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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Genie Feb 06. 2024

일단 걸어,

 장문으로 자신의 상황을 한탄하는 문자를 보내자 어머니로부터 딱 한 줄의 응답이 왔다.

"바나나 하나 들고 산책하렴."

-책 '걷기의 즐거움'에서


 살면서 320번쯤, '너무 좋은 인생이야.' 했을 거다. 그리고 오늘 321번째 생각했다.

'지구야 망하렴. 나 망한 거 티 안 나게.'


 퇴근하는 길, 노래를 들었다. 서태지 노래를 듣고, GOD 노래를 듣고, 아이브 노래를 들었다. 시대를 망라한 명곡들에도 신명이 안 났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고민했다. 집에 들어가서 누울까? 그러지 말까?


 텅 빈 집에 터벅터벅 들어가면 옷 대충 벗고, 엄지발가락으로 양말 벗어놓은 채 침대에 눕겠지. 눈이 흐릿할 때까지 새우 모양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올리다가 뭘 하기엔 이미 늦어버린 시간에 후회하며 생각할 거다.


'그러지 말 걸.'


 핸들에 올린 손가닥을 까닥까닥하다 결정을 내린다. 보조석에 둔, 다이어리와 필통이 든 책가방을 멘다. 쌀눈이 흩날리지만 우산은 꺼내지 않는다. 큰개랑 산책할 땐 장대비가 내려도 안 썼는데 이 정도야 뭐.


 패딩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모자를 뒤집어쓴다. 양손은 주머니에 넣는다. 걷는다. 도서관까지. '큰개와 함께였다면 산기슭을 찾아 헤매었겠지.' 생각하며 하나도 웃지 않는 표정으로 걷는다. 코 센서로 감지했을 때 미세먼지는 없는 것 같다. 그건 좋았다.


 추워서 어깨가 올라간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구부정히 걷는 내 모습을 3인칭으로 바라본다. 사람이 자세라도 바라야 없어 보이지가 않던데, 이거 원. 그러나 바른 자세를 취할 생각이 없으니 여전히 구부정히 걷는다. 거북목의 나까지 사랑할 거야...


 한 걸음 한 걸음 정직하고 더디게 목적지에 도착한다. 도서관에 갈 때마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신간코너 구경하기. '매일같이 책이 쏟아지는 세상에, 내 책만 안 나와.' 습관성 비관 한 번 해주고 책 제목을 구경한다. 책 제목 구경하다 보면 서재가 제일 시끄러운 것 같기도 하다. 다들 하고 싶은 말 짱 많아.


 '걷기의 즐거움'을 집어든다. '암, 걷기는 즐겁지.' 네모난 창문이 맘에 드는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친다. 걷기를 예찬하는 아름다운 말들이 쏟아진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다이어리에 옮겨 적는다.

 '걷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서두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 마음도 발걸음처럼 시속 4킬로미터 정도로 움직이게 된다. 우리 시대 삶의 문제는 생각이나 사색의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사색을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공기와 햇살이 필요하다.'


 내 생각도 덧붙여 적는다.

'걷기... 좋지... 근데 큰 개 없이 어떻게 꾸준히 걷지? 뭘해도 될 사람들이네.'


 걷기의 말들을 읽고 옮겨 적고, 끄덕이거나 불편해하다보니 밤 9시가 넘어간다. 도서관이 9시 넘어서까지 하다니 착한 도서관상 줘야겠다.


 다시 가방을 메고, 패딩 자크를 목 끝까지 올린 후 모자를 뒤집어쓴 채 길을 나선다. 시속 4킬로미터의 정직한 속도로 밤길을 가로지른다. 볼에 닿는 바람이 차다. 자전거 탄 학생이 스쳐 지나간다.


'빨라서 좋겠구먼.'


 생각하며 여전히 걷는다. 검은 하늘에 뜬 흰 구름이 선명하다. 찬 바람을 가득 마시니 뱃속에 길이 난다. 모든 게 드나들다 잠잠해질 것 같은 밤바다처럼 검고 큰길.


 큰개 덕분에 이 밤을 걷는다. 겨울에 산책이라니, 큰개 전엔 상상도 못 했다. 큰개와 겨울을 뚫고 매일 산에 오른 구력으로, 이미 익숙해진 걷기형 인간이 흩날리는 눈발과 차가운 공기쯤이야 한껏 무시하고 더벅더벅 밤길을 걷는다. 비록 큰개가 없는 허전함에 한껏 뿔이 났지만 그래도 걸음이 좋았다.


 파도 속에서도 일단 걸어.


 큰개와 살며 얻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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