에도 내 연기가 나쁘지 않았는지 사내는 곧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는데, 그때 사라가 와서 액정을 살피더니 내게 레지던스 로비 입구에서 몇 장만 더 찍으면 안 되겠냐고 했다. 대신 비가 오니 몇 방울 맞아야 할 텐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렇다. 비가 오고 있었다. 이곳에 온 지 열흘이 좀 지나고서야 목격한, 스페인에서의 첫 비가 내리고 있었다. 태양이 선글라스를 안 쓰면 네 눈을 뽑아가겠다는 듯 내리쬐고 세찬 바람이 하루 종일 귀싸대기를 후려치듯 불어대는 이곳에, 드디어, 보슬보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마드리드에 온 후 처음 목격한 비이므로 기꺼이 맞을 수 있다고 말한 뒤 로비 입구로 나가 빗속에 개폼을 잡아보았다. 사내가 부지런히 셔터를 누르며 빗방울에 점점 숨이 죽어가는 내 부실한 머리숱을 포착했다. 그렇게 내 모습이 레지덴시아 데 에스튜디안테스의 초청 인사 앨범에 저장되었다.


레지던스 앨범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똥폼을 잡는 중.



사라와 사내와 인사를 나눈 뒤 Book Of Honour를 고이 들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묵직한 무게감만큼이나 레지던스의 명예와 정통성이 느껴지는 그 물건을 책상에 내려놓은 채 나는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았다. 레지덴시아 데 에스튜디안테스. 11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로피안 문화유산에 등재된 건물. 퀴리 부인과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과학자들과 영화감독 루이스 브뉴엘과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예술가, 스페인 현대 사상가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스페인 국민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머물렀던 공간. 그런 이곳에 나 역시 머물렀다는 것을 인증하고 글로 남기라는 것이 아닌가? 과분한 기회와 영광. 내가 이곳에 머문다는 무게감이 어깨와 양손을 누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대로 가다간 방명을 남기는 걸 부담감에 미루게 될 것 같았다. 나는 손에 힘을 주고 방명록을 넘겨 내게 주어진 페이지를 펼쳤다. 도화지와 마분지 중간의 질감... 마치 고대 양피지가 이럴까? 두툼한 흰색 페이지의 질감을 지문 가득 느끼며 나는 펜을 들었다.


근사한 작업실을 찾아 여기 스페인 마드리드까지 왔습니다.

책상 하나와 침대 하나로도 완벽한 작업실이자 거처를 얻었습니다.

레지덴시아 데 에스튜디안테스, 이곳의 역사와 전통을 오롯이 느끼며

저는 작가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하고, 느끼고, 매일매일 쓰는 것이죠.

작가들에게 이러한 공간을 제공해주신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13. Sep. 2019.     여러분의 유산에 경의를 표하며,

한국에서 온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김호연 드림.


양피지를 방불케 하는 Book of Honour, 나의 페이지.



내 딴에 가장 정성을 담은 필치의 한글로 이렇게 페이지의 반을 채웠다. 나머지 페이지 반은 한글로 쓴 내용을 영어로 번역해 채웠다. 그리고 사인을 했다. 은행 계좌를 만들 때 쓰던, 독자와의 만남 때 책에 남기던, 첫 시나리오를 계약할 때 계약서에 적던 그대로. 그렇게 그들의 위대한 유산에 나만의 작은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나 역시 이 살아있는 역사에 안겨 숨을 쉬고 있으며 그들의 전통에 동참할 수 있으며 그럴 수 있는 시간이 2개월 하고 보름 남짓 남은 것에 기꺼워하며.


지난봄 토지문화재단에서는 자체적으로 지원서를 받아 선발한 한국의 ‘교환 작가’ 후보 세 명의 지원서를 스페인 AC/E(문화국 문학담당부서)와 레지던스로 보냈다. 그러고 나면 그들이 최종 한 명을 선정해 '이 작가를 스페인으로 보내달라'라고 토지에 통보한다. 그게 나였다는 걸 그저 넙죽 감사해하며 이곳에 날아왔다. 하지만 그 선택에는 그 이상의 무게와 명예가 담겨있었다. 돈키호테에 대해 쓰겠다는 돈키호테 같은 한국의 작가에게 그들은 자신들의 유산을 나눠주었다. 어쩐지 많이 겸허해졌다. 어제 세르반테스의 동상과 조우한 것 이상의 전율이 내 몸을 감쌌다. 나는 북 오브 오너를 천으로 감싼 뒤, 다시 나의 양손에 감싸 안은 채 리셉션으로 향했다.


2019 World Basketball Champion Spain



다음날 오후, 스페인과 아르헨티나의 농구월드컵 결승이 있었다. 나는 마오우 맥주를 연신 들이켜며 응원했다. 스페인에 머물고 있는 이방인의 자격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이베리아 전사들은 맹렬히 림을 향해 돌진했다. 잠시 뒤 스페인이 아르헨티나를 압도적으로 제압해 우승하며 그들만의 새로운 유산을 만들었다. Book of Honour에 글을 남기듯 그들의 우승에도 손을 얹은 기분이었다.


이제 그들의 최고 유산 <돈키호테>에도 손을 얹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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