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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Feb 16. 2024

나는 제멋에 겨워 산다

- 걷기 21일 차 -

‘난 순례길을 여행하는 여행자이지 결코 종교적인 순례자는 아니다. 그러므로 걷기도, 차를 타기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순례자들과 같은 코스를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인다.’     


어제 무리를 했나 보다. 걷는 게 다시 힘들어졌다. 어쩔 수 없이 차로 이동하며 내 입장을 합리화시킨다.    

  

내 다리에 문제가 생긴 이후 가장 많은 도움을 주는 사람은 전 부장이다. 센스쟁이 전 부장은 군대 시절의 명찰을 삐딱하게 카메라 가방에 붙이고 다닌다. 그 가방이 재미있어 사진을 찍는 순간, 가방과 같은 색깔의 군복을 입은 스페인 군인 둘이 지나간다.

군인들의 복식은 각 나라마다 그 나라의 지형에 맞는 색깔을 사용한단다. 그러니 당연한 얘기지만 스페인의 군인들은 먼지 많은 이곳의 지형에 맞는 색깔의 옷을 입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군복과 확연히 다른 색깔이다.     



요즘의 소확행은 Bar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이다. 지칠 때 즈음 만나는 바는 힐링의 장소이다. 사람들과 웃고 떠들기도, 조용히 에스프레소의 씁쓰레한 맛에 압도된 채 책을 읽다 일어서기도 한다.  


스페인의 바에서는 다양한 음료와 음식을 함께 판매한다. 그런 까닭에 순례자들은 레스토랑이 아닌 바에서 식사를 한 후 기운을 보충하고 다시 걷는 일이 다반사이다. 오늘도 시간 차를 두고 바에 도착한 순례자 중 몇몇은 점심으로 순례자 정식을 시켰다. 나는 에스프레소만 주문했다. 흐린 날씨도 한몫을 했지만, 차로 이동했더니 배가 고프지 않았다. 전 부장은 단품요리인 스파게티를 시켰는데 하몽, 살라미, 프렌치프라이가 곁들여져 나왔다.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나도 하몽 좋아하는데...      


순례길 위에서 하몽은 나의 최애 음식 중 하나이다. 바게트빵 위에 하몽을 올려 먹는 맛은 먹어본 사람만 알 수 있다.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고 하몽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면 온갖 피로가 싹 달아나기도 한다. 이때의 행복한 감정도 느껴본 사람만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점심을 대신한다. 인상 좋은 젊은 바리스타가 내린 커피 맛이 입에 감긴다. 첫 모금의 쌉싸래함이 마음에 들어 엄지를 올리며 웃었더니 젊은이도 따라 웃는다. 자신이 직접 쓰고 그린 듯한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의 분위기가 상큼하다. 역시 젊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빛이 난다. 흐린 날씨에 여우비까지 뿌려서 마음이 꿀꿀했는데 젊은이의 웃음이 마음 날씨를 맑음으로 바꿔놓았다. 가뿐한 기분으로 바를 나왔다.  

    

오늘의 목적지 ‘산 마르틴 델 까미노’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대부분의 순례자가 지나치는 마을인 탓인지 마트도 레스토랑도 문을 닫아 생필품을 살 곳이 없다. 순례길 위의 겨울은 찬바람만 가득해 대부분의 알베르게나 레스토랑이 문을 닫기에 순례자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계절이라고 한다. 그러나 발상을 전환하면 자기에게 빠져 걸을 수 있는 가장 호젓한 계절이란 의미가 된다. 실제로 겨울을 선호해 일부러 겨울에 순례길을 찾는 순례자도 많다고 한다.      


이 마을의 분위기는 이미 겨울이다. 날씨는 을씨년스럽고, 순례자가 주 고객인 영업장은 모두 문을 닫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늘 머무는 알베르게가 우리 때문에 닫았던 문을 다시 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방 안의 냉랭함이 뼛속까지 파고든다. 약하게 돌아가는 난방기만으로는 한기를 몰아낼 수 없다. 비니를 쓰고 목도리를 하고 장갑을 낀 채 오늘을 기록한다. 전쟁 피난민이 이런 모습일 것 같아 혼자 픽 웃는다.

      

저녁을 먹으러 나가다 알베르게 앞마당에서 청포도 한 송이를 땄다. 알베르게 수속을 밟을 때 이미 주인이 먼저 허락을 했기에 주변 눈치 보지 않고 행동했다. 제일 크고 잘 생긴 것으로 땄지만 끝물이라 그런지 모양새가 볼품없다. 그러나 맛은 아주 달콤하고 부드럽다. 예상치 못했던 달콤함은 겉모습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려 드는 경솔을 경계하라는 알림 같아 마음에 담아둔다.


속이 다 시원하다. 볼품없던 포도송이의 반전 맛에 눈이 반짝이고 기분이 올라간다. 을씨년스러움이 날아가고 추위도 주춤거린다. 갑자기 찾아온 즐거움과 어울려야겠단 생각에 얼른 방으로 돌아가 덧옷을 하나 더 겹쳐 입고 나왔다. 몸이 따뜻하면 마음도 따뜻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원해서 나선 길인 만큼 이 길의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즐길 것이다. 계절도, 날씨도, 기분까지도. 나는 제멋에 겨워 사는 사람이니까.        

         

* 걷기 21일 차 (레온~ 산 마르틴 델 까미노(San Martin del Camino)) 25km / 누적거리 49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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