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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Oct 31. 2019

나를 위한 일탈, 퇴폐한 삶을 찾아서.

가와바타 야스나리, 성애의 유토피아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너무 유명해서 정말 식상한 구절이다.

일본은 오랜 막부 봉건체제로 인해 ‘구니(國)’라고 불리는 지방 영지가 나름의 지방자치단체로 얼마 간의 독립적 지위를 누렸다. 그래서 우리처럼 國을 큰 영역으로 보지 않고 일개 전국시대의 쟁탈전을 벌인 지방 다이묘 수준으로 여긴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국경은 우리로 치면 지방 도시를 구분하는 경계로 여기면 된다. 그럼에도 마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미지의 세상에 가려고 시공간의 차원을 달리하게 만드는 터널을 지나가는 어드벤처의 기운이 풍만하다. 터널을 지나면 곧 환타지가 펼쳐지는 유토피아가 나타날게 확실하다, 라고 되뇔 수밖에 없다.     

눈의 고장 위로 드리운 밤의 어둠을 환타지 공연에 앞서 배우들과 관객들을 긴장시키는 암막 커튼과 같다. 그러면서 암막 커튼 뒤로의 무언가의 낌새를 느끼도록 하얀 눈이 웅장한 서막의 시작을 알리는 알레고리가 된다. 그리고 환타지 연극의 시작을 알리는 트리거가 펼쳐진다, 눈 위를 달리던 기차가 유토피아의 관람석으로 안착해 멈추면서 환타지가 시작된다.     


나는 러시아 톨스토이가 활자본을 찍듯이 또렷하게 쓴 “행복한 가정은 모습이 다들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란 명언에 사로잡혔었다. 불행한 이유를 갖은 방법으로 해석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불행이 잦고 불행이 깊은 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하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의 머릿 속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수만가지 이유를 지어냈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만 가지 이유는 성능 좋은 강철 포신에서 폭약의 힘으로 발사되는 무쇠탄이 되어 주변을 도륙했다. 처참하게. 수만개의 무쇠탄에서 수만가지 파편이 튀었고 수천명의 몸뚱아리에 수십개 파편을 꽂았다. 살아남기 힘든 부상이다. 살아도 온전할 수 없이 처참하다. 불행만 생각하면 또다시 주변 사람들의 피고름 냄새와 절규가 내 귓가를 마비시킨다. 그래서 이제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펼치지 않는다.     


팔목 위를 수십년간 뒤덮던 수북한 검은 털 사이로 하얀 털이 나타날 즈음이면 불행에 대해 만연해 진다. 그리고 만연해진 불행들 사이로 얽히고 치인 내 삶에 일탈을 바란다. 젊은 시절 몸을 즐겁게 하던 일탈도 좋지만 환타지 자체를 그리워하는 유토피아로의 일탈이 더 좋아진다. 그럴 즈음 설국의 유토피아가 나의 억눌렸던 일탈에 대한 호기심을 폭발시킨다.      


설국의 철도 위를 지나가는 일탈행 완행 열차의 모습, 기차 안 유리창에 비친 하얀 요코의 몸매, 동백실에서 거울을 보는 고마코의 목 뒷덜미, 언덕 위 아래로 밀집한 여관 건물을 지나 다니는 게이샤들의 향내가 그려진다. 마치 수십년간 머리 속에 각인된 유토피아의 장면들이 일본 우키요에의 명화처럼 프레임을 구성한다.     


그리고 유토피아의 포스터같은 하얀 눈의 겨울이 우타가와 히로시게가 그린 ‘감바라의 밤눈’을 연상시킨다. 사람의 손으로 그린 우키요에보다 좀 더 밝은 희망과 설렘을 피부로 느낀다. 그리고 호흡이 가파온다. 가파진 호흡은 산소와 혈류를 넘치도록 두뇌로 공급하고 잉여의 에너지로 일탈을 즐길 채비를 마친다. 나만을 위한 성노예같은 여성들이 나만을 기다리는 환타지 세상이다. 19세기 오리엔탈과 자포네즘에 빠져 성적 유토피아를 꿈꾸던 유럽 지성인들의 욕망이 내 피를 뜨겁게 달군다. 그리고 설국이 나만을 위해 짜안 하고 암막의 커튼을 열어 보인다. 에이 고유자와의 이미지가 나를 기다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문학적으로 노벨상 감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지의 문학을 설국이라는 유토피아로 그려낸 점이 우키요에의 향수를 자기네 조상들의 정서인양 착각하게 된 서양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아니 심금이 울렸다고 호들갑을 떨어야만 문학계의 한 자리를 계속해서 밟고 서 있을 수 있다고 착각한 사람들이 장날을 만들었다.


야스나리는 이들이 연 장날 기모노를 차려입고 나타나 장터 한 가운데에서 자신을 더 높이, 일본을 더 높이 우러러보게 만들었다. 덴고의 와카를 읊으면서.     


“봄은 꽃, 여름엔 두견새, 가을은 달, 겨울엔 눈. 해맑고 차가워라”
(덴고의 와카 중)     



기승전결이나 플롯을 위한 연결장치 없이 오로지 동양 여백의 미를 디스크리트하게 잘라붙인 이미지의 문학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선문답일지 선구적 혜안일지 알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힘찬 박수를 통해 찬사를 보냈다.     

글로 이성적 논리에 앞뒤를 맞추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년기 학창시절을 과도하게 지나며 육체의 몸부림을 막지 않는 일탈에 흥분했다. 육체를 마비시키는 자극과 성적 흥분만이 쾌락의 절정에 이르는 지름길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러한 일탈은 찰나의 순간에 만족하는 약쟁이의 값비싼 향연에 불과했다. 즐기는 시간동안 내 영혼이 나의 몸 속에 없기 때문이다. 다음날 뻐근한 어랫도리와 쓰라린 위장만이 그 찰나의 일탈이 현실 속에 있었음을 증명해 줄 뿐이다.     


인생에 필요한 일탈은 불행을 뒤로 하고 나를 건강하게 해 줄 위안으로 역할해야 한다. 그래서 유토피아가 필요하다. 그것도 환타지가 가득한 유토피아. 그래야만 만년제국의 영화를 내 짧은 삶에서도 함께 동승할 수 있다. 그게 내가 바라는 일탈이다. 내가 바라는 일탈을 위해 환타지를 찾고 환타지가 가득한 유토피아를 꿈꾼다. 남의 몸 속을 후비는 쾌락보다 나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 줄 쾌락이 필요하다. 그래서 설국을 찾는다.     


“전혀 헛수고라고 시마무라가 왠지 한번 더 목소리에 힘을 주려는 순간, 눈이 울릴 듯한 고요가 몸에 스며들어 그만 여자에게 매혹당하고 말았다.”p38-39     


염세적으로 우리처럼 지친 시마무라에게 고마코와 요코는 순수한 결정으로 다가와 유토피아적 애정을 한없이 쏟는다. 이유없이 나만을 위해 경쟁하듯 두 여인이 나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것. 이것이 유토피아다.     


“간진초였다.
순간, 시마무라는 뺨에 소름이 돋을 듯 서늘해져서 뱃속까지 말갛게 되는 느낌이었다. 단숨에 텅 빈 머리 가득 샤미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실제로 그는 그저 놀랐다기보다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경건한 마음에 사로잡혔고 회한의 상념에 완전히 젖어들었다.”p63  

   

샤미센은 기타처럼 생긴 일본 전통악기다. 전통 곡조들을 샤미센으로 게이샤가 뜯고 울 때면 일본 남성들은 요시와라의 환락에 빠진다. 유토피아다.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시공간을 시프트시키는 장치가 샤미센이다. 인간이 인간을 유토피아로 이끌고 완전히 젖어든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줄곧 고마코 생각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가까이 와보면 왠지 안심이 되는지, 아니면 벌써 그녀의 몸과 너무 가까워진 탓인지, 사람 살결이 그리워지는 마음과 산에 이끌리는 마음이 마치 똑같은 꿈처럼 느껴졌다.”p96     


설국은 이미지의 문학 결정이다. 기승전결이나 인과관계는 눈씻고도 찾을 수 없다. 어찌보면 설렁설렁한 저질의 춘몽춘화같다. 그래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폄하하기도 한다. 정작 학교 문법 교육에 적응하지 못한 서번트 증후군 환자같다고 할까? 정형화된 문법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특정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는 서번트 증후군. 야스나리 문학은 폴 록의 현대미술같은 추상표현주의의 서번트 증후군이다.     


“그러나 요코가 이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부르기가 왠지 꺼러졌다. 고마코의 애정은 그를 행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름다운 헛수고인 양 생각하는 그 자신이 지닌 허무가 있었다. ....(중략)....그는 고마코가 가여웠고 동시에 자신도 애처로워졌다. 이러한 모습을 무심히 꿰뚫어 보는, 빛을 닮은 눈이 요코에게 있을 것 같아, 시마무라는 이 여자에게도 마음이 끌렸다.”p110     


주인공이 관심만 가지면 눈을 마주치는 여자들, 주인공이 눈짓을 보내면 몸을 일으키는 여자들, 주인공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면 자신을 먼저 덮치는 여자들, 그리고 항상 순수하고 해맑게 나를 바라보는 여자들이 나를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곳.

    

몸의 뜀박질을 고르게 평온히 하고 영혼의 일탈을 추구해 본다. 그러고도 설국의 유토피아를 실제로 만나거나 만들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 현실에서 설국을 만들지 못하면 활자로 주입된 설국의 터널을 지나 가슴으로 그려보자. 그리고 가슴으로 그린 풍경과 사람들에게 큐 신호를 보내보자. 마침내 산, 들, 바람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를 향해 미소짓는다. 높은 청명한 하늘 위로 이름 모를 두 마리 새가 경쟁하듯 치솟다가 내 발치 앞의 풀밭 위로 급히 내린다. 그리고 무어라 무어라 떠들며 나를 향해 촉촉한 눈빛을 보낸다. 두 마리 모두.     


기분 좋게 시원한 바람이 두 마리 새를 부웅 띄우는 듯 하더니 이내 내 얼굴과 귀를 간지럽힌다. 기분좋다.

시원하게 눈썹을 가로지는 바람을 즐기러 가늘게 눈을 찢는다. 먼 발치에서 하얀 티에 예쁘게 엉덩이를 보이는 청바지 입은 여인이 다가온다.

언제적인가 한 번 보았을, 아니 수십 수백번 보고 살을 부볐을 여인이다. 그녀의 등 뒤로 초록색 가지 잎이 땅으로 길게 드러워져 멱 감은 처녀같이 버드나무가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나는 지금 퇴폐미 넘치는 유토피아에서 일탈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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