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를 검사하려면 정전을 해야 한다. 전기가 없는 세상이 익숙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기의 빈자리에 많은 불편함을 느낀다. 냉장고의 음식들이 상할까 봐 걱정하는 어머님들. 정전으로 주식거래를 하지 못해 불안한 투자자들. 정전으로 프로그램이 리셋될까 봐 걱정인 사무실. 온도가 떨어져 재료가 굳을까 봐 걱정하는 공장, 단말기가 먹통이 되어 결제를 할 수 없는 상점들 등. 전기가 없는 세상은 생각보다 많은 걱정거리를 남긴다.
오늘은 빌딩에 검사를 나왔다. 관리소장과 전기안전관리자를 만나 정전을 준비하고 상가에 공지를 하며 약속시간에 전기를 내렸다. 빌딩의 상가들은 전기가 다시 언제 들어오나 걱정하며 캄캄한 가게에서 나와 기다린다. 특고압 차단기와 변압기들을 검사하고 이상이 없을 확인 한 후 전기를 살린다. 한전선로를 통해서 건물 지하에 위치한 전기실에서 정상적인 전압을 확인하고서 검사를 마무리한다.
관리실로 올라와 오래된 설비들이나 보완할 점들에 대해서 관리소장과 전기안전관리자에게 안내를 하고 서명을 받으려는 순간 사람들이 내려온다. 지하주차장 입구가 막혀 출차를 못한다고 한다. 모두들 입구로 나서서 보니 주차차단기봉이 올라가지 않는다. 정전을 하고 나면 간혹 장비들이 말썽을 일으키는데 이번엔 주차차단기가 고장이 났다.
관리소장은 주차장 출구를 따라 쌓여가는 차들을 보며 마음이 급해진다. 전기안전관리자는 주차시스템을 수리하려 여기저기 전화를 돌린다. 경험상 리셋을 하면 해결되었지만, 무엇이 고장 난 듯 주차차단기봉은 약 올리듯 들렸다가 이내 내려오길 반복한다. 잠깐 들린 순간 나가려든 차는 다시금 내려오는 차단봉에 부딪히는 걸 보면서 다들 마음만 급해진다.
서류를 정리하면서 상황을 지켜보던 과장님이 관리소장에게 다가간다. "소장님 제가 한번 해볼까요?" 물어보니 관리소장은 이내 허락한다. 과장님은 주차차단기를 살펴보고서는 육각렌치를 가져오라고 말한다. 이내 받고서 크기가 맞는 렌치를 뽑아 주차차단기봉을 고정하고 있는 육각볼트 3개를 풀어내고 봉을 뽑아 주차장 벽면에 기대놓았다. 그렇게 기다리던 차들은 제갈길을 찾아 나섰다.
관리소장과 전기안전관리자가 고맙다는 말을 한다. 과장님은 별일 아니라고 말하며 AS업체를 불러서 수리를 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고서는 빌딩을 떠났다. 사무실로 들어가면서 조금 전 상황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주차차단기를 수리하는 것과 기다리는 차들을 보내는 것 무엇이 먼저였을까? 수리를 하면 차는 나갈 수 있다. 하지만 그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사람들이 답답했던 것은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고 해결해야 할 대상은 기다리는 차들이었다. 고장 난 주차차단기와 기다리는 차들은 분명 인과관계를 가지지만, 때로는 원인을 해결하지 않아도 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