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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Feb 15.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8

음식


너가 고르는 것이 너를 말해준다. 고로 너는 지금...



레지던스에 돌아온 나는 허기를 참으며 저녁 식사 시간을 기다렸다. 저녁 식사는 무려 9시에 시작된다. 역시 여행은 낯선 곳의 시간과 음식에 적응하는 게 시작이란 걸 다시금 깨닫는다. 저녁을 기다리는 동안 이곳에 안착한 것을 여러 곳에 보고하기로 했다. 먼저 나를 이곳에 보내준 토지문화관 담당자와 스페인 AC/E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가족들과 몇몇 친구들에게 마드리드에서 별 탈 없이 하루를 잘 보냈다고 메시지를 전했다.


‘이곳은 햇살이 뜨겁고 바람도 세고 모든 식사 시간이 두 시간 늦어. 숙소는 아늑하고 광장에는 사람이 그득해. 그리고 돈키호테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어.’


서울에서라면 2차를 시작하거나 3차 자리를 물색할 9시 즈음, 드디어 첫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에는 예의 대학생 그룹이 모여 있었고 다른 손님들은 거의 없었다. 대학생 친구들 중 나를 마중 나왔던 친구들이 눈인사를 한다. 눈인사를 나누는 순간 작고 깔끔한 인상의 젊은 웨이터가 나를 맞이한다. 올라. 부에 나스... 를 마저 말하기 전에 일인 테이블로 안내되고 그가 룸 넘버를 물어본다. 내가 대답하자 그는 메뉴판을 보여주며 오늘의 메뉴를 설명하는데, 이 친구 영어가 짧다. 나 역시 스페인어가 짧다. 그리고 이곳의 점심 저녁은 나름 코스인지라 메뉴 1, 메뉴 2, 디저트를 다 결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스페인어 메뉴판을 든 채 웨이터 친구의 스펭글리시 설명을 들으며 어렵사리 첫 메뉴를 선택하는 데 성공했으나 두 번째 메뉴는...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어 선택할 수 없게 되었다. 열심히 설명을 하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만 넘쳐가는 가운데 비행기에서부터 계속된 메뉴 선택 실패의 트라우마가 재생되는 순간이었다. 결국 나는 추천 메뉴를 부탁했다. 그러자 웨이터가 알겠다며 눈을 찡긋하고는 사라졌다. 나는 무엇이 나올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물을 들이켰다.


메뉴 1은 토마토에 모짜렐라 치즈를 얹은 매우 익숙한 요리였다. 만족. 그런데 혼자 먹자니 은근 심심하기 그지없었다. IT강국의 작가답게 스마트폰을 꺼내 그것을 살피며 먹는데 참으로 쓸쓸하다. 한국에서의 혼밥 혼술에는 꽤 자연스러운데 이게 또 외국이 되니 익숙지 않다. 돈키호테가 왜 산초를 데리고 다녔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는 혼밥이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혼자고 혼자가 되기 위해서 여기에 왔다. 그리하여 나는 7시간 전 한국에서 벌어진 프로야구 경기 결과를 꼼꼼히 확인하며 혼밥을 이어나갔다.   


토마토로 만든 스페인 음식은 다 맛있다고 보면 됩니다. 여러분.

 


그리고 메뉴 2가 나왔다. 뭐지? 그것은 작은 닭을 조린 음식 같았다. 나는 한동안 그것의 정체를 관찰하다가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살을 바른 뒤 먹기 시작했다. 식감은 닭과 비슷했지만 크기로 보니 절대 닭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메추리? 아니면 비둘기? 혹은 갈매기? 궁금증과 식욕을 함께 불태우며 계속 살점을 발라먹었다. 확실히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앤초비 작은 접시에 불과했던 오늘의 부족한 영양분 섭취가 중요한 때였다. 나는 꾸역꾸역 먹었다.


다시 봐도 정체를 알기 힘든 모양새.  깍뚝  감자는 확실히 맛있었네요  



후식으로는 사과가 나왔는데 내가 그것을 무딘 나이프로 깎아먹자 웨이터가 불편해 보였는지 다른 후식으로 바꿔주겠냐고 물어왔다. 오 친절한 그대여. 그러나 노 프라블럼. 나는 끝까지 꾸역꾸역 깎아먹었다. 역시 사과와 배는 한국이 최고였다. 이곳에서는 오렌지와 바나나, 토마토에 주력하기로.


레지던스에서의 첫 저녁 정찬은 무료 제공이라는 혜택에 감사했지만 생각만큼 만족스럽진 못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메뉴 2의 고기향과 느끼함을 곱씹으며 숙소로 돌아와 낮에 사 온 마드리드 맥주 '마오우(Mahou, 영어식 발음은 마호우)'를 들이켰다. 마오우는 뭐랄까, 한국의 맥스와 비슷했다. 라거 맥주의 심심함에 크리미함이 조금 첨가된 맛. 한국 크래프트 씬의 네임드이자 양조장을 운영하는 친구 정사장이 먹는다면 좀 더 다양한 평을 할 수 있겠지만 내게는 그냥 맥스일 뿐이었기에, 앞으로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마오우를 마시기로 했다. 아무튼 9시에 시작되는 저녁식사라는 부담과 생각만큼 맛있지 않았던 음식들에 저녁 식사를 거르고 아침 점심 두 끼만 먹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메뉴 선택 시 느낀 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으로 인해 시원스쿨 스페인어 온라인 강좌 수강을 재개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생긴 건 덤이었다.


13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마드리드 대표 맥주 마오우!



한국에서도 여러 문학관에 입주해 생활해 본 바 있다. 적게는 대여섯 명이 지내는 문학관부터 토지문화관처럼 문인과 예술가까지 열다섯 명이 함께 지내는 곳까지... 참으로 대한민국 곳곳에 자리한 문학관을 찾아가 지냈다. 작품과 나와의 직면을 위해 혼자가 되기 위해 가는 곳. 그런데 문학관에서는 혼자이자 혼자가 아니다. 물론 혼자서 글을 쓰기 위해, 고립감과 작업의 능률을 위해 문학관을 찾는 게 기본이지만 문학관이 위치한 공간은 대부분 한적한 시골의 외진 곳이다. 그 작은 공간에서 짧게는 한 달에서 많게는 석 달까지 함께 입주한 동료 작가들과  삼시세끼 밥을 먹고 여가 시간도 같이 보내며 지내야 한다. 자연스레 작가들 간에 서로 교류도 하고 친분도 생긴다. 함께 문학관 부근 명소를 찾아 답사나 여행을 가기도 하고 주변 마을 행사나 축제에 동행하기도 한다.


즉 문학관에서는 여러 사람과 음식을 나누고 서로의 마음도 나누게 된다. 그것이 좋기도 하고 때론 마감에 집중하느라 다른 입주 작가들과 친분을 나누는 것 자체가 버거울 때도 있다. 물론 기본적으로 글 작업이 우선이지만, 함께 지내는 만큼 열린 마음을 가지고 상대를 대하고 서로 좋은 시간을 나누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지난해 마드리드 이곳에 머물렀던 김이정 작가님께 레지던스 생활을 물었을 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토지문화관이나 다른 한국 문학관과는 전혀 다르다고. 동료 작가들이 있어서 같이 식사하고 무언가를 나누고 그러는 게 아니라 오직 혼자서 지내는 시간이 충만할 뿐이라고. 아 그러면 마드리드에서는 철저히 혼자 생활하며 작가적 고독을 만끽하고 돈키호테를 쫓는 일에만 집중하면 되겠구나.라고 기쁘게 생각한 기억이 난다.


하지만 혼자 저녁을 먹고 들어온 숙소. 어둑한 방 안에서 이해하기 힘든 TV 속 스페인 방송을 틀어놓고 밍밍한 맥주를 마시다 보면, 쓸쓸함과 심심함이 엄습해온다.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으로 한국 소식을 확인하고 유튜브로 예능프로 클립을 보다 보면, 내가 마드리드까지 와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회한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당장 시내로 나가 마드리드의 밤 문화를 체험할 것도 아니다. 시차 적응과 낯설음일 따름이다. 마드리드에서의 석 달은 여행이라기보다는 체류이고, 써야 할 이야기와 정리해야 할 삶의 갈음이 있다. 그래, 이곳에서의 일상을 살아나가야 한다. 이곳은 한국의 문학관도 아니고 나만의 작업실도 아니고 올해 가을의 거처일 따름이다. 내가 마드리드에서 거하며 지내는 공간. 이곳을 베이스로 글도 쓰고 돈키호테도 쫓아야 하고 일상도 견뎌내야 한다. 그러자 머리가 정리되었고, 취기의 피곤이 섞여 잠이 오기 시작했다. 이제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 서울에서 2차를 막 끝내고 3차를 가려는 시간에 나는 잠이 든다. 스페인 사람들의 야행성을 배울 날을 기약하며 오늘은 먼저 뻗는다.


뻗으려다가 퍼뜩 오전에 보내 놓은 메일 생각이 났다. 나는 개구리 튀어나가듯 침대에서 나와 노트북을 켰다. 메일을 확인한다. 가상의 스페인 친구들에게선 아무런 답 메일도 없다. 하긴 겨우 하루 지났는데 바로 메일을 확인할 리가 없지. 설마 확인하고 무시한 건 아닐 거야. 나는 그들이 적어도 이삼일에 한 번은 메일을 확인하는 라이프 사이클을 지녔길 바라며 다시 잠을 청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다섯 시. 밖은 컴컴하고 나는 아침잠 없는 노인네 꼴이다. 하지만 서울은 낮일 터. 나는 아내에게 연락했다. 어떻게 잘 먹고 지내냐는 아내의 말에 전날 저녁 먹은 요리에 대해 설명했다. 찍은 사진을 보내주고는 작은 새 종류이니 메추리나 비둘기가 아닐까 한다는 내 추리에 아내가 놀라운 의견을 제시했다.


“토끼 아냐?”


헉. 그러고 보니 전체 모양과 그 콩팥 같아 보이던 함께 요리한 내장 부분과 기타 등등... 그러자 모든 의혹이 서서히 걷히고 어느새 귀를 쫑긋거리며 요리의 정체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 토끼였다. 나는 메추리 고기로 착각하고 토끼고기를 먹은 최초의 한국인일지도 모르겠다. 메뉴 선택의 희비는 계속될 듯하다. 무엇을 먹을지 어디를 갈지, 무엇을 할지 언제 잠들지, 그런데 그런 걸 결정하는 게 일상의 일이다. 마드리드의 일상이 내게 계속 기발함을 안겨주길 기대할 따름이다. 그렇게 일상이 자리 잡고 나면 돈키호테를 찾는 일도 본격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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