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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Nov 22. 2019

나를 붙잡아 주었던 그.것.

 여니를 유치원에 보내기 시작하면서 오전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낼지 고민하다가 도서관 강의를 듣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남편과 다투어 이야기도 제대로 안 할 때였는데 강의를 듣는 중에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사이가 안 좋을 때는 연락하는 사람이 아닌데 무슨 일이지 하며 강의실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 남편은 전화기 사이로 다급함을 가라앉히려는 듯 담배 연기를 한 모금씩 내 뿜으며 단어 하나 하나에 힘을 실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말인즉, 형이 뇌출혈로 어젯밤 구급차를 타고  세브란스병원으로 갔고 어머님은 정신이 없어 전화기도 챙겨가지 못하셨다고 한다. 둘째 아들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해 전화를 하지 못했고 동네에 사는 이모가 연락 안 되는 어머님 행적을 역으로 물어 알아냈다고 한다. 이모가 둘째 아들 전화번호를 어머님께 알려주셨고 그제서야 어머님은 일이 일어난 지 열다섯 시간 만에 둘째 아들에게 전화를 거신 것이다.     

 

 저녁을 잘 먹고 쉬는 중에 형은 갑자기 구토를 하고 두통을 심하게 호소하며 쓰러졌다고 한다. 놀란 어머니는 구급차를 불러 집에서 한 시간 이나 걸리는 병원으로 갔고 응급수술을 진행했다고 한다. 남편은 동서울터미널로 가서 시외버스를 타고 원주로 간다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멍하니 도서관 복도에 서 있었다. 혼자서 수술실 앞에서 우시며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있었을 어머님 생각에 눈물이 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구급차에 실려 가시는 뒷모습을 볼 때처럼 몸이 떨려왔다.

 

 남편에게는 두 살 터울의 형이 있다. 명문대 국문과를 좋은 성적으로 입학하고 졸업도 하기 전 우리나라 3대 광고기획사 중 한 곳에 인턴으로 채용되었다. 그러나 일 년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듣기로는 자존심이 센 형이 조직문화를 잘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쉽게 직장을 얻을 줄 알았지만 형에게는 기회가 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형은 어머님과 아버님의 아픈손가락이 되었다.     

 

  시댁은 작은 식당을 하였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강원도로 이사를 왔다. 이번에 형은 자발적인 의지로 어머님과 식당을 같이 해보려고 했다. 운전면허도 따고 트럭을 사서 밭일을 하는 곳으로 식사를 배달하려고 했었다. 형이 주도적으로 어머님과 같이 식당 운영에 대한 일을 의논하는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시골생활은 의욕과 달랐다. 시골 사람들은 도시에서 온 사람들을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텃세로 마음고생을 하다가 안정되었다 싶었는데 일이 난 것이다.      


  이후 형은 두 번의 수술을 더 했다. 형은 중환자실에서 3주간 있다가 일반병실로 올라왔다. 움직일 수 없는 형을 24시간 옆에서 간호를 해야 했다. 키 178cm, 몸무게 90kg의 건장한 남자를 어머니가 간호하시는 것은 불가능했다. 남편은 휴가를 다 끌어다 3주정도를 병원에서 생활했다. 이후에는 주말마다 어머님과 교대를 하러 몇 가지 밑반찬을 가지고 병원을 향했다. 형은 종합병원, 재활병원 두 곳을 거쳐 일 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형은 우리가 간절히 바래 왔던 모습으로는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는 식당을 정리하고 형이 지내기 편하도록  공기 좋고 조용한 곳으로 집을 지어 이사가시려고 한다. 남편은 회사 일과 어머님의 일을 도맡아 하느라 바쁘다. 퇴근 후 집에 온 남편은 몸만 쇼파에 붙이고 있다. 그런 시간들이 지속될수록 나는 가슴 속 답답함이 커져간다. 나는 행여 남편과 말을 시작했다가 ‘당신은 홍천집 생각밖에 안 해! 차라리 거기 가서 살지 그래!’ 라고 말해 버릴까봐, 나의 치졸한 마음을 들킬까 말을 참기 시작했다. 나는 어디로도 보낼 곳 없던 감정을 우리 집에서 제일 약체인 아이들에게 넘치게 쏟는 일이 잦아졌다.     

 

 쇼파에 누워있으면 아래서 잡아당기는 것 같다. 밖으로 나갔다.  학습관에서 여는 강의를 신청했다. 목적이 있는 모임에서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안 해도 되어 오히려 편했다. 과제를 하기 위해 같은 책을 보고,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과 경험을 듣는 것은 나의 우울과 불안이 조금씩 부서지는 것 같아 도움이 되었다. 과제를 하기 위해 꺼낸 책을 읽으며 긴 위로를 받았다. 내가 구구절절 말을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아는 듯 위로가 되었다. 나는 아이들을 재우면 같이 잠이 들게 되어 새벽에 일어나 책을 보았다. 그런 나를 우리 집 식구들은 이상하게 보았다. 강제성이 없어 보이는 도서관 수업인데 새벽부터 일어나서 하느냐고. 나는 수업에 무책임하게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하고있다라고 생각했다. 지나고 나서 알았다. 이러한 공부가 흔들리는 나를 꼬옥 붙잡아 주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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