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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를 읽고 막심 고리키를 비웃다

불친절한 작가의 생각 없는 소설에 냉소를 보내다

by 아메바 라이팅

막심 고리키는 다른 유명 러시아 작가들과 달리 불우하고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인간에 대한 신뢰와 불굴의 의지란 허상을 쫒던 작가다. 사회주의자로서, 부랑자부터 중산층의 노동자까지 작품 속 인물을 발전시켰는데, 삶에 대한 인간의 대승적 승리를 그리고 싶었다고 전해진다. 나는 전혀 그런 서평에 공감하지 않지만.

1. 마부
돈에 쪼들리는 러시아 중산층 파벨 니콜라예비치가 유혹에 흔들려, 어느 날 여자 상인인 자메토바를 살인해서 겪는 이야기다.


돈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여상인 자메토바와 저택의 아가씨를 죽이지만 전혀 죄의식이 없다. 마치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과 같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은 죄를 짓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격리시킨 채, 오로지 사회로부터의 따가운 시선만을 걱정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마부의 주인공 파벨 니콜라예비치에게서도 같은 분위기를 느낀다.

하지만 이후 파벨의 교과서적 행각이 <죄와 벌>과는 다른 귀결로 향한다. 노파에게 훔친 돈으로 큰 부자가 되고 8년 후에는 시장으로 선출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파벨은 여전히 자신에게 죄의식에 대한 아무런 통회가 없다는 것에 분개하면서, 스스로 대중들에게 '자신이 8년 전에 살인을 저지르고 사회사업가 인척 대중을 속이고 시장이 되었는데도, 누구 하나 그런 자신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머리를 조아린다'라며 조롱한다. 그는 스스로 통회와 함께 십자가의 고통을 겪고자 한 것이다.

마치 정교회의 고해성사의 과정을 보는 듯하다. 자신의 죄를 살피고, 그 죄에 대하여 통회하고, 스스로 이를 고백하고, 보속을 원하는 과정이다. 보속을 통해 대사를 받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선한 행동을 해야 할 수도 있고 연옥으로 올라가 참회를 거쳐야 할 수도 있다.

깜짝 잠에서 깨어난 파벨은 그제야 깨달았다. 돈에 쫓긴 자신을 버리고, 자기 규범을 지닌 통회적 그리스도의 인간으로 살아가겠다고 은유한다. 그리고 다시 긴 잠에 빠진다.

톨스토이처럼 러시아 정교 사상을 작품 속에 투영하지 않기로 막심 고리키가 유명하지만, 모태신앙인 정교적 문화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던 초기 낭만주의의 모습을 <마부>라는 단편에서 보여 주었다.


7. 아쿨리나 할머니
여자의 몸으로 자식들과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몸과 삶을 희생하는 두 여인이 주인공으로 데자뷔로 연결된다. 남편이 죽자 애들을 먹여 살리려고 길거리 창녀로 나선 푸른 눈의 아름다운 여인과, 길거리 구걸로 부랑자들을 먹여 살렸던 고리키의 아쿨리나 할머니를 통해 희생적 삶을 보여준다. 참고로 막심 고리키는 외할아버지의 파산 후 외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 편의 단편 가운데 그나마 기억의 잔상으로 새겨질 만한 두 편을 짧게 써보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세대의 발전으로 지성이 높아진 것인지, 불편한 음모에 의해 과대평가된 것인지, 이상한 불쾌감이 남는다.

정교적 사상이나 개념이 희미하게 흔적만 보이는 고리키의 작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래서 당신이라면 어떻게 살아갈 것 같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려는 듯하다. 톨스토이는 답을 주입하려 하는데 막심 고리키는 답이 없는 듯 무심하다. 그리고 그의 결론에는, 열정과 믿음으로 무기력에서 벗어나라, 라는 자기 훈시적 윤리가 깃들렸다. 하지만 그래도 찝찝하고 불쾌하다.

솔직히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푸시킨 등에 비해서, 단편작품이지만 고리키의 소설은 독자에게 너무나 불친절하고 불편하다. 내가 읽다가 든 생각 중에 하나가 이것이다.


고리키가 생각을 가지고 이 글을 쓴 것인가? 아니면 그저 에세이로 휘갈겨 쓴 것인가?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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