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한 벽을 차지하는 큰 창문을 열자, 매캐하지만 살짝은 달콤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사무실 아래 모 프랜차이즈 돼지갈비 가게에서 손님들이 품어내는 매연이다. 책상 위, 손을 더듬어 담뱃갑을 훔쳐 연다. 그리고 아주 길고 센 날숨을 오래 뱉었다. 하얀 담배 연기가 돼지갈비의 달짝지근한 냄새를 더욱 풍미 있게 부각한다.
'나 내일 결혼해, 잠깐 볼까?'
고객의 문자메시지라 생각해 몇 시간 열어보지 않았는데, 그녀의 문자였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심장의 박동이 두배는 빨라졌다. 이미 2시간이나 지났다. 지금은 저녁 7시 반. 어쩌면 이번이 그녀와 마지막일 지 모른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통화 심벌을 바로 눌렀다. 하지만 아차, 싶어 신호음을 끊었다. 대신 문자로 답했다. 이럴 땐 둘만이 확인할 수 있는 문자가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문자가 간지 1시간이 지났지만 아무런 답이 없다.
○○○ 바에 있어. 올래?
ㅇㅇ. 이 활자로 답을 보내고 차를 몰았다. 오로지 내일이 지나면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다, 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바에는 킵해둔 것 같은 양주 한 병을 테이블에 올린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말없이 남은 양주를 비웠다. 또 한 병 더 비울 수 있었지만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가까운 호텔로 향했고 말없이 침대에 몸을 맡겼다. 한 시간 정도 지나 그녀가 먼저 방을 나섰다. 눈을 감고 어찌할까 생각하다 그냥 이대로 잠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녀의 결혼식이 끝나는 다음날 오후까지 A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그녀는 A의 대학 선배와 결혼했다. A와 그녀는 8년 동안 연인으로 지냈지만 A 집안의 반대로 결혼을 포기했다. 그녀가 편모슬하에 가난하다는 이유였다. A는 명문 법대를 나와 변호사가 되었다. 모두 그녀의 헌신 덕이었다. 하지만 죽어도 며느리로 삼을 수없다는 엄마의 앙탈을 A는 이겨내지 않았다. 굳이 이겨내고 싶지 않았다.
그 사이 A의 대학 선배인 모 변호사를 소개받은 그녀가 불과 서너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결혼식 전날. 신부가 A에게 전화했고 둘은 또 한 번 몸을 섞었다. 아무 말 없이 몸만 움직여 전야를 기억했다.
서초동 로펌으로 새 직장을 옮긴 후, 회사의 유선전화로 그녀의 음성이 들렸다. 결혼식 후 2년 정도 지났다. 그리고 그녀가 변호사로서의 그를 찾아와 소송을 요청했다.
매일 맞아서 너무 힘들어. 이제 이혼하고 싶어.
임신시킬 수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A의 선배에게는 두 살짜리 딸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딸을 그녀가 낳았다는 것도 A는 알았다. 그리고 선배의 폭행이 매일의 일과가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A는 자신의 눈꺼풀이 크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혹시, 두 살이면? 맞지?
지난 2년 동안, 결혼식 전야 신부와 밤을 보낸 것에, 그 상대의 남편이 자신의 대학 선배라는 것에, 그리고 전 애인을 엄마로부터 지키지 못했다는 것에, 그리고 자신이 결코 그 모든 죗값을 치르지 못할 것이라는 자책에 심신이 삭아갔다.
그런데 아이까지? 그리고 이제 나와 아이로 인해 이혼까지?
A는 목놓아 울었고 그녀는 그런 그를 조용히 지켜봤다.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두 눈을 그의 등 위로 응시했다. 그렇게 둘은 한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A는 성심을 다해 그녀를 이혼시켰고 선배로부터 최대한의 위자료를 받아냈다. 사실상 그녀와 딸이 먹고 살기 충분할 만큼 받아냈다. 그리고 A는 엄마에게 단호히 선언했다.
무조건 그녀와 결혼할 거야. 내 딸도 내가 키울 거야.
하지만 이번엔 그녀가 거절했다. A가 아무리 사정해도 그녀는 더 이상 A와 결혼할 이유가 없다고 거절했다. 딸과의 만남은 더더욱 거부했다. 양육비만 받아갈 뿐, A가 딸을 볼 수 없었다. 밤늦게 문자로 그녀가 호출할 때만 잠깐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결혼식 전야처럼, 아무 말 없이 호텔방에서 몸만 부대끼는 만남이었다. 그리고 침묵으로 상황을 종료해야 했다. 그는 그녀의 성욕을 치우는 머신이 되었다.
A는 직장도 변호사도 계속할 수 없었다. A의 부모가 몇십 번이나 그녀에게 무릎 꿇고 사정했지만, 그녀는 A 따위 필요하지 않다며 거절했다. A의 어머니는 A에 대한 죄책감에 몇 달 후 숨을 거뒀다. 그리고 A의 대학 선배는 전재산을 그녀와 서류 상의 딸에게 모두 건네준 뒤, 오피스텔에서 홀로 산다. 번 돈의 대부분은 술값과 양육비로 바친다.
지금 이 세상 현실의 승자는 그녀다. 그녀는 A의 부모에게 신랄하게 복수했고, 나약하고 비겁했던 A를 파멸시켰다. 그리고 A의 선배는 그녀의 큰 그림에 희생양이 되었다. A 부모에게 업신 당했던 가난은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고,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그녀는 두 변호사로부터 매달 거액의 양육비를 받는다. 아니, 사실상 두 남자의 남은 생명을 한 톨 남김 없을 때까지 갉아먹는다.
오뉴월에 서리를 내린다는 여자의 한이, 모두를 파멸시킨 나쁜 여자의 '악의 꽃'을 피웠다. 잔 뒤발이 보들레르를 파탄시킨 것처럼, 조르주 상드가 쇼팽과 뮈세를 농락했던 것처럼.
친한 변호사 친구가 자신의 친구 걱정을 하며 말해 준 이야기를 각색해 썼다.
그 친구의 친구가 A다. 마냥 술자리 안주거리로 할 수 없는 것이, 그녀의 유혹이 모든 남자에게 예외일 수 없는 로망이기 때문이다. 나도 너도 무너지지 않을 수 없다.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라는 말이 새삼 확신에 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