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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Oct 25. 2019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는 연인과 유령 사진기자였다?

연인의 이름으로 불꽃 같이 살다

예술의 전당에서 <매그넘 인 파리>라는 초청 사진전이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우연히 얻은 티켓을 내밀어 매그넘이 왜 파리의 일상을 사진에 담았을까? 의아해하며 작품들을 즐겼다. 매그넘은 미국의 종군기자들이 잡지사와 당시 사진기자들 사이의 불공평한 계약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결성한 일종의 종군기자들의 조합단체였다. 당시는 세계대전과 각 지역의 국지전이 만연했던 시절이어서, 사진작가로서 성공한 사람들은 거의 종군기자들이었다.


종군기자의 대부이자 사진기자들에게 카파이즘으로 대표되는 로버트 카파는 직업의 특성에 걸맞게 인생의 굴곡과 평가가 험난하다. 우선 그가 세상에 사진작가로서 이름을 정립한 것이 실제 그 자신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다. 그리고 그를 종군기자로서의 명성을 안겨준 위 표지의 사진은 조작설이 끊이지 않는 명작이다.


로버트 카파 최고의 사진은 1944년 2차 세계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독일군의 수많은 포화를 뚫고 진공 하는 미군들을 찍은 사진이다. 사진 자체의 질적 수준으로는 매우 형편없다.


라이프지의 편집장이 남긴 유명한 주석에 어울리는 사진이기도 하다. 편집장은 이 사진들 아래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1944년 8월 8일. 로버트 카파가 상륙하는 미군들 사이에서 연신 셔터를 누르며 106장을 찍었지만, 인화 도중 조수가 필름을 태워먹어 살아남은 사진이 11장, 그리고 그 가운데 인화해 사용할 수 있었던 사진은 8장에 불과했다. 상륙 작전에 내몰린 미군의 용맹함보다, 겁에 질린 병사의 모습을 가까이서 촬영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이에 대한 반전을 담았다. 파인더는 흔들렸고 초점도 맞지 않고 포연으로 사진 입자가 거칠기 이를 데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 사진들은 1936년 스페인 내전의 인민전선파 병사가 죽는 사진과 함께 카파이즘을 대표하는 명작으로 손꼽힌다. 카파이즘이란, 검열에 저항하며 인류의 참상에 가장 근접해 인간의 본성을 반성하고 이를 해결할 방안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카파가 카파이즘을 상징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흡족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다.



, 로버트 카파, 피카소와 질로, 1948년


카파의 사진에는 전쟁의 참상만 담긴 것은 아니었다. 잉그리드 버그만, 비비안 리, 피카소, 헤밍웨이 등과 친분을 가지면서 이들의 일하는 모습이나 일상을 찍어 걸작을 남기기도 했다. 세계적 미술 거장 피카소가 40살이나 어린 연인, 질로를 따라다니며 파라솔을 씌워주는 익살스러운 이 사진도 카파가 1948년에 찍은 작품이다.


로버트 카파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사진을 찍다 포기한 후, 다시는 종군기자로 참여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한국전쟁에는 카파가 찍은 사진이 없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로 의심받는 상황을 이겨내지 못했던 카파는 하는 수 없이 인도차이나전쟁, 베트남 전쟁으로 변한다,에 종군기자로 활동하다 대인지뢰를 밟아 사망한다. 베트남에서 사망한 최초의 미국 종군기자가 되었다.




그런데 로버트 카파는 이 유명한 종군기자의 이름이나 아니다. 실제 로버트 카파라는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가상의 돈 많은 미국인 사진기자였다. 헝가리 출신인 '안드레 에르뇌 프리에드먼'은 독일에서의 궁핍한 삶을 피해 파리로 건너와, 평생의 연인이자 동료 사진작가인 '게르다 타로'와 동거한다. 그때 게르다 타로는 안드레에게 사진 찍는 기술을 배우고, 타로는 그에게 사진작가로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사진을 구입해 주는 잡지나 신문이 없어 생계가 힘들었던 이들 연인들은 기막힌 거짓말을 지어낸다. 미국에서 건너온 돈 많은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의 이름으로 사진을 팔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사진기자의 명망 높은 사진은 다른 현지 기자들의 사진보다 3배 이상 더 높은 값으로 팔렸다. 그리고 로버트 카파 이름으로 팔린 사진에는 안드레 만이 아닌 타로가 찍은 사진도 함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두 사람이 만든 가상의 인물을 유럽의 최고 작가로 만들었다.


로버트 카파의 명성을 확고히 해 준 사진이 스페인 내전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이다.


돌격하는 상황에서 적군의 총에 머리를 맞아 쓰러지는 찰나를 로버트 카파가 근접해서 촬영한 것인데, 지금까지 조작을 비난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당시에는 연인 타로가 살아서 함께 종군기자로 활동했기 때문에 이 사진의 실제 촬영을 안드레가 했는지, 타로가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장면이 정말 실제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더욱 말이 많다. 신체 공학적으로 돌격하던 자세에서 머리에 총을 맞는다면, 머리가 더 젖혀져야 하고 쓰러지는 순간 인간은 손을 펴서 몸을 지탱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진은 조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게르다 타로가 이 전쟁에서 아군이 급하게 후진한 탱크에 깔려 어처구니없는 죽임을 당했는데, 이후부터 안드레가 곧 로버트 카파로 단일화되었다. 그래서 이 사진 이전의 작품에 대해서 끊임없는 진위 공방이 로버트 카파를 괴롭혔다.


로버트 카파가 실제 반전 의식이 있었는지, 그리고 사진을 통한 메시지 전달에 의미를 두었는지, 알 수 없다. 사진이나 미술은 작가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 작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 작품 스스로가 가치를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즉 작품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작가가 아닌 관객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하지만 로버트 카파가 진위 여부를 떠나 실제에 근접한 근사 촬영으로 관객을 현장의 가장 가까운 곳에 데려가려 한 영속된 작품 의지만은 존경해야 할 것이다. 그는 목숨을 걸고 현장을 사진에 남겼고, 그 사진에 담긴 생명의 떨림은 관객을 감동시켰다.


가장 가까이 다가갈 때 실제의 본질이 드러난다, 라는 인류 보편의 진리가 카파의 세계에서도 증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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