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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Feb 17.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9

일상


이국의 도시에서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소설가는 그렇게 달려야만 했다.   



마드리드에서도 이제 일주일째. 슬슬 루틴이 잡혔다. 먼저 이곳에 온 후 일일일와인(1일 1와인)에 하몽과 치즈 최대한 많이 먹기 도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2만원 대 와인이 이곳에서는 불과 5유로! 하몽과 치즈는 일단 구하기도 힘든 것들이 이곳에선 싸게 차고 넘치니 구매를 안 할 수가 없고, 사다 놓으니 안 먹을 수가 없는 그런 선순환이 매일 밤 지속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마드리드 사람들처럼 야행성 인간이 될 수 있었고 몇몇 마드리드 아재들 마냥 넉넉한 뱃살도 구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벽 1시에 잠들고 아침 9시에 깨어나는 하루 8시간 수면의 인간적인 삶을 구가하게 되었다. 9시에 일어나 밍기적 거리다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다. 크고 아름다운 아치형 나무 창문을 열면 막 동이 튼 아침 하늘이 펼쳐지고, 환기를 시키며 나는 반바지에 티셔츠 러닝화를 신고 방을 나선다.


버킷리스트까지는 아니지만 그런 로망이 있었다. 분주한 서울 시내 출근시간에 홀로 운동복을 입고 광화문 광장 옆으로 조깅을 하는, 외국계 회사 임원 느낌의 이방인을 보았을 때의 낯섦과 여유. 나도 외국에 가면 운동복에 러닝화를 신고 낯선 도시의 거리를 달리고 싶다는 열망. 산책은 생명과도 같고 달리기는 보약과도 같은 내게 해외의 도심 한복판을 달리고 싶다는 그러한 로망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출발할 때 나는 돈키호테 종이책의 빈자리에 라면만 채운 게 아니라 최애 조깅화인 아식스 젤 카야노를 구겨 넣은 것이다. 젤 카야노를 소개받고 나서는 달리기가 수월해졌다. 발볼이 넓은 평발이라 러닝화에 민감한 편인데, 젤 카야노는 신고 나면 달리고 싶어 몸이 붕붕 뜨는 느낌까지 받는다. 요즘 같은 시절 일본 제품을 홍보하는 꼴이라 좀 민망하지만 재작년에 산 제품이니 요것만 마저 신겠습니다요. 이해 부탁드려요.


매일 아침 러닝마다 만나는 분수대


각설하고, 마드리드로 오며 러닝화와 운동복을 챙겨 온 건 신의 한 수였다. 사람은 자기가 평소에 끌렸던 한 순간을 체험하고 싶어 하고 자연스레 그것을 머릿속에 각인시킨다. 러닝이라는 일상적 행위를 이국의 도시에서 해보고 싶다던 막연함이 실제로 재현되던 순간은 정말이지 짜릿했다. 레지던스를 나와 출근하는 마드리드 시민들을 하나 둘 제치며 달려가는 내 모습이 마치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가벼운 호흡으로 아직 덜 뜨거운 아침 햇살과 예상보다 강한 맞바람을 맞으며 거리를 달린다. 신호등 앞에서 시민들과 함께 멈춰 선 채 신호가 바뀌면 가장 먼저 치고 나간다. 이제 익숙해진 거리를 돌아 다시 처음 가보는 거리를 향해 속력을 올린다. 일교차가 큰 마드리드의 초가을 아침도 이마에 땀이 솟아나는 걸 멎게 하진 못한다. 나는 달리고 있다. 여행객은 부지런히 여행지를 둘러보지 숙소 부근을 달릴 일은 드물다. 그러기에 아침 러닝은 내가 여행객이 아니라 이곳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행위이기도 했다.


러닝을 마친 뒤 샤워를 하고 조식을 먹는다. 그리고 스페인어 공부와 여행 정보를 체크하고 11시쯤 시내로 향한다.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시내 여러 곳을 쏘다니며 여행객 흉내를 낸다. 왕궁도 가보고 대성당도 가보고 광장과 광장 사이를 오간다. 가게와 거리를 수차례 반복해 다니며 길도 익힌다. 내비게이션에 좌표를 입력하듯 온몸에 마드리드 거리와 건물을 접수해 넣는다. ‘돈키호테의 식당’ 탐험도 이어진다. 백 년이 넘게 운영되어 온 추로스 맛집 산 히네스는 제대로였다. 특히 ‘뽀라’라고 불리는 두꺼운 추로스는 문어다리 같고 짭짤한 게 꽤 괜찮았다. 하지만 관광객들의 미어터짐으로 인해 줄을 서야 했고, 24시간 영업으로 인해 직원들의 서비스는 개판 오 분 전을 향해가고 있었다. 마치 방송을 막 탄 맛집이 넘치는 손님들로 인해 개념과 맛이 가출하는 경향과 상당히 비슷했다. 리스트 제외.


산 히네스는 늘 미어터진다. 그럼에도 추로스는 언제나 진리



산 미겔 시장은 제대로 관광지 재래시장의 표본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다양한 음식을 골라 중앙 테이블에 앉아 먹을 수 있어서 좋았는데 가격대가 싸진 않아 시장이라기보다는 맛집을 모아둔 백화점 푸드코트가 떠올랐다. 이후 이곳보다는 주택가에 자리한 현지 시장들을 하나 둘 발견하게 되었고, 그쪽이 훨씬 더 만족스러웠음을 밝힌다. 그리고 마드리드에도 맥덕이 있지 않겠냐며 찾아간 맥주집 루이비오스도 훌륭했다. 마드리드 시내 관광지가 아닌, 우리로 치면 서대문구 홍제동쯤 되는 곳에 위치한 이 맥주집은 버거와 맥주로 유명한 곳인데, 세상에 그렇게 큰 돼지고기 패티와 감자튀김 폭탄은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은 미국 국도변의 그릴 바 같은 느낌이다. 덩치가 큰 미국 사람들이 칼로리에 개의치 않고 먹는 양 많은 음식을 따라한 느낌. 물론 맛도 수준급이다. 주인장은 맥덕 답게 두툼한 뱃살과 맥주 거품이 잔뜩 묻으면 그럴듯해 보일 수염이 덥수룩했는데, 마호우 생맥주부터 유럽 여러 양조장의 크래프트 비어를 냉장고에 그득 쟁여두었다. 낮술의 부담에 마음껏 다 먹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지만, 돈키호테의 식당에 등재되었으므로 반드시 재방문할 것이다.


맥덕들이 좋아할 루이비오스. 손님인 공사 십장 아저씨도 친절했다는!



그리고 참피뇽 재방문. 마침내 버섯요리와 사과주에 조린 순대를 모두 먹고야 말았다. 무이 비엔! 께 부에노! 께 리코! 이곳은 확실히 맛집이고 확실히 한국 사람이 많다. 오랜만에 한국 사람들의 대화를 라디오 사연처럼 들으며 하몽 조각을 육즙과 함께 품은 양송이버섯을 우적이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지난번 짜디짠 실패(앤초비, 왜죠?)가 만회되었고, 지금 선택이 힘들면 다음번 선택까지 생각하라는 금언이 떠올랐다. 참피뇽, 역시 돈키호테의 식당 등극이다.


그렇게 일주일을 쉬지 않고 쏘다녔다. 하루에 평균 8~10킬로를 달리고 걷고 하다 보니 레지던스로 돌아올 때면 허벅지와 오금 인대가 당기곤 했다. 그래서 쉬어간다는 핑계로 돌아오며 단골 카페에 들린다. 그렇다. 단골 카페도 생겼다. 레지던스 부근에 있는 랏츠 커피라는 곳으로, 해맑은 미소의 스페인 알바생이 반갑게 맞아주고 커피도 싸고 맛있다. 쿠폰에 도장을 열 개 찍으면 한잔 무료인 것도 고국을 떠올리게 해 반가웠다. 이곳에서 에스프레소 토닉이란 걸 처음 먹었는데 카페인이 달달한 탄산과 섞여 오묘한 쾌감을 주는 맛이다. 나는 따가운 햇볕이 절정에 치달은 3~4시경 이곳에 와 콜드브루나 에스프레소 토닉을 마시며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돈키호테의 후예가 타 주는 커피를 홀짝이며 돈키호테에 대해 조금씩 파고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동력이 부족했다. 마드리드의 일상에 안착하긴 했는데 그래서일까 나만의 ‘돈키호테 행진’은 길이 막혀 정체된 느낌이었다.


오후의 에스프레소 토닉 한 잔은 정신을 번쩍 들게 해 준다. 뒤편 실루엣 사내는 우연히 찍힌 동네 총각



마드리드 도착 일주일째 되던 날, 일요일에 열린다는 500년 된 엘 라스트로 벼룩시장을 찾았다. 이곳은 역사와 규모도 대단하지만 소매치기의 위험도가 최고조인 곳으로도 유명하다. 나는 작정하고 운동복 바지에 운동화, 바람막이 점퍼를 입어 날렵하게 몸을 만들었다. 그리고 가방에 여권과 지갑 핸드폰까지 다 넣고 자물쇠로 가방 지퍼를 잠갔다. 벼룩시장 부근 라티나 역에 도착하자 나를 비롯한 승객 모두가 일제히 시장 쪽으로 나간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들 가방과 핸드백을 배 쪽으로 향해 고쳐 멘다. 관광객들도 다 아는 것이다. 이 엄청난 신경전 속에서 소매치기를 성사시켜야 하는 집시들도 치열하고, 그럼에도 배에 배낭을 둔 채 벼룩시장 체험을 즐겨야 하는 관광객들도 긴장이 넘친다.


나는 모든 훔쳐갈 만한 것들(지갑, 여권, 핸드폰)을 가방에 때려 넣고 잠근지라... 놈들이 훔쳐갈 건 내 그것 두 쪽과 가방에 매달린 자물쇠 정도? 내 그것은 물론이고 자물쇠를 훔쳐갈 리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매우 여유 있게 장사진을 이룬 벼룩시장 초입부터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것저것 살피기 여념이 없었다. 엘 라스트로 벼룩시장은 한마디로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시청 광장 꼴이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거리를 파도처럼 함께 쓸려가며 이것저것 살피고 흥정하고 구매하고 다투고 아주 가지가지다. 그 와중에 발칸반도에서 온 것 같은 밴드가 아코디언에 플루트에 사각 나무 타악기(이거 이름이 있는데...)에 트럼펫을 불어대며 흥겨운 리듬을 연주한다. 정말이지 에밀 쿠스트리차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음악이다. 한동안 그걸 즐기다 동전이라도 주려고 보니 자물쇠를 열어야 한다. 돌아서 다시 벼룩시장을 걷다 사람들의 물결이 최고조인 구간을 목격한다. 마치 급류가 소용돌이치는 것 같은 인파에 감격하며 사진을 찍으려고 핸드폰을 찾으니 가방 안이다. 역시 자물쇠를 열어야 한다. 음... 자승자박이다.


여행 중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걸 질색하는 나로서는 이번 벼룩시장 탐방이 나 자신을 트레이닝하는, 마치 정신교육 행사와도 같았다. 20대 어느 시절, 예루살렘의 한 호스텔에서 FM2 카메라를 잃어버렸을 때 느낀 상실감과 타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후로 여행 중 보안을 생명처럼 여기고 철저함에 철저함을 더했다. 세이프티 박스를 쓰는 걸 아끼지 않았고 숙소에서는 복도에 잠시 나갈 때도 방문을 꼭 잠근다. 그런 강박이 이후 수많은 해외여행 중 어떠한 털림이나 분실도 겪지 않게 해 주었다. 하지만 악명 높은 이 벼룩시장에서 안 털리고 잘 다녀왔다고 해서 여행을 잘한 것일까? 애초에 아무것도 안 사고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기로 하고 그냥 눈으로 몸으로 체험만 하고 온 벼룩시장. 여전히 강박이 있고 첫 방문이니 아쉬운 대로 돌아가자. 하지만 다음에는 꼭 무언가를 사고 나누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십 유로만 가지고 가자. 털리더라도 이십 유로로 값진 경험을 샀다고 하자.


벼룩시장 체험을 끝으로 일요일이 다 지나갔다. 지난주 일요일 도착 이후 일주일이 흘렀다. 마치 한 달은 지난 듯하다. 그렇게 마드리드에 녹아들고 있었다. 이제 적응은 끝났으니 본업에 충실해야 할 때가 다가왔다. 돈키호테에 대해 다시 파고들어야 한다. 지난번 스페인 광장에서의 처참한 패배는 잊지 않고 있다. 사라진 돈키호테를 찾아야 한다. 어디서? 어떻게? 생각을 멈추지 않다 보니 돌아오는 길에 어떤 힌트가 보였고,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숙소로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 스페인 작가들로부터는 여전히 답장이 없다. 그들이 혹시 토지문화관 휴게실에서 승부욕 강한 한국 작가와 탁구를 치다 치욕적 패배를 당한 건 아닌지, 술고래 한국 작가와 대작을 하다 치명적인 술병을 앓은 건 아닌지, 싸이와 김치, BTS 등 국뽕 질문에 질려 코리아의 코빼기도 보기 싫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체 왜 내 메일에 답이 없는 것인가? 그날 밤, 자기 합리화라는 수면제가 수면의 질을 보장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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