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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Feb 23.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12

동상


세르반테스 동상은 스페인 광장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채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세르반테스 길을 나와 나도 모르게 큰길과 큰 길이 이어지는 곳에 다다른 순간 맞은편으로 자리한 삼각형의 작은 광장이 보였다. 그리고 그 광장 중심에 우뚝 선 사내의 동상이 보였는데, 동상은 말을 타지도 않았고 칼과 방패를 들지도 않았으며 투구도 갑옷도 없었다. 나는 그가 세르반테스라는 것을 즉시 확신했는데, 오른손에는 무기 대신 두루마리 종이를 내밀고 있었고 왼손은 어깨부터 두른 망토에 감춰진 것이 불구였던 그의 왼손을 가린 디자인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개가 주인의 발소리만 듣고도 뛰어가듯 나는 세르반테스 동상을 향해 그레이하운드 급 속력으로 달려갔다. 다가서자마자 개처럼 킁킁대며 낮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동상 주위를 맴돌았다. 동상은 귀스타브 도레의 삽화에 나오는 돈키호테를 본뜬 건지 삽화 속 그림과 상당히 닮아있었다. 당연히 군인 출신 작가 세르반테스와 이야기 속 늙은 기사가 닮아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상이 서 있는 단의 한 면에는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평원을 걷고 있고 그 위로 둘시네아로 보이는 여성이 천사처럼 그들을 옹위해주는 모습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반대편 쪽으로 가보니 돈키호테가 우리에서 사자를 풀어주는 기막힌 장면 또한 새겨져 있었다. 세르반테스 동상은 위엄 있고 당당한 모습으로 대로변을 향해 서 있었고 그 아래 음각들은 익살맞은 형태로 책 속 내용을 담고 있었다. 실로 근사하게 완성된 동상과 단상이었다.     


세르반테스 길 부근에 자리한 세르반테스 동상



흥분을 누른 뒤 나는 존경의 시선을 담아 세르반테스 아저씨와 아이컨택을 했다. 세르반테스 옹은 허기진 얼굴과 상기된 표정으로 침을 흘리며 선 길 잃은 동양인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래. 돈키호테는 찾았느냐?”

“그게... 음...”

“돈키호테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지. 결코 쉽지 않을 게야. 그래서 여기로 온 거니?”

“솔직히, 아닙니다.”

“어디로 가는 길이었니?”

“안톤 마틴 시장에 한식 타파스 식당이 있다길래요... 소주도...”

“솔직한 건 좋구나. 그럼 이 곳엔 찾아올 생각이 없었던 거니?”

“안 그래도 이제 찾아뵈려고 했어요.”

“내 집은 어떻더냐?”

“관광객들이 좀 있더라고요. 근데 좀 가난하셨나 봐요. 집이 꽤 작고 허름하긴 하더라고요.”

“이해하지 않느냐. 너도 부유한 작가 같아 보이진 않은데.”

“그러문입쇼. 근데 왜 제가 산초 판사처럼 말하고 있는 건지요?”

“그게 너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너에게 임무를 부여하겠다.”

“왜 저를 종복 취급하십니까?”

“난 이미 네가 나를 위해 멀리 동방의 끝에서 온 걸로 안다. 더 이상 튕기지 마라. 내가 주는 임무는 네게 큰 선물이기도 하니까. 너는 돈키호테를 찾아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문입쇼.”

“돌아오는 달 9일이 내 생일이다.”

“죽어서까지 생일을 챙기시다니 대단하십니다요.”

“요점은 내 생일에 내가 태어난 도시에 가면 진짜 돈키호테를 만날 수 있을 것이야.”

“예? 그럼 다음 달 9일에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 가면 돈키호테를 만날 수 있다는 겁니까? 그거 확실한 겁니까요?”

“어허 속아만 살아왔느냐.”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 그럼 가야겠네요. 근데 마드리드에서 얼마나 되나요? 어떻게 가면 되죠?”

“어허 검색해 보면 알 거 아니냐. 거리는 서울에서 수원 정도 된다.”

“세르반테스 님께서 서울 수원 간 거리는 어떻게 아십니까? 거참.”

“자 각설하고, 나의 길과 나의 집을 보았으니 나의 도시도 다녀오도록 하게. 그러면 너는 돈키호테에 대해 비로소 쓸 수 있게 될 것이야.”

“그, 그게 정말입니까요?”


믿음에 의문을 던지지 말라는 듯 동상은 더 이상 답이 없었다. 나는 세르반테스 옹 동상을 향해 꾸벅 동양식 인사를 한 후 함께 셀카를 찍었다. 그제야 배가 찢어지게 고파옴이 느껴졌다. 나는 구글 지도를 켜고 다시 안톤 마틴 시장을 찾아 나섰다.


단상에 새겨진 소설 속 내용을 묘사한 음각화



그로부터 15분 후 안톤 마틴 시장을 찾았다. 하지만 한식 타파스 식당 악마는 결코 찾을 수 없었다. 안톤 마틴 시장은 1, 2층에 걸쳐 시장과 상점이 튼실하게 자리 잡고 있었는데 먹음직스러운 해산물이 가득한 어물전, 스페인의 상징과도 같은 하몽이 줄줄이 널린 정육점, 과일 가게, 잡화점 등이 보는 맛을 주었고 무엇보다 카페, 타파스 집, 선술집, 등이 다양하게 늘어서 있었다. 개중엔 일본 덮밥 집도 보였고 인도 음식점도 보였다. 그러나 악마는 없었다. 영업을 종료한 건지 문 닫은 가게 중에도 보이지 않았다.


낭패다. 복부에 총상을 입은 환자처럼 허리가 다 굽어진 채 좀비처럼 시장을 마저 돌아봐도 없었다. 한식 타파스고 뭐고 다 부질없다. 젠장. 그때 마드리드 할배 몇이 어떤 타파스 바에 둘러앉아 맛있게들 음식을 드시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꽃보다 할배 4인방 같은 그들이 또르띠아며 하몽 샌드며 조린 닭고기를 드시며 까냐(생맥주)를 홀짝이시는데 그것이야말로 천국의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바 테이블에 가 앉고는 할배들과 격의 없이 떠들고 계신 주인아줌마를 향해 호기롭게 주문했다.


“올라. 메뉴 델 디아, 뽀르 빠보르(안녕하세요. 오늘의 메뉴, 부탁해요.)” 


50대의 건장한 체구 스페인 아줌마는 걸걸한 목소리로 무어라 답했다. 다행히 답에서 '베비다(음료)'라는 단어를 캐치했다. 메뉴 델 디아에는 음료가 포함된다. 그렇다면 무얼 마실 거냐는 거고... 나는 반사적으로 옆자리 할배들을 돌아보고 “까냐”라고 답했다. 그러자 마치 시험에 통과한 학생을 보듯 만족스러운 눈짓을 보인 뒤 아줌마가 잔을 꺼냈다. 스페인의 생맥주 잔은 작다. 우리 병맥주 따라 마시는 잔 크기다. 그런데 얼음 잔이다! 아줌마는 얼음 잔에 맥주를 꽉 채운 뒤 넘치는 거품을 한번 컷 해주고 내게 건넸다. 거품과 맥주의 비율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까냐 한 잔이 녹아내리는 얼음 조각과 함께 내 앞에 놓였다. 나는 방금 전 세르반테스 동상과의 감격적 조우를 자축하며 한 잔 쭉 들이켰다. 곧 기본 안주로 초리죠와 올리브가 나왔다. 허기진 나는 흡입했다. 그런 내 모습을 옆 자리 할배들과 주인아줌마가 흡족하게 바라봤다. 나는 한입거리 남은 맥주를 비우고 새 잔을 주문했다.


얼음잔에 담긴 알람브라(=알함브라) 맥주와 올리브



오늘의 메뉴는 닭과 감자였다. 닭다리 두 개를 맛난 소스에 조렸고 옆에는 바삭한 감자튀김이 깔끔하게 곁들여져 나왔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진짜 완전 맛있는 시장 음식이었다. 미술관에서 나온 뒤로 지금까지 우연이 지속되었다. 우연히 세르반테스 길을 발견했고, 우연히 세르반테스 동상과 마주쳤으며, 우연히 이런 가게를 발견해 만족스럽게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우연이 지배한 하루야말로 진정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게다가 그것이 여행지의 낯선 곳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 안톤 마틴 시장의 이름 모를 타파스 바, 이곳 역시 돈키호테의 식당에 등재되었다.


배가 불러 느긋해진 나는 지난 시간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먼저 한식 파타스 집 악마를 검색했던 블로그를 다시 찾았다. 아뿔싸! 이곳은 ‘안톤 마틴 시장’. 블로그에 소개된 시장은 그냥 ‘안톤 시장’이었다. 바보 같은 기억이 만든 우연이 세르반테스와 맛있는 식당으로 나를 인도한 것이다. 나는 묘한 만족감을 느끼며 안톤 시장의 악마는 다음에 다시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구글 지도에서 세르반테스를 검색했다. 그러자 세르반테스 길이 나왔고 두 군데 세르반테스 집이 나왔다. 하나는 방금 다녀온 세르반테스 길 끝에 위치한 마드리드의 세르반테스 집.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마드리드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도시 알칼라 데 에나레스의 생가. 청동 세르반테스 옹이 말한 바로 그곳이었다. 알칼라 데 에나레스는 세르반테스의 고향 마을이고 소설 속 돈키호테가 사는 라만차 지방의 모델이 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음 달 9일, 세르반테스 동상 옹이 나보고 그곳에 가라고 한 이유도 알게 되었다. 그날은 세르반테스 탄신일이고 이를 기념해 매년 축제가 펼쳐진다는 사실을 검색을 통해 알아낼 수 있었다. 확실한 목표다. 나는 프로도가 절대반지를 가지고 운명의 산으로 가야 하듯 다음 달 9일에 알칼라 데 에나레스로 간다. 가야만 한다!


세르반테스 동상 옹은 마치 돈키호테가 산초에게 내 말을 들으면 섬을 주겠다고 한 것처럼 내게 그곳에 가면 돈키호테를 만날 수 있을 거라 했다. 게다가 돈키호테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거라고 축복을 내리듯 말했다. 그리하여 나는 알칼라 데 에나레스 행 기차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상상 속 세르반테스의 지령처럼 그곳에 가면 돈키호테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반드시. 이것은 마치 사명이자 계시처럼 내게 다가왔고 그곳에서 진짜 돈키호테를 만나면 돈키호테에 대한 역작을 분명 쓸 수 있을 거라는 기운이 팍팍 느껴졌다. 나는 까냐를 다시 주문했다. 스페인 아줌마가 제법이라는 눈빛을 보내며 냉장고에서 새 얼음잔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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