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목시펜과 신지로이드
대체 얼마나 많은 약을 먹을 것인가.
나는 유방암 환자다. 아니, 환자였다. 아직도 환자인가? 알쏭달쏭. 일반적으로 말하는 5년 완치 판정을 아직 못 받았으니 환자인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정기적으로 병원 출석도 해야 하고 신경 쓸 것도 아주 많다. 수술을 하고 2년 반이 지나서 겉모습만 봐서는 거칠 것 없는 아줌마처럼 보이기는 하나 아직 중증환자 코드를 적용받고 비싼 치료비를 대폭 할인받아 이용하고 있으니 싫지만 뭐 그런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내가 당해보니 암환자 의료비 부담을 덜어주는 의료보험제도에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를. 꾸벅!!!
수술과 항암 이후 타목시펜이라는 경구 항암제를 지금까지 복용 중이다. 요새는 보통 10년을 달고 살아야 한다고 하니 아직도 먹을 시간이 많이 남았다. 하루에 한 알, 직경 1센티도 되지 않는 약에 의지하며 산다. 그래도 약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 감사한다. 항암제라 하면 기분이 나쁘니 영양제쯤으로 가볍게 생각한다. 기분이 가끔 정상궤도에서 이탈하지만 않으면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상선 호르몬 불균형도 찾아왔다. 전체적으로 뭐 균형이 깨진 모양이다. 갑상선 기능저하증. 신지로이드라는 예쁜 이름의 약도 매일 하루에 하나씩 아침 공복에 먹는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물 한잔과 핑크색 예쁜 신지로이드를 먹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흡수율 때문에 반드시 공복에, 복용 한 시간 후 식사를 권장하는 약이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원초적인 모습으로 신지로이드를 먹고 가족들의 아침을 준비한다.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식사하고 타목시펜을 먹으면 하루가 시작된다. 칼슘, 오메가 3, 종합비타민, 유산균도 빠짐없이 챙겨 먹는다. 요일별로 약을 담는 예쁜 통도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두었다. 약만 먹어도 배부를 지경이다. 거짓말이다. 약을 아무리 먹어도 배는 고프다.
여기에 더해 일주일에 두 번씩 압노바 주사를 맞는다. 종양수술 후 환자들이 맞는 주사다. 한 달에 한번 병원을 방문에 8개의 주사약을 받아와 내가 직접 복부 양쪽에 번갈아 가며 바늘을 찌른다. 지금까지 100개도 더 맞았는데 아직도 주사 놓을 때는 긴장감이 두둥!. 채혈 검사할 때도 고개 돌려야 안심이 되는 내가 직접 주사를 놓으려니 처음에는 손이 달달 떨렸다. 지금은 조금 능숙해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뱃살이 많아 잡고 놓기에 용이하다. 말랐으면 주삿바늘이 엄청 아팠을 텐데 말이다. 한번 날씬해져서 비교해 보고 싶다.
이렇게 루틴으로 하는 나의 병원놀이는 이미 화려하다. 정기검진을 받으며 긴장하고 결과를 기다리며 불안과 싸우고 약을 챙겨 먹으며 흔들리는 멘털을 부여잡고 똑바로 걸으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다.
약은 이제 더 늘리고 싶지 않았는데 언제 한 번이라도 내가 아프고 싶어 아팠던가? 갑자기 팔다리에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했다. 작은 것들이 나기 시작하더니 거짓말을 보태 빛의 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미관상 흉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간지러움은 가히 고문에 가깝다. 미관 따위 그런 것들은 이제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간지러움으로 인해 정신분열 증세가 올 지경이다. 밤에 잠을 못 자고 긁어대다 침대시트에는 피가 묻기 일쑤였고 나의 짜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피부과에서 때려 붓는 스테로이드와 항히스타민제로는 한 달 가까이 되어도 차도가 없었다. 오히려 더욱 퍼져 간지러움에 삶이 피폐해지고 있었다. 이게 고문이라면 비밀 따위는 숨도 안 쉬고 불어버릴 것 같았다. 급기야 동네 피부과 의사는 나를 대학병원으로 보냈다. 소견서를 써주고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지겹다. 병원. 또 늘어나는 약들. 서글퍼졌다.
밤새 잠 못 자고 긁으며 연고를 바르고 간신히 잠들다 깬 후 신지로이드를 삼키고 타목시펜을 먹고 거기에 더 보태 항 히스타민제와 스테로이드제를 먹는 내가 불쌍했다. 그렇게 난 또 대학병원 피부과에 소견서를 들고 앉아 기다렸다. 예쁘게 생긴 착한 교수님이 안쓰러워하면서 졸레어라는 주사처방을 했다. 천식환자들에게 쓰는 약인데 특발성 두드러기 환자들에게도 처방하는 주사다. 비급여로 30초도 안 걸리는 주사 한방에 27만 원이나 한다. 간지러워서 미치는 것보다는 돈을 쓰는 것이 낫다. 새로운 거 참 많이도 한다. 이래서 많이 아프면 면허 없는 반의사가 되나 보다. 난 그 주사를 신비의 묘약주사라 이름 붙였다. 감사하게도 나에게 그 약이 잘 맞았다. 거짓말처럼 두드러기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못된 성질머리로 그전에 긁어놓은 팔다리에는 딱쟁이가 져서 상처가 남아있었지만 간지러움이 사라지니 그런 것들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간지러움은 나의 모든 생활에 방해요소였다. 두 번째 졸레어 주사를 맞기로 한 날이 다가오고 있는데 갑자기 목이 아프다.
목에 먼지가 꼈나. 답답하고 따끔거린다. 머리도 띵한 것이 전형적인 목감기 증상을 보인다. 집 앞 이비인후과를 가서 또 다른 약봉투 하나를 추가한다. 식탁에 널브러진 약봉투가 집주인의 건강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거기서 멈췄어야 하는데. 주책없이 기침이 계속 난다. 뉴스에서 코로나가 유행이라며 떠들어댄다. 그렇다면 혹시 난 유행에 민감한 여자인가? 자가키트를 뜯었다. 코 깊이 찔러 넣은 면봉을 액체에 요란스럽게 흔들어 섞은 뒤 한 방울 키트에 떨군다. 복권은 당첨을 기다리며 두근두근한다면 키트는 꽝이길 바라며 두근두근했다. 역시나. 난 유행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두줄이다. 임신테스트기랑 비슷하게 생긴 키트에 선명한 두줄이 나왔고 난 코로나까지 걸렸다. 정말 가지가지한다. 너무하지 않은가? 결국 신비의 묘약 졸레어 주사는 코로나 이벤트로 연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시 찾은 이비인후과에서는 별 특별한 약은 없으니 감기약으로 처방을 해주었다. 목만 아프고 기침이 좀 많아서 불편할 뿐 다행히 열이 없다. 그래도 아플 때마다 항상 다행인 것이 하나씩 있어서 감사한다.
식탁 위에 수많은 약들을 보면서 늘 약봉투로 가득했던 부모님의 협탁이 떠올랐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것은 약봉투가 늘어나는 일인 것이다. 내가 조금 빨리 늘어나긴 했다만 그만큼 일찍 관리했으니 얼마나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인가. 내 키 163CM. 나를 지탱해 주는 약의 지름은 채 1센티도 되지 않는다. 저 작은 알약이 나를 살리는 힘을 주고 있다니. 만물의 영장이라 으스대는 인간이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에 속수무책이고 몇 센티되지도 않는 작은 혹에 생사를 왔다 갔다 한다. 알록달록한 나의 수많은 약들을 보며 더 이상 약이 추가되는 일은 없기를 기도한다. 혹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추가된다면 그 약은 반드시 한방에 효능을 발휘하기를.
이렇게 나의 여름은 수많은 알약들과 주사와 함께 지나가고 있다. 다행히 코로나도 물러났고 두드러기도 전사했다. 안고 가야 하는 타목시펜과 신지로이드는 여전하지만 그래도 이만해서 다행이다. 더위가 아무리 설쳐봐야 한 철이고 선선한 바람은 반드시 불어온다. 사는 것도 모든 일은 결국 다 지나간다. 그러니 잘 버티는 사람이 승자다. 승자가 되기 위해 오늘도 난 예쁘게 약통을 채운다. 형형색색 예쁘구나. 잘 부탁한다.
약 얘기를 한가득 쓰다 보니 병약해 보이는 환자로 오인할까 봐 첨언하자면 난 아주 건강한 모습에 여전히 예쁘다. 지나친 걱정은 안 하셔도 된다는 뜻에서 예쁘다는 거짓말도 해본다.
p.s 텃밭연재는 이런 이슈들로 인해 방학이 길어졌습니다. 곧 다시 쓰도록 힘을 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