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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 작가 Feb 19. 2023

끈적하게, 기다릴 방전

생각 노트 #24

 "우리, 올해가 삼재라더라."


 얼마 전 신년회 겸 모인 자리에서 한 친구가 별생각 없이 던진 얘기였다. 익어가는 밤그늘 속에 한 계단 더 올라와 본 정경을 휙 하며 넘겼다.


 며칠 뒤 휴일, 방에서 무기력하고 완연한 휴식을 보내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 방문을 두드렸다. 읽어가던 소설을 잠깐 멈추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포근한 눈빛을 한 이의 손에 쥐어진 건 부적이었다.


 "훈아, 올해가 삼재라고 하더구나. 베개 커버 속에 넣어두렴."


 끄덕하고는 좋은 느낌과 함께 베개에 다시 머리를 뉘었다.




 사실 크게 생각이 없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일상을 조심하고 또 조심하자. 마음에는 바뀐 것이 없었다. 나름대로 평평한 가치관 위에서 잘 지내왔다고 자부했기에.


 그러던 와중 일이 터졌다. 나의 본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일이 덜컥 벌어졌다. 상대에 대해 너무나도 미안한 감정과 함께 자신에 대한 억울함도 밀려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일어난 일인 것을. 나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말들이 수두룩하게 박혔다. 그러나 상대방은 더욱 힘든 감정을 가졌을 것 같았다. 그래서 스스로 억울해하고 아파하는 것 자체를 부정해야 했다.




 정말로 많이. 힘들었다.


 그 이후로 내 일상에는 끈적한 이물질이 끼였다. 두려움인지, 절망감인지 일상에서의 에너지가 많이 줄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 하는 업무를 시작하고 줄었던 생각들이 더더욱 손에 잡히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글을 쓸 수가 없었다. 힘들면 글로써 풀었던 나였는데, 글조차 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껏 내가 쌓아왔던 인간성이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어떤 때에는, 적적하게 울었다.




 상처와 흉터가 반쯤 섞여 어색한 광경을 보여주고 있을 때였다.


 산뜻하게 출근하는 금요일에, 나는 심한 피로와 대미지를 입었다. 입사 이후로 가장 머리가 아팠다. 익숙해진 일에 따박따박 쏘아대는 환경을 겪어보니 몸서리가 쳐졌다.


 속이 울렁거리고 하루종일 멍했다. 더 이상 오늘의 다리를 망가뜨려서는 안 됐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날 하루를 참아냈다.


 귀가하니 부모님이 안색을 보시고선 크게 걱정하셨다. 오늘 왜 이렇게 힘이 없니. 그냥 일이 많아서요.


 진부한 대답과 함께 나는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술자리였다.




 맛있는 안주와 많은 이야기들이 술잔에 부딪히며 상기되었다. 우리의 주변을 맴돌며 각자 손을 흔들었다. 그동안의 일들을 토로했다.


 "차라리 나한테 그랬으면, 평생 술안주였을텐데. 술기운이 오를 때마다 얘기하지 않았을까. 너, 그때 그랬던 거 기억나냐면서."


 "그러게. 세상이 나를 억지로 까내리는 기분이야."


 그렇게 선선한 웃음과 함께 입모양은 최근의 일상으로 확 집중되었다.


 "지금 너 모습이, 딱 이전에 있던 회사에서의 내 모습이네."


 "정말, 네가 어땠을는지. 무수한 공감이 피어나는 중이야."


 항상 먼저 취했었던 친구는 오늘 이상했다. 새벽 2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너무나도 멀쩡했다. 그와 반대로 난 이제 한계점에 임박했다. 어이없고 놀라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술 취한 구절을 읊었다.


 "나, 지금은 아무런 의욕이 생기질 않아. 주말에 아무리 쉬고 사람을 만나도. 마치 배터리를 아무리 충전해도 30%를 못 넘기는 것 같아. 그래서 버거운 평일을 버텨내고 나면 꼼짝도 할 수 없는 휴일이 찾아오고. 이렇게 계속해서 반복하는 일상이 지금의 나야."


 "그리고 더욱 최악인 건. 그 30%의 최대치가 점점 깎여가는 기분이거든. 이제는 방전이 머지않았어."


 나와 눈을 맞추고 있던 이는 얘기를 듣더니 잠깐 멈칫했다.


 "굉장히 문과적인 말이네."


 "하지만 너랑 보면 70%까지는 충전이 되는 기분인 걸. 하하."


 문장에서 술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럼 그 70%로 술잔 좀 드세요, 아저씨."


 그렇게 반으로 감겨가는 세상을 부여잡으며 짠 하고 소리를 내었다.




 할 수 있는 일에 지금을 만족하며 스스럼없이 지내왔다. 하지만 한 번 발판이 흔들리니 전체가 무너질 듯했다. 이게 최선일까.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항상 그리고 찾아왔던 밝은 스케치는 절대 이 모습이 아니었다.


 '더욱 기반을 쌓자. 흔들려도, 무너지지는 말자.'


 할 수 있는 일에 내 깊은 곳의 감정을 쏟지 말자. 이상적이지 않아도 된다. 실수를 하더라도 괜찮다. 방전이 되어 바닥을 기어도 어쩔 수 없다. 난 이런 모습으로 오래 지낼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깨달았으니 말이다.


 단지 감내할 만큼의 지금의 일상을 보내자. 평생을 그려왔고, 기도했던 써 내릴 날들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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