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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 위의 앨리스 Jan 05. 2024

매일 도대체 뭐하세요?

도비가 얻은 것과 잃은 것

 내가 마흔을 앞두고 퇴사하겠다고 했을 때 공통질문은 "그럼 뭐할거야?" 였다. "뭐 안 할 건데요." 라는 대답을 하곤 했던 나를 보며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뉜다. "장난하는 건가?" 하는 듯한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반응하는 쪽이거나, "오 멋있다. 짱인데?" 라고 부러워하는 쪽이거나.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도 가벼운 반응이거나 이해를 딱히 하는 것 같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 같았다. 내가 서른이거나 20대 후반 언저리였다면 이런 대답도 '젊으니까 그럴수 있다'는 포용범위일 수 있지만 직장생활을 은퇴하긴 이르지만 그렇다고 어리지 않은 나이에 저런 대답은 당최 철딱서니 없어보이기 딱이다.


 직장생활을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할 때 크게 생각한 것은 두가지였다. "삶에 대한 태도" 부분과, "생계" 부분이다. 첫번째는 앞선 글에서 언급했으므로 더이상 쓰지는 않겠다. 생계 부분의 경우 다행히도 나는 그동안 전월세 유목생활을 하며 차근히 빚을 다 상환했고 전세보증금에 그간 모아둔 약간의 현금과 부모님의 도움을 조금 받아 빚없는 자가를 마련했다. 그리고 나서 남은 현금을 운용한다고 했을 때 보수적인 관점에서 은퇴 직전 세후 보수의 반 이상의 월 수입을 낼 수 있을 때 퇴사를 결정했다.


 현재로서는 큰 이변이 없는 이상 노동생활을 하지 않아도 생계 유지가 가능하다. 내 40년의 삶은 "무엇을 해내야하는, 해야하는" 삶이었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가 아닌 노동으로서 사회에 가치를 증명했을 때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존중을 받곤 한다. 취업난으로 어쩔수 없이 쉬고 있다던가, 엄청난 사회적 업적을 이미 세웠다던가, 충분히 긴긴 세월 노동을 해온 사람이 아니면 그냥 쉬는 것은 암묵적으로 죄악시 한다. 나도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맡기는 대가로 얻는 월급생활을 더이상 해나가고 싶지 않았고, 사회에 크게 악을 끼치지 않는 선에서 적은 시간에 필요최소한의 수입을 내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뿐이다. 나는 사회에 내가 어떤 기여를 함으로써 내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래서 뭘 하는 삶 보다는, 뭘 안하는 삶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기본 방향은 그렇지만 정말 숨만쉬고 살 수는 없겠지. 내가 주기적으로 하는 사회활동은 현재 브런치와 필라테스가 유일하다. 나의 필라테스 선생님은 매번 내게 묻는다. "오늘은 뭐 하셨어요?" 내 대답은 거의 똑같다.

놀았어요 혹은 낮잠잤어요 이다. 하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생각보다는 바쁘다. 보통 아침 8시 전후로 일어난다. (초반엔 직장노예 시절의 습관 때문인지 아무리 늦게 자도 다섯시에서 여섯시 정도면 눈이 떠졌다)깨어나면 침구를 젖혀놓고 온 집안 환기를 시킨다. 그리고는 1분 거리에 있는 본가에 늙은 멈머의 아침문안을 여쭈러 간다. 열 여덟살인 친구라 하루하루의 상태가 다르다. 나이들고 몸도 아파서 그런지 하도 으르렁대고 입질을 해서 잘 씻기질 못하는 바람에 냄새가 좀 나는 이친구를 한번 꼭 안아주고 아빠가 내려주신 커피를 엄마와 함께 한 잔 한 후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 침구를 정돈하고 집안일과 청소를 한다. 그 사이에 경제 관련 유튜브를 보고는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는다. 그러곤 잠깐 쉬거나 낮잠을 자고 필라테스에 간다. 다녀온 후에는 이른 저녁을 먹고 보고싶었던 TV프로그램을 보거나 책을 보거나 글을 쓴다. 중간에 약속이 있거나 볼일을 보게되면 휴식시간은 저녁으로 미뤄진다. 엄마나 지인과 낮술을 하는 때가 있는데 그게 아주 또 꿀맛이다. 그리고 밤이 되면 미 증시를 보다가 잔다.


 현재의 주말과 회사다닐 때의 주말은 사뭇 다르다. 직장인 시절 주말휴일은 한정된 시간이기에 주중에 못다한 밀린 일들을 빨리 해치우느라 바빴다. 세차도 주유도 해야하고 엉망인 집청소도 빨래도 한다. 이건 기본이고 차량을 정비한다던가 고장난 물건을 AS맡긴다던가 하는 일도 생각보다 자주 있다. 누워서 맘편히 넷플릭스를 보려면 주말에도 일찍 일어나서 쓰레기버리기->밀린 설거지, 세탁->청소기->개인용무를 해치우고서야 겨우 늦은 점심을 먹는다. 그러고 나면 피곤해서 넷플이고 뭐고 틀어둔채로 잠들곤 했다. 그러고 일요일이면 그냥 짜증이 났다. 왜냐하면 보통 주말 하루는 지인 결혼식이나 가족행사 등이 있어 쉴틈이 전혀 없어 그렇게 일요일 오후가 되면 가슴 속 돌덩이가 얹혀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거 당연히 없다. 도비에게 주말은 온전히 축제의 휴일일 뿐이다.


  쉬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어떻게 매번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냐고 할 수도 있다. 나도 사실 도비가 된 지 반년도 되지 않아서 몇 년이 흘러도 지금처럼 지루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뭘 하고자 할 때 할 수 있는 시간적 체력적 여유가 있어서 그런지 삶의 무료함에 대한 공포나 우려는 전혀 없단 거다. 지내다보면 생각보다는 바쁘다. 일단 은행이나 병원 등 생활적인 볼일을 보러 외출해야 할 때가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집안일이라는 게 끝이 없다. 하지만 나는 집안일하는 걸 좋아한다. 하면 할수록 직접적으로 삶의 질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이사를 하느라 집안용품 등을 구매하는 것을 빼고는 사실 쇼핑할 일도 거의 없다. 내가 돈을 쓰는 거의 유일한 유흥비는 여행이다. 작고 소중한 퇴직금(이라고 썼지만 그래도 꽤 많다)으로 15년 노예생활 청산 기념으로 엄마와 베트남에 휴양여행도 다녀왔다. 꽤 피곤한 상태로 다녀와서 그런지 한동안 여행은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한달이 채 못되어 멀리 떠나고 싶어 비행기표를 뒤적거렸다. 아, 도비의 큰 장점 중 하나는 바로 땡처리 향공권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그 말인 즉, 남들 못갈 때 저렴한 가격으로 여행을 할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코로나로 오랫동안 해외여행을 가지 않아 항공사마다 마일리지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그래서 마일리지표를 뒤적이다 뉴욕행 비행기표를 마일리지로 끊었다. 그렇다. 나는 뉴욕에서 나의 30대 마지막날과 40대의 첫날을 보내는 중이다. 맨하탄 미드타운에 있는 한적한 블루보틀에서 글을 끄적이면서. 사람구경도 하고. 미술관투어를 하려고 보름일정으로 와 있다. 호텔비도 임박해서 예약하다보니 베트남 갔을 때보다 훨씬 저렴하게 얻었다. 맨해튼 미드타운에서 창문밖으로 엠파이어스테이트가 보이는 뷰가 일품인 방은 1박당 세금포함 130불이다. 이쯤하면 정말 뭣도 안 부러울 삶이지 않은가 싶다. 스스로는 말이다.


선물같은 아침풍경. 하지만 매일이 이런 축제같은 날은 아니다.


 도비가 잃은 것이 뭘까.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 그리고 사회적 지위(어찌됐든 미국 입국심사때 회사원이라고 말할 수가 없어졌으니까)그리고 아마도 고된 회사생활 속에도 단비처럼 오던 동료들과의 소소한 수다와 시간들. 그 외에는 잘 모르겠다. 월급은 몹시 소중한 것이므로 크다면 엄청 큰 것이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진다.  동료들은 아주가끔 그립기도 하다. 물론 좋았던 사람들만. 아직 직장인때가 안 벗겨진 것인지 아직도 종종 회사에 다니는 꿈을 꾼다.

사실 어젯밤에도 나를 괴롭히던 상사와 후배놈이 동시에 나를 또 괴롭히는 꿈을 꿨다.  현실에서는 그렇게 반발한 적이 없었던 거 같지만 어제는 미친듯이 싸웠다. 시원하기도 하지만 찝찝하기도 한 꿈이었다. 도비가 되면서 좋은 것이 지지고 볶아야 되는 지긋지긋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났다는 것이었는데 꿈에서 또 만나다니!

나에게 직장인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냐고 물어본다면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할텐데 자꾸 꿈을 꾸는 거 보면 무의식으로는 아닌가 싶을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대답이 바뀌지는 않을 것 같다.  요즘 임원포기 부장, 팀장 포기 차장들이 많아진다는데 인간사 다 똑같다. 나도 그랬으니까. 뭐 올라가봐야 윗사람들 비위맞춰야 되고 하라는 거 해야하고 게다가 밑에 직원들은 말 안듣고 중간에 껴서 힘들기만 하다. 그렇다고 뭐 큰 명예나 돈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한 인간으로서 도비의 삶은 평온하다. 부모님도 자주 만나고, 아플일이 많은 18년지기 멈머도 매일 챙겨줄 수 있고, 지인들 안부도 먼저 챙길 수 있다. 오히려 사람도리를 잘 하는 것 같다. 정신과 의사선생님도 조금 쉬다보면 시야가 넒어지고, 또 그때는 다른 뭔가를 하고싶어질 수 있지 않겠냐고 말씀하셨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사회적 성취를 위해 굳이 뭘 하는 삶보다, 나 개인으로서의 삶에만 충실한 하루하루가 기대했던 것보다도 더 좋다. 잠도 많이 자니까 몇십년간 이렇게 머리가 맑았던 적이 있었나 싶도록 상태도 좋다. 오늘 미국은 1월 1일이다. 가고싶었던 사설컬렉션의 미술관들이 모두 노는 날이다. 그냥 오늘은 이렇게 카페에 앉아 여유롭게 있어볼까 한다. 난 도비니까!


 대단한 사람이 되겠다는 욕심은 전에도 앞으로도 전혀 없다. 그보다는 앞으로 평범한 좋은 이웃이 되고 싶다. 직장에 치여서, 가사에 치여서 피곤한 사람들은 타인을 배려하기 힘들때가 많다.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고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도 많다. 나는 일단 그랬었다. 치열한 삶을 내려놓은 지금은 그때와 같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유로운 만큼 좀더 생각하고 좀더 배려하자고 다짐한다. 지금 당장은 아직 철딱서니 없던 시절의 모습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겠지만 점점더 좋아지겠지. 논다고 개념까지 놀면 안 되니까. 하루하루 만나게 되는 적은 사람들에게 친절하자는 게 올해의 다짐이다. 치열하지 않게. 야박하지 않게.



도비는 미드타운 블루보틀에서 새해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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