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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리 Aug 30. 2022

예민해서 밥 벌어먹고 삽니다.

더 많이 느끼기 때문에 더 많이 생각한다.

'예민하다.'


  '예민하다'를 설명하는 국어사전의 정의 중 ‘무엇인가를 느끼는 능력이나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빠르고 뛰어나다.’라는 설명이 가장 첫 번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극에 대한 반응이나 감각이 지나치게 날카롭다.’라는 두 번째 설명으로 이 단어를 이해하곤 한다. 그래서 단어의 의미도, 단어가 주는 느낌 자체도 '지나치게 날카롭다'.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어감 때문에 많은 예민한 이들은 자신의 특징을 숨기고 싶어 하고, 너무 많은 것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가혹한 운명에 괴로워한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예민하다는 평가를 들을까 봐 적당히 수더분한 척하는 ‘가짜 털털이’이다.


'예민하다'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힘


  내가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아니 사실 많이 예민하다고 확실히 인지한 것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였다. 아마도 자아 성찰 능력, 그리고 나에게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는 메타인지가 급격히 발달한 시기여서 그런 것이 아닐까. ‘예민’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힘이 있어서 인지한 순간 예민한 사람을 더 예민하게 만든다. 아주 작은 불편함에도 ‘내가 예민해서 그렇구나.’라는 자학적 통찰을 제공하고 이것은 감각에 더욱 몰두하게 하는 악순환을 생성한다. 특히 이러한 예민함은 대인관계에서 많이 발현되곤 한다.


"지금 저 말, 나만 기분 나쁜거야?"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와 말장난을 하다가 친구의 사소한 장난에 기분이 매우 나빴던 적이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아서 나 또한 우선은 수더분한 척하며 넘어갔다.  하지만 나의 예민함은 계속해서 그 말을 곱씹게 했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주제(?)에 친구와의 트러블은 싫어하는 ‘좋게 좋게’ 주의자였던 지라 기분 나빴던 말을 혼자서 삼킬 수밖에 없었다(무슨 말인지 희미하게조차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별 거 아닌 말이었던 듯하다. 그래. 그러니까 예민한 사람이겠지.). 혼자 삼키는 과정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마치 식도에 염증이 잔뜩 생긴 상태에서 뻑뻑한 고구마를 물 없이 삼켜야 하는 기분이랄까. 그것이 소화되는 오랜 시간 동안 나의 ‘예민 안테나’는 다양한 신호를 쫓는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 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나라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혹시 내가 그런 말을 했다면 친구는 기분 나빠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예민한 이들의 머릿속


  이렇게 나는 나의 예민함이 감지한 뻑뻑한 무언가를 소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친구를 이해하고 나를 이해한다. 이 과정에서 내가 기분 나빴던 상황에서 더 나아가 친구의 태도, 성격, 의도를 전반적으로 훑어보게 된다. 또 그 말이 나의 어떤 부분을 건드렸는지를 알기 위해 내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 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머릿속에 시끄러운 폭풍우가 한 차례 지나가고 차분함이 남는다. 그리고는 결론을 내겠지. “충분히 친구로서 할 수 있는 장난이었어. 역시 내가 예민했네.” 또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결국 나는 그 과정을 소화해 냈고 내 예민함이 어떤 방향이든 결론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더 많이 느끼기 때문에 더 많이 생각한다.


  예민하다는 것은 더 많이 생각할 기회가 제공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만약 내가 친구들의 어떤 말에도 기분 나빠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 친구에 대해, 나에 대해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할 시간이 있었을까?(물론 예민하지 않고도 늘 풍성하게 생각하고 끊임없이 통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존경한다.)

  어린 친구들은 무엇인지 잘 모를 안테나. 어떠한 신호를 정확히 감지하는 데 쓰인다. 더 많이 느끼기 때문에 더 많이 생각한다는 것은 안테나가 작동되는 것과도 같다. 안테나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다. 어떠한 소리를 듣고자 안테나를 설치한다면 우리는 듣고 싶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신호를 감지하다 보면 때때로 너무 많은 것을 감지하기도 하고, 잘못 감지하여 ‘지지지지직’ 잡음 소리가 나기도 한다. 그 소음은 너무 크고 시끄러워서 고통을 유발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테나를 통해 나와 타인의 마음에 방영되고 있는 라디오를 들을 수 있다. 수많은 라디오 방송을 듣다 보면 더욱 지혜로워지고, 더욱 해박해지며, 청취 가능한 라디오 채널이 더욱 많아지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을 선물처럼 여길 수도 있겠다.


"예민해서 밥 벌어먹고 삽니다."


  결국 나는 학창 시절부터 느껴 온 내 예민함을 다른 사람의 마음과 의도, 표정과 기분을 잘 읽는 능력과 그것이 나에게 어떻게 느껴지는 지를 통찰하는 역량으로 확장시켰다. 이러한 역량은 내가 상담심리사라는 목표를 가진 것과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수행해 왔던 모든 과정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는 평생 예민해서 피곤하겠지만, 예민하기 때문에 생긴 달란트로 평생 밥을 먹고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자타공인 예민한 사람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들 역시 나처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통찰하고, 알아차릴 것이다. 때로는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이따금 한숨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나 재능에 ‘예민함’이 상당 부분 기여했을 거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예민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한 감각,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왠지 내 마음을 알아차려 줄 것 같은 묘한 안도감, 끊임없이 수집한 데이터를 통해 결정을 내리는 사람에게서 오는 신뢰감. 내가 그들에게서 느끼는 것들이다. 나는 누구보다 그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 예민한 사람들에 대한 시선은 결국 나에 대한 시선이기도.


예민함이 주는 선물


  물론 누군가 나에게 ‘예민해지지 않는 약’을 판다면 아무리 비싸더라도 한 알쯤 사고 싶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아는 선에서 그런 약은 없다. 따라서 나는 이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살기로 했다. 운명을 바꿀 알약이 없다면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예민함을 탓하며 날카롭게 사는 것, 그리고 예민함을 받아들이되, 너무 괴롭혀서 미안하다는 의미로 예민함이 건네는 선물을 함께 받는 것. 사람의 마음에 대해 당신보다 아주 아주 조금 더 공부한 초보 상담사 입장에서, 후자를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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