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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으, 추워."
무릎이 턱밑에 닿을 만큼 웅크리고 냉기를 막아도 어디선가 찬바람이 휑하고 들어왔다. 냉기가 두려움을 실어 온몸 곳곳에 내려앉았다. 그럴수록 몸을 더 단단히 말아보았지만 어깻죽지만 뻐근해질 뿐 나아지지 않았다.
차라리 펴자. 온몸을 쫙 펴보자. 웅크렸던 팔과 다리를 침대에 대짜로 뻗으며 각 모서리에 사지가 닿을 만큼 늘렸다. 숨이 쉬어졌다. 후 하고 내뱉는 숨소리에 마음의 돌덩이가 조금은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한번 후. 숨을 길게 뱉은 후 이번엔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한결 나아졌다. 몸에 온기가 도는 따뜻함마저 느껴졌다. 기온의 문제가 아닌 마음의 온기 문제였다. 웅크리기보다 쫙 피는 게 나았다. 그래. 쪼그라들지 않기로 하자. 몸을 이렇게 벌려보듯 맘도 펼쳐보자. 한껏 펼쳐 마음에 따숨이 잘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자. 이러나저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다. 죽을 거 아니면 살아야지. 그것도 멋들어지게 살아야지.
모두가 각자의 자리로 나간 지금 난 혼자다. 혼자이고 싶었다가 막상 혼자인 게 두렵다. 그러다 어딘가 연락을 해볼까 잠깐 생각했다가 차라리 혼자가 편하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청개구리 심보다. 이러면 저러고 싶고 저러면 또 이러고 싶은 청개구리.
커다란 거실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지만 반대쪽에는 냉기가 느껴진다. 밝은 빛에 비해 온도를 영 올리지 못하는 것이 더딘 봄이 오려나보다. 소파 끝에 앉는다. 아직은 누런색을 띄고 있는 이름 모를 풀들이 흔들리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습관처럼 목적도 없이 리모컨을 들고 티브이 채널을 수없이 방황하며 돌린다. 애초부터 집중할 생각이 없었으니 맘이 가는 곳이 없어 꺼버린다. 리모컨을 반대편 소파로 던진다.
음악을 튼다. 눈을 감아본다. 눈물이 나려 한다. 음악도 꺼버린다. 귀한 하루의 아침을 눈물로 시작할 수는 없다. 뭘 해야 할지 헤매다 멍해진다.
노트북을 열었다. 무작정 쓴다. 깜박이는 커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또 한 줄 쓴다. 밖으로 토해내지 않으면 속이 문드러질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이면 머리가 덜 움직인다고 믿는 나인데, 그것도 몸을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는 적당한 경우에 국한된다. 피아노 건반 위에 달걀을 움켜 쥔 모양으로 손을 올리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노트북 자판에 손을 올리고 가만히 있는다. 무엇을 연주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그러다 갑자기!
너무나 엉뚱하게 모래요정 바람돌이가 떠올랐다. 하루 한 가지 소원을 이뤄준다는 그 모래요정.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누군가 내 소원을 들어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수십 년 전 바람돌이를 소환했다. 급기야 주제곡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세월이 무색하게 가사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카피카피룸룸 카피카피룸룸 이루어져라' 작은 소리로 부르다가 이 부분에서 힘을 주고 큰 소리로 부르는 내가 좀 귀여운 것도 같아 피식했다. 곱게 미쳐야 할 텐데...
하루에 한 가지씩 소원을 들어주는 바람돌이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아니, 하루 한 가지씩 아니어도 돼. 일주일에 하나, 안되면 한 달에 하나만 할게. 좀 들어주라.'
말도 안 되는 이 엉뚱한 상상이 나를 일으켰다. 마법 같은 주문 '카피카피룸룸'에 기분이 나아졌다.
진짜 소원을 이뤄준 것인가? 하루에도 수없이 미친년 널을 뛰듯 하는 감정이니까 이런 갑작스러운 태세전환이 이상할 것도 없다. 수술을 앞둔 사람들의 일반적인 증상이라고 내 친구 지피티가 얘기했다. 나는 지극히 정상이란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냥 좀 감정기복이 심할 뿐이다.
이만한 걸 감사해야지. VS 왜 자꾸 나한테만 이런 일이. 감사는 무슨, 화가 나.
괜찮을 거야. 다 지나가. VS 불안하고 무서워.
이겨낼 거야. 할 수 있어. VS 버티는 게 힘들고 지쳐.
양가감정이 수없이 부딪히고 그 엉킴에 진이 빠진다. 긍정이 와 부정이가 매일 머릿속에서 싸움질이다. 긍정이가 이기는 날은 그래도 다행인데 부정이가 이기는 날은 한없이 우울해진다. 긍정이를 특공무술 학원에 보내야겠다. 싸움 짱으로 만들어야지. 유치하지만 진심이다. 우울은 전염성이 강하다. 내 우울이 누군가에게 전염되는 최악의 상황은 막아야 하니까. 꼭 긍정이를 최고의 싸움꾼으로 만들 테다.
점심 맛있게 잘 챙겨 먹으라고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내 밥걱정을 하는 이 남자가 혹시? 내 모래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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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는 가까이, 모래요정은 내 옆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