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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Mar 26. 2020

사랑에 빠진 것처럼(영화)

돌멩이는 그렇게 쥐어진다.

어쩌다 한 영화평론가의 강사일을 보조했던 적이 있다. 그는 영화 TV 프로그램 하나 담당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TV에 나오는 사람을 직접 알게 됐다는 시골 청년 특유의 흥분으로 그에게 존경과 흠모의 시선을 보냈다. 물론 그도 나의 시선을 즐겼으며 나의 존경심에 응답하려 했다. 하지만 나의 존경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그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인해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의 강의는 매력적이지 못했다. 스토리텔링이 돈이 된다는 즉 서사가 가진 마케팅 능력을 설파하는 강의였는데, 사례나 예시 혹은 자신의 경력만 말했을 뿐 어떤 서사가 돈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해서는 항상 겉돌기 시작하는 그런 힘없는 강의였다. 그렇다고 내가 그의 강의 실력에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생계형 강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의외로 수강자들은 강사의 생각이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강의는 싫어한다. 불편해한다. 자신의 지적 허영심을 자극시키거나 교양 수준을 높이고 있다는 느낌 정도로 충분히 만족해 한다. 그 이상은 불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 강사는 수강자로부터 불편한 피드백을 피할 수 있으며 수강자 역시 얼빠진 미소를 지으며 강의실을 사뿐히 나올 수 있게 된다. 서로 윈윈 인 것이다. 어쨌든 이 정도의 강의였기에 그는 강의를 준비할 시간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 시간을 영화평론을 쓰는데 할애했다.

그는 나에게 자신은 영화평론을 쓰기 위해 한 영화를 6시간 혹은 8시간 정도를 본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만큼 영화를 끊어보고 돌려 보며 자세히 본다는 말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그에게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영화평론을 한다고 영화를 그렇게나 끊어보고 돌려본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나는 그의 평론 글을 살펴보았고 허접하다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의 평론 글은 온갖 철학자의 말을 빌려와 너저분하게 간신히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만 주었다. 나는 그럴 수밖에 없다 생각한다. 그는 영화를 보고 평론을 쓰는 게 아니라 평론을 쓰기 위해 영화를 보니 말이다. 영화를 본다는 건 3시간이면 3시간 2시간이면 2시간 그 영화의 흐름을 느끼는 것이다. 영화 상영 시간이 보통 2시간인 이유조차 그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란 결론에서 나온다. 아무리 신나고 즐거운 영화라도 끊어보고 돌려보는 행위로 영화의 흐름을 훼손한다면 세상 형편없는 영화가 된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평론은 영화감독의 영화에서 터져 나오는 말보다 이미 죽은 철학자의 책에서 터져 나오는 말이 주를 이루게 된다.

이렇게 영화의 흐름을 등한시한 평론가가 있는 반면에 영화의 이러한 특징 때문에 생기는 필연적 한계에 고민한 대담한 감독이 있다. 이번 글에서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을 통해 이점을 살펴볼 생각이다. 그전에, 영화의 흐름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꽤나 많은 사람들은 예술을 감상의 대상만으로 만 여기기도 하니 말이다. 이들은 아마 내가 그 평론가에게 돈이라도 따였나 싶을 것이다. 아니다. 그는 재밌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꽤나 젠틀한 사람이었다. 이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내가 왜 영화의 흐름을 강조하는지 살펴보자

처음 영화가 탄생했을 때 그 폭발적 화제성은 당연히 움직임 때문이다.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을 보며 몇몇 관객이 달려오는 기차에 기겁하고 극장 밖으로 뛰쳐나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영화의 움직임을 표현할 수 있다는 기능은 기존 예술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는 혁명에 가까운 것이었다. 여기서 내가 혁명에 가깝다 한 것은 초기에는 이 움직임에 대한 인식이 일방향적인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일방향적이란 스크린 속 움직임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무엇을 보여줄 것이냐 라는 질문에 머물러 있음을 말한다. 이후 카메라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영상편집 기술이 발전되가며 스크린 속 움직임은 일방향적에서 양방향적으로 바뀌게 된다. 양방향적이란 스크린 속 움직임을 바라보는 시선에 강, 약이 생겼으며 적극적인 탐사가 이루어짐을 말한다. 또한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는 질문이 더 해짐을 말한다. 이렇게 스크린 속 움직임이 양방향적 인식으로 바뀔 때 영화는 드디어 혁명적 예술 표현 방식이라는 칭송을 들을 가치가 생긴다. 양방향적이란 말의 의미를 좀 더 살펴보자. 어떤 감독이 달리는 남자를 카메라에 담고자 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감독이 무엇을 보여줄 것이냐에 생각이 머물러 있다면 단순히 두 다리가 교차되는 남자를 카메라에 담을 것이다. 반면에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 즉 영화 연출이 행해진다면 달리는 남자에 의미가 더해지게 된다. 달려가는 남자의 찡그린 표정과 헐떡대는 숨 고름에 포커스를 맞추어 그 행위의 고통스러움을 담을 수 있고 남자의 탄탄한 근육에 포커스를 맞추어 건강함 혹은 활기찬 인간의 생명력을 담을 수도 있다. 이렇게 어떤 특정한 움직임에 어떻게 볼 것이냐는 적극적 시선이 더해지기에 양방향적 움직임이라 한 것이다. 이 말은 영화가 단순히 감상되는 대상이 아님을 말한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당신의 시선처리 능력을 영화감독에게 위임하여 영화감독과 같은 시선 처리로 스크린 속 움직임을 탐사함을 말한다. 그렇기에 영화는 그림과 같이 감상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한다. 당신의 눈을 이리저리 통제하여 영화로 끌어들인다. 당신의 눈 통제권을 가진 감독이 아름다운 것을 찍어대면 어김없이 그 장면을 봐야 한다. 반대로 혐오스러운 것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다. 저 장면에서 당신은 주인공의 앞 얼굴을 보고 싶어도 감독이 뒤통수를 찍어 대면 뒤통수만 봐야 한다. 그림을 감상할 때와 같이 자신의 시선이 더 머무는 색감 혹은 붓 터치를 볼 권한을 영화는 허용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예술을 즐기는 새로운 태도를 요구하게 된다.

흐름을 즐길 것, 영화를 본다는 건 영화감독이 앗아간 나의 눈알이 어떻게 굴러가는 가를 느끼는 것이다. 굴리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면 나의 눈은 깜빡임을 최소화해가며 영화의 흐름에 눈을 맡길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눈을 감아 감독에게서 나의 눈알을 회수해 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평론가가 영화를 보지 않았다 하는 것이다. 좋게 말해봐야 그는 반쪽짜리 영화를 보고 평론 글을 쓰는 평론가인 것이다. 그 평론가는 자신의 눈알을 온전히 맡기기를 거부하니 말이다.

(방혜자의 빛의 파동)


이제 우리는 영화감독은 2시간 혹은 3시간 동안 관객의 눈알을 어떻게 굴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임감에 무딘 감독은 무수히 많다. 주로 액션 영화나 애로영화 장르에서 무책임한 감독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들은 액션 영화니 액션 장면만을, 애로영화니 야한 장면만을 자신의 영화에 의미가 있다 본다. 순전한 착각이다. 나는 이러한 영화를 포르노 영화라 한다. 액션이 혹은 야한 장면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여도 앞의 흐름에 만족함을 주지 못하면 그 장면 역시 힘이 죽어 허접하게 된다. 이러한 장면을 볼 바에는 차라리 밤하늘에 터지는 폭죽을 보는 것이 더 재밌을 것이다. 이제 CCTV를 영화라 하지 않는 이상 영화는 필연적으로 관객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흐름을 제공하고 이를 느낄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 이견이 없을 거라 본다. 이 지점에서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사랑에 빠진 것처럼"을 통해 영화가 흐름을 표현하는 예술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에 주목한다. 결론적으로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영화는 사랑을 표현할 수 없음을 선언한다.

내가 처음 "사랑에 빠진 것처럼"을 보고 느낀 감정은 참 게으르다 였다. 영화 첫 장면에서부터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카메라가 얼마나 게으른지를 느낄 수 있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아키코(타카나시 린)가 남자 친구인 노리아키(카세 료)와 통화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카메라는 아키코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그녀의 맞은편 테이블을 찍어댄다. 이는 어차피 아키코 맞은편에 누군가 앉을 것이니 아키코가 혼자 전화하는 장면은 볼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심지어 아키코의 보스인 덴덴(히로시)이 맞은편 자리에 앉으려다 다시 다른 손님을 상대하러 가도 카메라는 끈덕지게 덴덴이 돌아오겠지 하며 기다린다.

이렇게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카메라가 무엇을 보여주겠다는 혹은 무엇을 보겠다는 의지가 빈약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카메라는 너무나 게을러서 영화의 절반을 차 안에서 대상들을 찍어댄다. 최대한 카메라는 차 안에서 나가기를 꺼려하며 차 바깥 상황 역시 차 유리를 통해 보여준다. 심지어 타카시(오쿠노 타다시)가 운전 중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자는 모습을 가만히 찍어대는 식으로 카메라의 게으름을 유머러스하게 뽐낸다. 이런 식의 카메라의 게으른 태도는 영화가 가진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 만든다. 영화는 프레임 밖의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한계 말이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관객이 게으른 카메라를 질타하게 만든다. 아키코의 친구인 나기사(레이코 모리)가 누구와 대화하는지 보여줘!, 할머니의 딸을 기다리는 애절하고 가슴 아픈 얼굴을 보여줘!, 타카시의 눈치 없는 동생을 보여줘!, 노리아키의 화난 모습을 보여줘! 등 하지만 이러한 질타가 가뿐히 거절되면서 프레임의 한계가 느껴지는 것이다. 프레임의 한계가 가장 극적으로 느껴지는 장면은 이웃집 여자가 자신의 집 창문을 통해 아키코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다. 그녀는 조그마한 창문에 얼굴만 빼꼼 드러내고 자신이 타카시를 얼마나 흠모하는지를 말한다. 그녀의 타카시에 대한 존경과 흠모는 창문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그녀의 상황 때문에 굉장히 기괴하게 느껴진다. 즉 카메라 프레임으로 상징되는 그녀의 작은 창문이 그녀를 기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괴한 타카시 이웃집 여자를 통해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프레임의 한계를 유머러스하게 드러낸다. 확실히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프레임의 한계를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보통은 이 한계를 극복하고자 롱테이크로 유려한 카메라 동선을 뽐내거나 컷을 쪼개고 쪼개 많은 것을 담아내려 할 것인데 이 감독의 선택은 그렇지가 않다. 그렇다면 이 감독은 영화의 한계를 의도적으로 환기시킴으로써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앞서 말했듯이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영화로 사랑을 표현할 수 없음을 말한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몸을 파는 아키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가족의 사랑을 상징하는 아키코에 대한 할머니의 집착, 연인끼리의 사랑을 상징하는 아키코에 대한 노리아키의 집착, 육체적 탐닉으로서의 사랑을 상징하는 아키코에 대한 타카시의 집착 그렇다. 아키코에 대한 이들의 행위는 사랑이 아닌 집착으로 묘사된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이 점 역시 기괴한 타키시 이웃집 여자를 통해 말한다.  이 기괴한 여자는 집안에서 타카시를 지켜보며 자신의 사랑을 표출한다. 또한 그녀가 타카시를 사랑하는 이유는 자신의 상황에 알맞기 때문에 즉 그녀의 동생을 돌보며 결혼생활을 할 수 있는 남자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이 기괴한 여자의 집착을 통해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집착을 정의한다. 지켜보는 사랑 그리고 이유가 있는 사랑 뒤에 사랑이 붙어 아름답다고 착각하지 말자. 사실 사랑도 뭣도 아닌 집착이니 말이다. 이제 사랑에 빠진 것처럼! 이 제목의 엄밀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할머니, 노리아키, 타카시는 아키코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랑이 아닌 집착이 된다. 그러니 이 영화의 제목은 "어머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라는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것같이 거짓된 연기를 하는 이들에게 던지는 돌멩이가 된다. 할머니와 노리아키는 아키코가 창녀가 아닌 여자이길 바란다. 타카시는 더욱 바보다. 돈을 지불하고 아키코와의 하룻밤을 샀음에도 그는 아키코와의 근사한 식사와 대화를 하기를 바란다. 이 얼마나 멍청한가 창녀임을 알고 있음에도 창녀가 아닌 아키코를 바란다. 이러니 그들의 사랑은 사랑에 빠진 것처럼 보이며 기괴한 이웃집 여자와 같이 집착이 된다.

좀 더 집착이란 단어를 살펴보자. 기괴한 이웃집 여자의 타카시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어떻게 할머니, 노리아키, 타카시의 행위와 같은 것인지 좀 더 알아보자. 집착의 대상은 언제나 실체가 없는 것들로 향한다. 흔히 사람들은 젊음, 돈, 명예 등에 집착한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있지 않은 것을 바란다. 젊으면 젊음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돈은 언제나 잃어버렸을 때 더욱 안타깝다. 혹은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가 집착을 만든다. 명성 또한 마찬가지이다.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를 미리 생각하고 위축되거나 발버둥 된다. 이들은 결국 집착의 대상을 지켜보게 된다. 실체가 없으니 지켜볼 수밖에 없다. 손을 뻗어도 허우적 될 뿐이니 지켜보게 된다. 그래서 지켜보는 사랑은 집착이 된다. 그렇다면 아리따운 여자를 스토킹 하거나 노리아키와 같이 자신의 연인에게 몇 번씩 확인 전화를 하는 집착은 그 여자라는 실체가 있지 않느냐? 아니다 그들의 대상 또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들은 더욱 멍청하다. 사랑하는 혹은 갈망하는 이유를 만들어  내어 실체를 지워버린다. 스토킹 하는 것들은 그 여자에 대한 온갖 판타지를 만들어내서 그녀를 지워버린다. 자신의 연인에게 집착하는 것들은 연인이 클럽에 가지 않는 여자 혹은 자신 옆에만 있는 여자 혹은 순종적인 여자 등 스토킹과 마찬가지로 연인에 대한 온갖 판타지를 만들어내서 실체를 지워버린다. 그래서 이유 있는 사랑은 집착이 된다. 그녀를 혹은 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타지를 충족하려는 이유가 있는 사랑이기에 이유가 충족되지 않으면 순식간에 집착을 한다. 그러니 창녀가 아닌 아키코를 지켜보는 할머니,  아키코가 창녀가 아님을 확인하려는 노리아키, 아키코가 창녀임에도 애써 부정하는 타카시는 아키코 그녀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 집착이 된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재치 있게도 이들의 행위가 사랑이 아님을 아키코의 입술 즉 창녀의 매혹적인 입술을 통해 말한다. 할머니를 보며 울던 아키코는 몸을 팔기 위해 립스틱을 칠하고 그런 그녀의 입술은 노리아키에게 얻어터지고 얻어터진 입술을 치료하려는 타카시의 몸짓은 끝끝내 부정된다. 사랑을 속삭이고 아름다운 키스를 할 수 있는 아키코의 입술은 집착하는 이들에 의해 돈을 버는 도구가 되고 볼품없이 터지고 치료되지 않는 상처가 된다. 누구도 그녀의 섹시한 입술을 그대로 사랑하지 않은 결과다. 결국 영화는 창녀가 주인공임에도 섹스 장면이나 그 비슷한 행위조차 나오지 않는다. 아무도 그녀의 입술을 받을 가치가 없으니 말이다. 이로써 하나도 닮지 않은 그림 앞에 서서 그림과 같은 포즈를 취하며 닮았냐 묻는 아키코의 모습은 아키코가 그림과 같이 지켜보는 대상이 되었고 무언가를 닮아야 하는 이유 있는 대상이 되었음을 말해주는 가슴 아픈 장면이 된다.

이후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사랑에 빠진 것처럼 연기하는 이들에게 돌멩이를 던진다. 이 돌멩이가 노리아키가 던진 돌멩이로 보일 수 있지만 나는 이 돌멩이는 감독 본인이 던진 거라 생각한다. 돌멩이가 창문을 깬 후 노리아키의 꽥꽥되는 소리는 멈춘다. 이는 노리아키 역시 돌멩이의 타깃임을 말해준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돌멩이를 던져 이들의 집착적인 사랑을 강하게 부정한다. 영화 마지막에야 던져지는 돌멩이는 앞의 지켜보는 사랑, 이유 있는 사랑 즉 나태하고 게으르고 권태로운 것 모두를 순식간에 부정한다. 이로써 이 영화는 상쾌한 영화가 된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영화 마지막에야 던져졌다는 것이다. 아니 던져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이 더욱 상쾌한 영화가 되려면 모든 것을 부정하는 돌멩이가 창문을 깬 순간 그때 영화가 끝났어야 했다. 무언가를 부정하는 싸움에서 이겼으면 쿨하게 뒤돌았을 때가 더욱 상쾌해 보인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상대가 피 흘리는 걸 지켜보거나 더 괴롭히려 하는 순간 지저분한 양아치가 된다. 하지만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돌멩이가 던져 진후 몇 초간 깨어진 창문을 바라본다. 이 몇 초간의 지켜봄이 바로 영화가 사랑을 다룰 수 없음을 말해준다. 그렇기에 돌멩이는 마지막에야 던져진 것이다. 돌멩이가 던져진 후의 장면은 영화가 담아낼 수 없으니 말이다

이제 이 몇 초간의 지켜봄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보자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만들어낸 몇 초 덕분에 우리는 음미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쿨함을 음미할 때 섹시함을 느끼듯 이 몇 초를 음미하게 되면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섹시한 영화가 될 것이다. 먼저 감독이 던진 돌멩이를 주워보자. 이 돌멩이는 창문을 깨고 들어온 돌멩이라 흔히 우리들 발에 치이는 평범한 돌멩이와 구별된다. 그러니 손을 뻗어 그 감촉을 느낄 가치가 생긴다. 아니 느껴야만 한다. "뭐야 씨발" 하며 다시 집어던질 것인지 고이 집안에 보관할 것인지 선택해야 만한다. 그러니 먼저 돌멩이를 손에 올려 그 거친 촉감을 느껴야 한다. 이것이 감독이 말하는 사랑이다. 사랑은 돌멩이가 창문을 깨듯 그렇게 시작된다. 외로움, 공허함, 안전함 에서 탄생되는 고독은 우리를 창문으로 둘러싸인 방에 고립시킨다. 돌멩이는 이 고립된 우리를 세상과 연결시켜 준다. 뚫린 창문으로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더 이상 창문 밖을 지켜만 볼 수는 없게 된다. 산들거리는 바람이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할 수도 있고  너무 센 바람에 몸이 덜덜 떨리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지켜봄이 부정될 때 세상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세상과 연결된 우리는 돌멩이부터 주워볼 것이다. 돌멩이를 손에 꽉 쥐는 데는 아무런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한 호기심? 아니 그것도 아닐 것이다. 자연스러운 이끌림이 맞을 것이다. 그렇게 이유 없이 돌멩이는 우리의 손 안에서 따뜻해진다. 이후 이유 없이 손안에 쥔 돌멩이를 놓아줄 때 그때 이유들이 생긴다. 손이 저려서? 까끌한 촉감이 싫어서? 색깔이 맘에 들지 않아서? 혹은 돌멩이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사진을 찍으려고? 수석을 만들어 장식하려고? 이유가 생기기 시작하자 우리들 손에 의해 따뜻해진 돌멩이는 점점 차가워진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사랑을 엄밀히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돌멩이를 손에 쥐었을 때, 지켜봄을 그만하고 이유 없이 돌멩이를 손에 품었을 때 그때만이 사랑이라 한다. 그 전, 그 후는 단순히 사랑에 빠진 것처럼 연기하는 것이 아니냐 묻고 있다. 이렇게 사랑에 대한 감독의 엄밀한 구분은 영화의 한계를 지적하기 시작한다.

영화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어떻게 볼 것인가 는 돌멩이를 손에 쥐는 우리의 사랑을 담아내지 못한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는 돌멩이가 창문을 깨기 전을 담아내는 것이고 어떻게 볼 것인가는 돌멩이가 손에서 떨어진 후를 담아낼 뿐이다. 영화는 그렇게 지켜봄과 이유 있는 시선으로 구성된다. 그렇기에 영화는 사랑을 담아내지 못한다. 또한 사랑이 아닌 행위를 집착으로 본 감독의 시선은 영화의 흐름에 대한 비판을 같이하게 된다. 집착이란 언제나 지속적 시간이 내포해 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집착의 강, 약을 결정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흐름 역시 지속적 시간이 내포해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영화의 질을 결정한다. 1시간 미만의 영화는 독립영화로, 2시간 정도의 영화는 대중영화로, 4시간 이상의 영화는 예술영화로 평가된다. 정말이지 너저분하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이 너저분함을 할머니, 노리아키, 타카시의 2번 반복되는 행동을 통해 더욱 진절머리 남을 표출한다. 할머니의 무서운 기다림을 아키코는 두 번 본다. 노리아키의 지저분한 추궁은 한 번은 전화로 한 번은 학교 앞에서 2번 반복된다. 얻어맞은 아키코에게 향하는 타카시의 굼뜬 접근은 2번의 주차 후 이루어진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영화의 흐름 즉 집착에서 파생되는 시간의 지속성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이제 앞서 내가 말한 영화의 혁명성 즉 예술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를 제시했다는 점은  키아로스타미 감독에겐 혁명도 뭣도 아닌 구속이 된다. 사랑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불구자의 장애일 뿐인 것이다. 영화감독은 카메라로 이야기한다. 허나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카메라에 담길 수 없으니 그는 돌멩이를 집어던진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던진 돌멩이는 창문뿐만 아니라 카메라 프레임까지 깨려는 애절한 시도였다. 몇 초간의 지켜봄이 가슴 아픈 것은 감독의 시도가 실패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몇 초간의 지켜봄에는 영화감독으로서는 도저히 카메라를 부술 수 없다는 절망이 서려있다. 그러니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카메라 전원을 끄고 사랑을 게으르고 나긋하게 노래하는 엘라 피츠제랄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패배를 흠씬 느낀다. 어떤가 쿨함을 음미하니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얼마나 섹시한지 느껴지는가? 쿨함 뒤에 살랑이는 보듬어줘야 할 아픔이 느껴진다. 얼른 이 감독을 포옹해 줘야겠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카메라는 돌멩이가 깬 창문의 구멍조차 보지 못한다. 돌멩이가 창문을 깨자마자 두터운 커튼은 이를 덮어버린다. 커튼은 살랑이지도 못하고 있다. 그만큼 감독은 영화의 한계에 짓눌리고 있다. 우리는 그의 절망을 음미했다. 이는 적어도 커튼을 살랑이게끔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프레임 안에 갇힌 감독을 구해내야겠다. 카아 로스타미 감독을, 아키코를 구출해보자.

영화의 탄생 이후 영화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흔히 새로운 기술 혹은 진보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껴 꺼려하는 보수적 사람들이라 하는 경우가 많다. 분명 그러한 이들이 있었지만 몇몇 예민한 이들은 영화의 프레임에 거부반응을 일으 켰던 것이다. 이들은 프레임의 위험성을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영화가 우리의 삶에 친밀해 진후 우리들은 이제 프레임을 정의할 수 있을 정도로 인식하게 되었다. 예민했던 이들이 무엇에 거부반응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진취성 뒤에 숨은 수동성 나는 프레임이 가진 위험성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역시나 문제는 수동성이다. 프레임이 흔히 사용되는 곳은 정치권이다. 정치권만큼 특정한 인물, 혹은 단체를 특정한 프레임 안에 가두었을 때 이득을 효과적으로 취할 수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여론조사만 생각하더라도 프레임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정치권에서 활용되는지 알 수 있다. 경상도, 전라도, 수도권, 경기도 등 지역만 나누어도 어느 정도 표의 색깔이 보인다. 이에 더해 성별, 연령, 직업군이 더해지면 표의 색깔은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여론조사는 특정한 인물을 프레임에 가두어 미래를 쉽게 예측하려 한다.

(이주리의 살다)


그렇다면 여론조사에서 예측에 벗어난 인물은 어떻게 구분될까? 이 질문에서 진취성 뒤에 숨은 수동성이 주목된다. 여론조사에서 예측에 벗어난 인물은 단순히 변수라는 변기통에 집계된다. 인간의 군상을 알아보고자 하는 이들에겐 변수란 방해물에 지나지 않다. 얼른 변기 물을 내리려 한다. 하지만 이 변수에 속하는 이들을 직접 만나봐라. 경상도에서 박정희를 증오하며 살아가는 지혜, 전라도에서 전두환의 구둣발에 흥분하며 살아가는 지혜, 자신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지혜 등 변수라는 변기통 안에 절대로 담을 수 없는 다양한 경험과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프레임 속에 속해 있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각자 박정희를 흠모하게 되는 과정, 전두환의 어떤 부위를 도살해내고 싶은지, 나이에 따른 삶의 고민에 대한 강도 등 모든 이들이 다르다. 이러한 것을 프레임은 간단히 정리하여 전망을 제시한다. 이 전망에 눈이 끌리면 우리는 다름을 알아보려 하지 않는 수동적인 자가 된다. 수동적인 자는 할 수 없다. 동네를 배회하는 미친 사람을 보며 그 사람을 아껴주고 싶다는 마음이 훅하고 와 닿아 자연스레 베푸는 사랑을 할 수 없다. '미친 사람'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낼 것이다. 혹은 미치지만 않았다면 사랑해 줄텐데 하는 게으르고 나태한 사랑만을 할 것이다. 좌와 우를 나누는 정치적 프레임, 피부색이나 눈깔 색으로 나누는 인종 프레임, 부자와 가난을 나누는 자본주의 프레임, 이러한 모든 프레임을 깨부수어야 우리는 사랑한다 할 수 있다. 저 사람은 냄새가 나서 싫어, 저 사람은 일배를 하기에 싫어, 저 사람은 빨갱이라 싫어 같은 혐오는 저 사람은 이뻐서 좋아, 저 사람은 돈이 많아 좋아, 저 사람은 똑똑해서 좋아 같은 편향적이고 집착적인 사랑과 같은 것이다. 프레임이 깨져야 우리의 사랑 표현은 저 사람이니 좋아로 간결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구색을 갖춘 첫 영화가 인간끼리의 사랑을 다룬 영화가 아닌 "달세계 여행"이라는 SF영화 임에 놀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화 프레임은 인간의 사랑보다 진취적인 것을 담아내는데 효과적이니 말이다. 달세계로 가는 행위를 긍정하는 이 영화의 프레임에 동조하는 순간 우리는 달에서 잡아온 외계인의 서러움, 낯섦은 등한시하게 된다. 그 외계인을 단순히 승리 뒤에 오는 포획물로 보게 될 것이다. 끔찍하다.

 우리는 이제 영화를 보는 방법을 달리 할 필요가 있다. 진취성 뒤에 숨은 수동성을 어떻게 깨부술 것인지 생각해보자. 이미 해법은 다 제시되었다. 프레임을 깨부술 정도의 몰입, 단순히 눈알을 감독에게 위임하는 것을 넘어 몰입해야 한다. 프레임의 사각틀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더 깊게 영화로 들어가자 그렇게 했을 때 외계인의 축 처진 몸짓이 보일 것이며 아키코의 두려움에 떠는 눈이 보이게 된다. 단순히 프레임에 따라 수동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영화에 몰입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극장 밖을 나올 때 영화감독은 차마 깰 수 없는 프레임을 부술수 있는 돌멩이 하나 손에 쥐고 나올 수 있다. 이렇게 해야 "영화는 재밌으니 보지"라는 말에 힘이 실린다. 영화는 재밌어서 본다는 말은 현재 너무나 수동적이다. 자신들은 타인의 취향을 존중한다며 "재밌으면 그 영화는 너한테 좋은 영화야" 라며 얼빠진 소리들을 한다. 과연 그들은 진짜로 영화를 재밌어서 보는가? 프레임을 부술 만큼 영화에 몰입했을까? 추파를 던질 돌멩이 하나 못 건졌으면서 무엇을 재밌게 봤다는 것인가? 영화가 만들어낸 프레임의 겉만 햩았을 뿐이다. 그러니 언제나 사랑을 다루는 로맨스 영화는 어떤 멋있는 남자가, 어떤 아름다운 여자가 캐스팅되는가에 열을 심하게 올린다. 심지어 영화 속 주인공들은 도덕적으로 용인될만한 사랑을 해야 한다. 혹은 도덕적인 것을 뛰어넘을 정도의 매력을 지녀야 한다. 한때 나쁜 남자가 인기가 많았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쁜 남자가 진짜 매력적인 것은 솔직하기 때문인데 프레임의 겉만 햩은 자는 이점을 모른다. 솔직함을 가리는 매력에만 매몰된다. 그렇게 하찮은 이유로 나쁜 남자는 인기가 많아진다. 그러니 나쁜 남자는 만나보면 개새끼야 라는 헛소리를 하게 된다. 개새끼임을 직시하고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혹시 자신이 키우는 개가 자신의 배설물을 먹는 모습을 보고 그대는 야단을 치고 혐오스러워하는가? 그러지 마라 그 개는 자신의 배설물을 더럽다 듯이 치우는 그대를 보고 가슴이 아픈 것이다. 자신의 배설물을 먹는 개의 행위는 그대의 거짓된 사랑에서 기인된다. 그대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힘들기에 배설물을 먹을 정도로 사랑하는가? 프레임의 겉만 햩을 뿐이다. 우리는 이제 영화를 보는 방식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사랑을 영화에 담고자 하는 감독은 자신의 프레임을 부술 것을 관객에게 요구한다. 계란은 깨지지 않으면 무미건조한 타원형에 불과하다. 극장을 나올 때 손에 쥔 돌멩이로 계란을 쳤을 때 그때서야 껍질 속 탐스럽운 노른자의 자태를 볼 수 있으며 병아리가 되지도 못한 노른자의 아픔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본다는 건 그런 것이다. 감독은 자신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계란이 단순히 감상되길 바라지 않는다. 매끈한 표면을 따라 흘러가길 바라지 않는다. 관객의 돌멩이에 무참히 꺠지길 기다리는 것이다. 돌로 계란을 깨듯이 그렇게 영화를 보자.

이제 아키코의 통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카메라는 단순히 게으른 카메라가 아닌 관객에게 적극성을 요구하는 절절한 카메라 되었다. 아키코의 목소리는 돌멩이에 깨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과 같이 관객에게 소곤 된다. 관객은 그녀의 권태로운 목소리를 들으며 적극적으로 아키코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된다. 그렇게 돌멩이를 줍기 위해 몸을 구부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아키코 그녀 자체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이 글은 어떤 평론가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 평론 글을 보고 화가 나서 적게 되었다. 그는 아키코가 창녀임을 불쌍하게 봤다. 영화에 왜 아키코가 몸을 팔아 돈을 버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아키코가 어떤 불행한 계기로 몸을 팔게 되었다 생각한다. 아키코에게 전형적인 불쌍한 창녀 이미지를 덧대고 있다. 이 무슨 헛짓거리인가! 결국 그 평론가 역시 할머니, 노리아키, 타카시처럼 아키코가 창녀가 아님을 바라는 것 아닌가? 이러한 프레임에 안타까워하는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한숨은 들리지 않는 것인가? 그 평론가 역시 아키코의 아름다운 키스를 받기엔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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