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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 위의 앨리스 Dec 22. 2023

내가 이른 퇴사를 결심하게 된 이유

오롯이 '나'로 귀결되는 삶 

 나의 20대를 두 글자로 표현한다면"불안"이었다. 늘 초조하고 불안했다. 기자나 PD가 되고자 해서 졸업생 중 많은 수의 아나운서와 언론인, PD들을 배출했다던 나의 학교 학과는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었고 동기들의 90퍼센트 이상은 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정말 단 한번도, 단 한 순간도 교사를 꿈꿔본 적 없던 나는 마치 백조들 속에 혼자 미운오리새끼가 된 것 같았다. 그래도 내가 꿈꿔온 그 언저리에라도 가려고 교지편집 등의 활동을 했다. 그 속에서 얻은 것은 딱 한가지였다. 나는 데드라인이 있는 기사를 쓰는 일을 평생 하고 싶지 않다라는 것.  패닉이었다. 


 나는 여행을 사랑했고 또 돈도 벌고 싶었다. 그렇지만 불안했기 때문에 빨리 안정을 찾고 싶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 모든 욕구를 충족하면서 불안을 잠재워 줄 직업을 찾았고 공무원이라는 해답을 찾았다. 그 어려운 시험을 뭣도 없으면서 도전했다. 그렇다고 장수생이 될 능력도 자신도 없었다. 세 번만 보고 안되면 딱 포기하자. 고시촌에 숱한 S대 출신들과 또 영어와 제2외국어를 자유자재로 하는 언어천재들 틈에서 나는 배가된 불안과 싸워야 했다. 하고는 싶고, 안될 것은 같고, 어쩌지. 그렇게 장렬히 전사했다. 


 그렇게 20대 중반이 되었다. 그래도 비교적 어린 나이에 실패를 해서 다행이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원서를 넣었고 운이 좋게 한 공기업에 정규직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내가 비록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긴 했지만 불안과 미친듯이 싸웠던 결과 그래도 얻고자했던 것 언저리에 안착할 수 있었다. 


 불안은 거기서 끝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잘릴 것 같은 적은 없었지만, "여기가 끝일까?" 하는 생각에 늘 항상 어딘가로 도망갈 수 있도록 뭔가를 하고 있었다. 토익을 보고, 방송사에 입사원서를 넣었다. 그러나 한 곳에 적을 두고 다른 것을 도모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회사에 다녀오면 별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도 녹초가 되었다. 20대 초반엔 몇시간씩 두꺼운 원서를 읽어도 쏙쏙 들어오고 집중력도 좋았다. 하지만 회사에 입사하고 20대 후반이 되면서부터 그러한 체력과 집중력은 조금씩 떨어졌다. 내가 대체 그 많은 원서를 어떻게 읽고 시험을 쳤던 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또 한편으로는 회사에 밥값을 돌려주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부동산 금융 용어들 속에서 몰래 검색엔진에 외계어 같은 용어들을 검색하며 학습해야 했고 느린 업무속도를 감당하지 못해 늦은 시간까지 일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적응해나갔고 그렇게 30대를 맞이하면서 업무에 대한 불안감도 많이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회사생활은 내가 잘한다고, 내가 열심히 한다고 생각한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때로는 내 잘못이 아니어도 내 잘못이 되고, 내 딴엔 내가 잘해도 잘못한 것이 되곤 했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부족한데도, 이게 아닌 것 같은 일인데도 이상하게 남들에게는 반응이 좋아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하는. 그것도 썩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반대이든 아니든 찝찝하고, 혼란스러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껏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은 나의 선택으로 인해 귀결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정말 '나'의 것들이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속한, 혹은 속하고자 하는 '울타리' 에 귀속된 무엇을 얻거나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다. 한참을 그렇게 조직에 묶여 달리다 어느날 멈춰 돌아보니 그게 정말 온전한 '나'의 결과물이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회의감과 물음표를 가슴 속에 품고 꾸역꾸역 남들처럼 일상을 살아가던 어느날, 파리의 고속도로에서 커다란 트럭에 타고있던 차가 들이받치며 뱅그르르 돌아가던 순간 그냥 깨달았다. 아. 내삶이 이렇게 끝나는 건 정말 싫다. 인생이 이렇게 끝나고 만다면 마지막 순간 난 내자신을 원망하며 죽게 될 거란 것을. 마치 내가 탔던 그 택시가, 내가 몸담았던 평생의 울타리 같았다. 


 물론 퇴사의 결심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다. 오랜 연애의 마침표를 찍는데도 한 가지만 존재하지는 않듯이.

그렇지만 그 핵심은 분명 '나'를 찾고자 함이 크다.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높은 순도로 내 인생에 오롯이 반영되는 그런 삶을 한번은 살아보고 싶다는 것. 늙고 병들고 죽기 전에 말이다.


 하고싶은 것들은 되게 소소하고 일상적이다. 나는 퇴사 전부터 하고싶은 일 리스트를 만들어뒀다. 처음엔 스무개를 채우기도 힘들었지만 생각날 때마다 쓰다보니 80개 남짓 된다. 큰 것도 있지만 별거 아닌 것도 있다. 얼마 전 크리스마스를 맞아 트리를 꾸몄다. 초등학교 시절 이후로 몇십년만에 처음이지만 참 따스하고 행복했다. 리스트의 대부분은 회사를 다니면서도 할 수 있다면 할 수도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사람의 에너지는 한정적이다. 내게 100의 에너지가 있다면 회사에서 80에서 90을 소진해버린다. 회사일이 그 자체로 내 자아실현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높은 확률로 대부분 그렇지 않다. 그 확률 속에 나도 속해있다. 그리하여 10~20정도의 남은 체력으로 간신히 삶만 유지한다. 보고싶은 TV프로그램을 조금 보고, 밀린 집안일을 하고, 지인이나 가족들을 만나 인간관계 하고 나면 남는 시간은 자고 먹는 시간 뿐이다.

시간은 마치 차를 타고 지나가듯 빠르게 지나고 일상도 그렇게 흘러가면 몇년은 후딱 가 있다. 


 내가 하고싶으면 한다. 그것이 놀이든, 일이든. 조직의 울타리 덕을 보지 않고 오롯이 내 손으로 한다. 물론 삶이란 게 항상 내가 하는대로 결과치가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 순도 100프로는 아니고. 한 98프로쯤은 될 것이다. 나이 적당히 먹고 적당한 사회적 위치에서 실패라고 해봐야 평가점수 적게 받거나 승진에서 누락되는 것으로 세상 희비가 엇갈리는 그런 삶은 시시하다. 누가 알아주는 삶이 아닌 내가 오롯이 누리고 느끼고 감내하는 삶. 그것이 내가 앞으로 지향할 삶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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