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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연 Feb 13. 2020

돈키호테를 찾아서 7

좌절


스페인 어느 광장에서도 쉽사리 마주치기 어려운 돈키호테와 그의 종복



물의 어원이 ‘수불’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적절하지 않을 수 없다. 불을 품은 물. 불이 되는 물. 그 자체로 모순적이지만 술이란 것 자체가 모순덩어리 인간을 무디게 만들거나 더 날카롭게 만든다는 점에서 또 맞아떨어진다.


태양의 광장에서 쏟아지는 강렬한 햇살을 원했지만 또 견디기 힘들어 뛰쳐나온 나 역시 모순덩어리다. 돈키호테를 찾아 나선 지 얼마 됐다고 벌써 뒤돌아 술과 음식을 찾아 나선 것도 얼척이 없다. 하지만 간밤의 허기가 준 강박이랄까, 당장 제대로 된 식당에서 스페인 대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욕구가 하늘을 찔렀다. 나는 휴대폰 메모장을 열고 먹부림 리스트 ‘돈키호테의 식당’을 열었다.


‘돈키호테의 식당’이란 명명은 연남동에 자리했던 천운영 작가님의 스페인 식당 ‘돈키호테의 식탁’에서 따 왔다. 지금은 운영을 하지 않지만 몇 차례 찾아가 훌륭한 스페인 요리에 와인을 먹은 적이 있다(총알 오징어로 만든 안주는 정말이지!). 물론 부끄러워 작가님께 후배 작가라고는 말도 못하고 음식만 주구장창 먹었다. 한편으로 천운영 작가님은 바로 이 레지던시와 토지 문화관 사이에 교환 작가 시스템의 첫 번째 선정자로 4년 전 이곳에 묵으신 선배였고, 그때의 스페인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에 ‘돈키호테의 식탁’을 차렸던 것이다. 글쓰기도 요리도 손을 부지런히 놀려야 하는 일. 천 작가님은 스페인에서 돈키호테로부터 받은 영감으로 글쓰기 뿐 아니라 요리도 섭렵한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이곳에 오게 된 나였지만 천 작가님 같은 금손과는 달리 요리 꽝손인 나는 ‘돈키호테의 식당’이라는 맛집 리스트를 작성해 왔을 따름이다.


‘돈키호테의 식당’ 리스트는 아직까지 부실하기 짝이 없다. 시나리오 마감에 집 이사(스페인에 오기 일주일 전 이사라는 거사를 치러야 했다)에 정신이 없는 나머지 맛집을 많이 찾지 못했다. 그러나 걱정은 없다. 돈키호테의 식당은 이곳에 머물며 업데이트될 것이니까. 내가 직접 맛보고 업데이트할 계획이다. 고급 레스토랑보다는 시장 음식이나 길거리 음식이 주고 될 것이지만 그것이야말로 기사와 종복의 소박한 식사에 걸맞을 것이다.


돈키호테의 식당 첫 번째는 '메종 데 참피뇽'이다. 마드리드 여행을 다녀온 분들이라면 김새는 소리를 내실지 모르겠다. 네이버 검색창에 ‘스페인 가볼 만한 곳’을 치면 식당 분야에서 제일 먼저 뜨는 이곳은 여러 가지 타파스를 파는 식당으로, 유명 방송프로그램에서도 소개된 바 있는 버섯요리가 유명한 곳이다. 가게 이름부터 ‘버섯의 집’ 아닌가. 솔 광장을 나온 나는 구글 지도를 보며 마요르 광장으로 향한 뒤 산 미겔 시장과 마요르 광장 사이 골목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곧 가게 간판이 보였다. 들어가니 아직 자리는 여유가 있었고 실내는 동굴을 파 만든 집시들의 거처 같았다. 주변을 살피니 세 테이블 정도... 그리고 모두 다 동양인이다. 한국 분들이신가 귀를 쫑긋하는 사이 웨이터가 와 아이패드를 건넸다. 이걸 왜? 하는 순간 그가 화면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나라별 국기가 아이콘으로 떠 있었다. 아, 메뉴판이 아이패드... IT 선진국의 국민으로서 아이패드 메뉴판을 못 알아본 데 깊은 자괴감을 느끼며 나는 태극기를 클릭했다.


메뉴판 첫 장부터 대표 메뉴 버섯이 나왔다. 이후로 하몽이 어김없이 등장해주고 고추 구이도 맛있어 보이고 스테이크도 값이 좀 나가지만 훌륭해 보였다. ‘대구의 한 종류’라는 제목(구글 직역의 재미)의 생선 요리도 등장하고 사과주에 조린 순대는 매콤해 보여 무척이나 땡겼다. 그래도 일단 대표 메뉴인 버섯을 먹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사과주 순대도 땡기고... 그럼 두 개를 시켜야 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앤초비를 시켰다. 왜죠? 원인은 마리아주에 있었다. 내 의식의 흐름을 뒤쫓아가보자. 음식도 음식이지만 술을 생각하자. 날이 더우니 시원한 술을 마시자. 그럼 맥준데 맥주는 앞으로 줄창 마실 것 아니냐. 그럼 와인을 간단히 하자. 더운 날씨엔 역시 화이트 와인이지. 가만 화이트면 해산물인데. ‘대구의 한 종류’는 뭔가 이름부터 거시기하다. 그렇다면 다른 해산물은 뭐가 있는가? 감바스. 음 이건 한국에서 일주일에 한번은 먹던 것 아닌가. 그러다면, 오 이거다. 매우 이국적이며 내가 좋아하는 올리브도 곁들어져 있는 해산물 요리.


그리하여 나는 지중해 멸치 앤초비가 올리브오일에 염장된 듯한(조리공정은 잘 모르겠다) 앤초비 단품과 둥근 글라스에 1/3쯤 채워진 화이트 와인, 그리고 돌덩이 같은 빵을 제공받았다. 처음엔 맛있고 즐거웠다. 역시 현지 음식을 먹어야 현지에 온 것을 실감하는 것이지. 이 짭조름한 앤초비의 풍미. 죽방멸치를 아무리 담가봐야 이 맛이 나오나. 음 좋아. 근데 좀 짜군. 그래서 빵과 함께 먹어야 하는 거지. 음 빵이 딱딱하군. 정말 돈키호테가 노숙하며 씹어 드실 만한 빵이군. 드시다가 적이 나타나면 언제라도 무기로 사용하게 말이야. 아 딱딱하고 짜고 느끼하고 역시 보통이 아니군. 화이트 와인을 마시자. 음. 한 모금 마시니 한 모금 남았군. 양도 적고 게다가 와인마저 왜 짠 것이냐. 어쩌지. 그럼 물을 시켜야 하나. 물은 돈은 내지. 그렇지 이곳은 물 값이 맥주 값에 맞먹는 유럽연합이지. 


짜디짠 앤초비 요리에 딱딱한 빵, 화이트 와인 한 잔. 왜죠?

   


그리하여 나는 외국에 온 기분을 만끽하며 눈물을 머금고 짠 앤초비를 돌덩이 빵에 싸서 꾸역꾸역 다 먹고 나왔다. 혀가 얼얼하고 입천장이 꺼끌했지만 첫 끼 식사로 후회하진 않았다. 여정에는 늘 시행착오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여정을 막지는 못하지. 그리고 우리는 다시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훌륭히 대처할 수 있다. 메종 데 참피뇽. 넌 다음에 다시 붙는다. 그때는 반드시 버섯을 먹어주마.   


메종 데 참피뇽을 나온 나는 바로 옆에 자리한 마요르 광장으로 갔다. 솔 광장이 광화문이라면 여기는 시청이다. 마요르 광장은 크고 웅장한 사각의 형태로 찬란한 원색 건물들에 둘러싸인 채 지구촌 곳곳에서 온 관광객들을 마구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말을 탄 한 사내의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아까 솔 광장에서 본 것보다 한결 더 멋져 보이는 게... 가만, 저것이 바로 돈키호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나는 서둘러 광장 중앙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가는 도중 산초 판사가 함께 있지 않은 돈키호테 동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당도해보니 동상은 무척이나 위엄이 넘치고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인물의 형상으로, 결단코 돈키호테의 풍모가 아니었다. 이 동상은 스페인 영토를 무어인에게서 회복한 장군이나 프랑코 총통을 몰아낸 정치 지도자급임이 분명하다. 결코 몽상에 빠져 풍차와 싸우는 노인네 기사가 아닌 것이다.


실망한 채 돌아서 마요르 광장을 빠져나가려던 내 눈에 온갖 기념품점이 들어왔다. 사각의 광장을 둘러싼 상점 안에는 스페인 국기를 닮은 노랗고 빨간 상품들이 내가 스페인에서 사가야 할 단 하나의 기념품이요!라며 시위를 펼치듯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점들 중 하나에 작은 인형 크기의 선물용 청동 동상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바로 그곳에 매부리코에 쑥 들어간 안구, 주름과 피곤에 절은 표정의 늙은 기사가 있었다. 옆에는 종복이 분명한 퉁퉁한 체구의 사내가 함께 서 있는 것이 척 봐도 산초였다. 나는 반가운 나머지 휴대폰을 가져가 ‘기념품 돈키호테’를 찍으려 했다. 휴대폰 액정에 담긴 그를 확대하니 돈키호테는 한 손엔 칼을, 다른 한 손엔 세르반테스의 얼굴이 그려진 책을 들고 있었다. 돈키호테가 돈키호테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라니, 돈키호테가 액자소설임을 상징하는 실로 예술적인 장치가 아닐 수 없었기에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시선이 기념품의 어깨 위 갑옷에 붙은 50€라고 써진 종이를 보는 순간 그 환상은 깨져버리고 말았다. 이 녀석은 50유로짜리 쇠붙이일 뿐이다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돈키호테를 들고 있는 돈키호테

                                                              


확실히 진짜 돈키호테도 아니면서 50유로는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진짜 돈키호테를 보고 싶어졌다. 50유로짜리 조그만 쇠붙이가 아닌 커다란 청동 동상으로 된 나의 영웅을 보고 싶어졌다. 그러자 돈키호테 동상이 마요르 광장이 아닌 다른 어떤 마드리드 시내 광장에 있다는 걸 들은 기억이 났다. 솔 광장도 마요르 광장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 휴대폰을 꺼내 검색을 해보니 답은 금방 나왔다. 그 이름도 명쾌한 ‘스페인 광장’. 그곳에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동상이 있단다. 간다. 좋다. 어제는 스페인에 도착했고 오늘은 스페인 광장에 도달한다.


스페인 광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광화문에서 파고다 공원 가는 정도의 거리를 좁은 골목과 대로를 오가며 빠르게 좁혀나갔다. 기계치에 아날로그에 돈 계산도 엉망인 나지만 유일한 장점이 있다면 걷기와 길 찾기다(비록 어제 식료품점은 찾지 못했지만). 지도에서 좌표만 확인하면 대략 방향을 파악하고 빠르게 걸어 길을 찾아나간다. 한번 지난 길은 바로 숙지하고 웬만하면 잊지 않는다. 군대에서도 지도를 그리는 작전병이었으니 지도와 길찾기는 내겐 꽤나 익숙한 일이다. 어느새 자랑을 늘어놓게 된 가운데 나는 15분 만에 스페인 광장 앞에 당도하였다.


광장 앞 지하철 역 이름 역시 ‘스페인 광장’이였다. 그런데 광장은 보이지 않고 그래피티로 떡칠을 한 공사장 가림벽 만이 베를린 장벽처럼 대로변과 어딘가를 분리시켜 놓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걸음으로 건널목을 건너 길고 긴 공사장 가림벽을 마주 걸었고 곧 스페인 광장이 가림벽 너머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맙소사. 스페인 광장은 공사 중. 길고 긴 가림벽이 이어지던 중 마치 잠수함의 창처럼 둥글게 구멍이 나 있는 곳을 발견한 나는 얼굴을 박고 안쪽을 살폈다. 그곳에는 공사 중인 스페인 광장이 마치 비무장지대처럼 아무렇게나 자리하고 있었고, 광장의 중앙에 자리한 돈키호테와 산초의 동상은 커다란 녹색 천막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나의 돈키호테와 산초는 악마의 마법에라도 씌인 듯 녹색 천막 안에 갇혀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스페인 광장은 공사 중

                                                                     


돈키호테를 찾았지만 돈키호테를 볼 수 없었다. 언제나 찾고자 하는 것은 발견하기 힘들고 희망하는 곳엔 다다르기 힘들다. 광기를 동반한 짜증이 순간 멀미처럼 온몸을 뒤흔들었다. 스페인 광장의 돈키호테가 나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그래, 다시 찾자. 스페인은 돈키호테의 나라가 아닌가, 이깟 광장 하나에만 자리한 것은 아닐 터, 내게는 2개월 하고 이십팔일이 남았다. 그동안 그를 어떻게든 찾아내고 마주하리라 다짐했다. 나만의 돈키호테를 찾는 진짜 여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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