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 성애의 유토피아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봄은 꽃, 여름엔 두견새, 가을은 달, 겨울엔 눈. 해맑고 차가워라”
(덴고의 와카 중)
“전혀 헛수고라고 시마무라가 왠지 한번 더 목소리에 힘을 주려는 순간, 눈이 울릴 듯한 고요가 몸에 스며들어 그만 여자에게 매혹당하고 말았다.”p38-39
“간진초였다.
순간, 시마무라는 뺨에 소름이 돋을 듯 서늘해져서 뱃속까지 말갛게 되는 느낌이었다. 단숨에 텅 빈 머리 가득 샤미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실제로 그는 그저 놀랐다기보다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경건한 마음에 사로잡혔고 회한의 상념에 완전히 젖어들었다.”p63
“멀리 떨어져 있으면 줄곧 고마코 생각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가까이 와보면 왠지 안심이 되는지, 아니면 벌써 그녀의 몸과 너무 가까워진 탓인지, 사람 살결이 그리워지는 마음과 산에 이끌리는 마음이 마치 똑같은 꿈처럼 느껴졌다.”p96
“그러나 요코가 이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부르기가 왠지 꺼러졌다. 고마코의 애정은 그를 행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름다운 헛수고인 양 생각하는 그 자신이 지닌 허무가 있었다. ....(중략)....그는 고마코가 가여웠고 동시에 자신도 애처로워졌다. 이러한 모습을 무심히 꿰뚫어 보는, 빛을 닮은 눈이 요코에게 있을 것 같아, 시마무라는 이 여자에게도 마음이 끌렸다.”p110
기분 좋게 시원한 바람이 두 마리 새를 부웅 띄우는 듯 하더니 이내 내 얼굴과 귀를 간지럽힌다. 기분좋다.
시원하게 눈썹을 가로지는 바람을 즐기러 가늘게 눈을 찢는다. 먼 발치에서 하얀 티에 예쁘게 엉덩이를 보이는 청바지 입은 여인이 다가온다.
언제적인가 한 번 보았을, 아니 수십 수백번 보고 살을 부볐을 여인이다. 그녀의 등 뒤로 초록색 가지 잎이 땅으로 길게 드러워져 멱 감은 처녀같이 버드나무가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나는 지금 퇴폐미 넘치는 유토피아에서 일탈을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